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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5화 (5/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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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성진은 시험 삼아 집에 굴러다니는 중국어 사전을 집어 들었다.

한참을 훑어 본 성진은 자신이 얻게 된 중국어 실력을 확신했다.

인쇄날짜를 보니 무려 20년 전에 나온 사전.

가볍게 훑어본 성진은 사전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 건 물론, 잘못된 오용이나 번역도 눈에 띌 정도였다.

‘좋아. 이 정도면 얼마든지 자신 있다.’

결심을 굳힌 성진은 출판사에 직접 전화를 해볼 생각이었다.

가져온 신문광고를 찾아보는데 아버지가 기침하셨는지 안방 문을 열고 나오셨다.

수척해진 얼굴에 졸음기가 가득하시다.

“어 성진아. 깼니?”

“예 아버지. 그런데 벌써 나가시려구요?”

“어. 아니 뭐 일찍 나가서 운동도 좀 하다가 출근하려고…….”

말끝을 흐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성진은 눈치 챘다.

아마도 오늘부터 새벽 인력시장 같은 곳을 알아보러 나가시려는 모양이었다.

성진은 애써 마음을 감추려고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힘드실 텐데 왜 벌써 나가려고 하세요.”

“어. 아니야, 난 괜찮다. 여보. 나 나가.”

고개를 젓는 아버지는 부득불 현관문을 나섰다.

뒤늦게 알아차린 어머니가 따라 나오며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아버지는 고집을 피우셨다.

“어휴 저 양반 참. 고집은……. 미리 도시락이라도 싸라고 하든가.”

속상해하는 어머니도 목소리가 떨렸다.

그 광경을 본 성진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후…….”

가면 갈수록 일단 돈부터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기분이 착잡해졌다.

곧 오전 9시가 되자마자 출판사 전화번호로 전화부터 걸었다.

- 예. 창연 출판사입니다.

“아 예. 중국어 번역자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 아. 그러세요. 저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예 한. 성. 진이라고 합니다.”

- 흠……. 목소리가 젊으시네요. 한성진 씨. 혹시 중국어 관련 자격증은 있으세요?

어딘가 탐탁찮아 하는 느낌을 받은 성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제가 아직 중국어 자격증은 없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고 자부합니다.”

- 흠. 관련 학과 다닌 적 있어요? 어느 대학입니까

슬슬 불리함이 느껴졌지만 학력문제는 어차피 들통 날 일.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아뇨. 저는 경기도 추원대 무역학과입니다.”

- 예? 아니 그럼 번역 경험은요?

이 대목에서 성진은 순간 고민했다.

‘가만. 어차피 학력이나 자격증은 들통 날 일이지만 이건 상관없지 않을까.’

어차피 중국어 실력은 진짜다. 학력이나 자격증은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하지만 번역 경험 같은 것은 일단 실력만 보여주면 해결될 일이라 여겼다.

마음을 다잡은 성진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예. 이따금씩 아르바이트로 중국어 번역 아르바이트를 꽤 많이 해왔습니다.”

아하. 아르바이트라…….

전화 너머 상대는 잠시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정식으로 일을 했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것도 검증할 수 있으니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잠시 반응이 없던 상대방은 미안해하며 말했다.

- 전화 줘서 고맙기는 한데 우리는 아무래도 좀 전문적인 번역가를 원해요. 경력자가 맡기에도 살짝 버거운 수준이라서요.

“아뇨. 제 실력은 진짜입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성진의 말에 다급함이 실렸지만 출판사는 냉정했다.

- 아. 미안합니다. 저희는 어렵겠어요. 미안합니다.

전화가 끊겨버리자 성진은 허탈했다.

“하……. 역시 세상은…….”

참 쉽지 않구나. 뒷말을 삼키면서 성진은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당장 자신이 가진 중국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하고 분하다.

“후…….”

한숨을 쉬면서 천장을 노려보던 성진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될 때까지 부딪쳐 봐야지.”

즉시 방에서 외출복을 입고 나온 성진은 현관문을 열며 소리쳤다.

“어머니. 저 나갔다 오겠습니다.”

마당으로 나간 성진을 안방에 계시던 어머니가 창밖으로 부르셨다.

“응? 아니, 넌 또 어딜 가.”

“일자리 구하러요.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아니, 아들? 성진아!”

다급히 부르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성진은 대문을 나섰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혀를 찼다.

“하여튼 이 집 남자들이란…….”

*   *   *

“아니 글쎄 안 된다니까?”

“제발 꼭 부탁드립니다.”

인문 학술서적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창연 출판사의 학술서적 기획편집자는 대뜸 찾아와 번역 일을 맡겨달라는 청년을 보며 눈을 흘겼다.

“대체 뭘 믿고 맡기나. 중국어 전공도 아니고, 자격증도 없고, 고작 번역 알바 경력으로는 원.”

“부탁드립니다. 일단 맡겨주시면 완벽하게 해내겠습니다.”

“어허. 이거 참. 패기로 될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침 일찍부터 웬 젊은 녀석이 번역 일을 하겠다 전화가 왔다. 경력도 없다시피 한 풋내기라 전화를 끊었다.

