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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4화 (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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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업!”

    낯선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떠오를 듯 말 듯 희미하다.

    곧 머릿속에 생전 처음 보는 한자가 구체적으로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뜻과 음, 말하는 법 등 수도 없는 한자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새겨지고 어휘와 문장, 문법이 뒤를 이어 떠올랐다.

    더불어 어휘와 문장에 관련된 중국의 간단한 문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중간 중간 곁들여졌다.

    평소라면 지쳐버렸을 그 막대한 정보들이 지금 이 순간, 성진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새겨져 완전한 지식으로 자리잡아갔다.

    성진은 생전 처음으로 만나는 순수한 앎의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후아아아아아!”

    기쁨을 담은 환성을 내지르고 성진은 격정적인 한숨을 토했다.

    “흐아아아. 이거, 이거 진짜 끝내주네.”

    일전에 겪었던 인공지능 팔찌의 사용법을 배우던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달랐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중국어의 모든 어휘와 문장들이 머릿속에 새로이 자리 잡혀 있었다.

    중국어라고는 니하오, 쎄쎄 밖에 모르던 성진은 지금은 중국어로 뭐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성진은 가슴에 차오르는 환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내가, 내가 중국어를 정말 완전히 익혀버린 거야?!”

    - 그렇습니다. 마스터. 현재 마스터께서는 현용 중국 북경어의 상당 어휘를 습득하셨습니다. 다만 데이터 부재로 전달해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추가 데이터가 습득되는 대로 수시로 정보를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응? 정보 전달을 하려면 따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정보 전달 시에 신체자극을 받으면 치명적일 수 있다는 말에 살짝 긴장했던 성진이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간단히 대답했다.

    - 지극히 소량의 정보는 언제 어느 때나 간단하게 입력해드릴 수 있습니다.

    “좋아. 알았어.”

    말을 들어놓고 보니 수시로 버전 업 패치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머릿속에 넣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보통 프로그램이 아니다. 외국어 하나를 통째로 익히게 해줄 정도의 프로그램이다.

    “그러면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너한테 바로 물어봐도 되는 거지?”

    - 예 그렇습니다. 다만 필요하신 정보가 수집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또 궁금해지는 부분이었다. 인공지능 팔찌도 모르는 정보라는 게 어떤 것인가.

    “너한테도 정보가 없을 수 있다는 건가? 네가 모르는 것도 있을 수 있어?”

    - 저는 지구 인류가 전자파로 발신하는 통신 파장을 검출하여 정보를 습득합니다. TV, 라디오, 무선 인터넷을 비롯해서 기타 무선 전자파를 통해서 정보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중국 북경어 정보는 지역적으로 가까워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지만 혹시라도 전자파로 사용되지 않을 만큼 사용 확률이 낮은 어휘는 데이터로 수집할 수 없습니다.

    즉 전자파를 통해서 정보를 얻기 때문에 통신으로 사용되지 않는 언어는 축적이 안 된다는 소리였다.

    “그렇구나. 그럼 모르는 단어도 있을 수 있겠네?”

    -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지속적으로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언어 체계를 분석한 저의 자체적인 추측 결과 현재 사용되는 중국 북경어 전체 어휘의 약 99% 이상은 습득하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정도라면 거의 모든 걸 익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만하면 현지인 수준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진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 정도라면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정말 훌륭해! 최고야!”

    입속에서 지금이라도 중국어를 마구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중국어가 머릿속에 홀연히 들어와 직접 말하고 읽고 쓰기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10시간이나 걸린다더니 오히려 짧은데? 순식간에 끝났잖아?”

    막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채워졌지만 성진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순간으로 느껴졌다.

    - 아닙니다. 마스터. 현재 약 596분이 경과했습니다. 총 소요 시간 10시간이 맞습니다.

    인공지능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어둑해져서 해는 사라지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시간을 흐른 것을 직접 보니 성진도 그제야 확실히 실감이 났다. 현실감이랄까.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지 무게감이 밀려들었다.