헌데 갑자기 출판사에 찾아와서는 자신한테 일을 맡겨달라고 설치니 편집자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멀찍이 떨어진 책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성진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 맡기면 제대로 해낼 수 있겠나?”

성진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꼬장꼬장한 인상의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군대도 나온지라 성진은 여유로운 말투를 듣고 그가 이 출판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조금 긴장됐지만 애써 목소리에 힘을 줬다.

“아 예. 물론입니다. 일단 일만 맡겨주시면 완벽하게 해서 가져오겠습니다.”

장담하는 성진을 보던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요. 일단 내년에 내기로 한 그 중국문혁평론 원고 있지? 이 친구한테 전반부 줘봐.”

편집자는 깜짝 놀랐다.

“예? 아니 편집장님. 이 친구 뭘 믿구요?”

허나 아랑곳 하지 않고 편집장은 말을 이었다.

“대신 원고료는 일단 이번 건 절반. 수준 미달이면 또 절반 혹은 없음. 기한은 다음 달까지.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보는데?”

결국 못 미더우니 테스트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성진은 그 정도로 일단 만족했다.

‘그래 기회를 얻은 게 어디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흠. 좋습니다. 그럼.”

편집장의 눈짓을 읽은 편집자가 컴퓨터 파일 몇 개를 열더니 인쇄기에서 몇 부를 뽑아 성진에게 건넸다.

제법 두께가 상당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얇았다.

“이게 일단 통상적인 한 달 작업분량.”

“어. 생각보다 얇은데요?”

“얇다고?”

성진은 솔직히 말한 감상이었지만 중년의 편집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뭘 모르는 친구군.’

이걸 한 달 안에 끝낼 수 있다면 중국어 인문학술 분야에서는 번역 속도만으로 국내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번역가다.

“일단 해보고. 절반이라도 제대로 해오면 인정해주지.”

나름 배려해주는 어투였지만 성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완벽하게 해오겠습니다.”

“흐음…….”

못 미더워하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성진은 출판사를 나왔다.

근처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면서 성진은 손에 든 원고를 훑어봤다.

“한 달 분량이라…….”

손안에 든 원고는 잘해야 십 수장.

“이게 한 달이나 걸린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전문 번역자들이 들으면 기함을 지를 일이었다.

중국어는 어휘의 종류도 많고, 같은 말도 용법과 맥락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그걸 떠나서 성진이 손에 든 원고는 상당한 지식과 공부를 필요로 하는 학술 원고였다.

“한나절이면 끝낼 수 있을까?”

이번에는 혼잣말이 아니라 인공지능 팔찌에 대고 물은 말이었다.

- 데이터를 읽어주십시오 제가 즉시 번역하겠습니다.

“응?”

깜짝 놀란 성진은 재차 물었다.

“내가 읽어서 번역을 네가 해주겠다고?”

- 그렇습니다. 육안을 통해 읽으시는 즉시 번역 데이터를 시각정보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헛!”

침음성을 흘린 자신이 이 인공지능 팔찌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새삼 갈수록 대단하게 느껴지는 인공지능 팔찌다.

성진도 이제는 인공지능 팔찌의 성능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고 있었다.

지하철 의자에 앉아 차분히 원고를 읽어보니 눈에 들어온 모든 문장 전체 분량이 시야 한구석에 한글로 번역되었다.

성진이 순간 의문을 느끼는 부분의 문장은 뇌리에 떠올리는 즉시 자세한 주석이 첨부됐다.

성진은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이거 진짜 머릿속에 컴퓨터를 넣고 다니는 셈이었구만.”

현대인은 스마트폰이라는 휴대용 고성능 기기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

허나 지금 성진은 두뇌 자체에 실시간 정보처리가 되는 컴퓨터를 내장한 셈이다.

“그럼 이걸 번역해서 e메일로 보내야 하는데 좋은 방법 없어?”

pc나 프린터에 직접 꽂아서 출력이 가능하면 모르겠지만 인공지능 팔찌에는 연결할만한 usb커넥터 같은 구멍이 없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스터. 저를 통해서 직접 인터넷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 그랬었지 참.”

그러고 보니 팔찌는 지구상의 모든 전자파를 송수신한다고 했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가만 그러면 지금 바로 번역한 파일로 바꿔서 메일 첨부할 수 있지?”

- 물론입니다. 웹 검색을 실행하시겠습니까?

“응. 바로 해볼게.”

즉시 성진의 눈앞 한편에 인터넷 검색창이 나타났다. 성진은 의식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검색어를 집어넣고 검색실행을 눌렀다.

금방금방 검색결과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 속도가 엄청났다.

“이야. 진짜 어디서든 인터넷을 쓸 수 있겠네.”

- 위성 인터넷 파장이 송수신되는 장소라면 지구상 어디든 인터넷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 좋아 좋아.”

성진은 곧바로 포털 사이트인 웨이버에 들어가서 자기 메일계정으로 로그인을 했다.

직후 의식명령으로 바로 번역 데이터가 첨부됐다.

이 모든 작업이 서서 걷는 동안 단 2초에 행해졌다.

‘진짜 장난이 아니구나.’

쓰면 쓸수록 신통한 물건이다.

성진은 팔에 찬 인공지능 팔찌를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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