    ‘고작 몇 분밖에 안 되는 시간처럼 느꼈는데 10시간 동안 중국어를 배웠다. 그것도 거의 완벽하게.’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고 전과는 다른 진지한 눈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신기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기묘한 우연으로 만난 외계인 아저씨가 선물이라며 떠넘기다시피 하고 간 팔찌. 처음에는 말하는 기능이 달린 신기한 장신구 정도로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건 정말 엄청난 보물이었다. 아침에 손에서 벗어놓으려던 생각이 미안해질 정도로 귀중한 보물.

    그때였다.

    “아들, 성진아. 엄마 들어간다?”

    어머니였다. 미리 말은 했지만 군대에서 나오자마자 10시간동안 문 잠그고 들어가 있으니 걱정이 될 일이었다.

    약속을 지키긴 했지만 부모 입장에서 걱정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진이 얼른 문을 따고 나갔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방 밖으로 나선 성진의 얼굴을 보고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아들. 무슨 좋은 일 있어?”

    “좋은 일이요?”

    “응. 지금 우리 아들 표정이 엄청 밝은데?”

    어머니가 본 성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성진은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좋은 일 있죠. 아주 엄청 좋은 일.”

    “무슨 일인데?”

    “나중에 차차 말씀드릴게요. 한참 이따가요.”

    의아해하는 어머니를 두고 성진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4월 말의 여름 초. 밤공기가 시원하다. 기지개를 펴며 주변 공기를 깊숙이 들이쉰 성진은 왼팔에 찬 팔찌를 바라봤다.

    외국어를 완벽하게 익히고 나니 팔찌의 진면목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런 대단한 팔찌를 차고 있으려니 뭔가를 해내도 단단히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차오른다.

    성진은 양팔을 쭉 폈다.

    “좋아! 이제부터 시작이다!”

    만세를 올려붙이며 성진은 새로운 포부를 나직이 외쳤다. 그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지켜보던 어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셨지만 말이다.

    *   *   *

    저녁을 먹자마자 자기 방으로 들어간 성진은 곧바로 광둥어와 일본어까지 정보전달을 받기를 원했다. 그 요구를 인공지능은 거부했다.

    - 직접적인 정보전달은 현재 마스터의 뇌에 무리한 과부하를 주게 됩니다. 한 번의 대용량 정보전달 이후 현재 상태로는 1개월 이상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뭐라고? 하지만 아까 중국어를 배우는 데 총 16시간이 걸린 댔잖아. 10시간만 배웠으니 나머지 6시간짜리는 배울 수 있는 거 아니야?”

    - 죄송합니다. 마스터. 인위적으로 주입한 정보이기 때문에 대용량 정보전달이 끝난 뒤에 뇌에 정보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야 합니다. 이후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를 뇌가 끝마쳐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준비기간이 한 달이라고?”

    - 현재 마스터의 두뇌상태로는 그렇습니다. 또한, 현재 상태로는 한 회당 최대 22시간의 정보 입력이 가능합니다.

    성진은 조금 실망했다. 횟수마다 기간의 제한이 있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외국어도 한꺼번에 배울 걸 아쉬워했다.

    “후아. 한 달이라니 오래 걸리네.”

    어떻게 보면 남들이 10년 가까이 공부해도 얻기 어려운 외국어 실력을 10시간 만에 얻었다. 한 달의 기다림이라 해도 그리 긴 건 아니다.

    하지만 방금 전 중국어를 직접 머릿속에 주입받는 엄청난 경험을 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지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내재화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 죄송합니다. 마스터. 사전에 이런 제한사항을 알려드리지 못한 저의 실수입니다.

    인공지능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성진의 대사반응을 확인하고 실망을 느끼는 심상적 표현이 판단된 것이다.

    “아니야. 이건 내 욕심이지. 사전에 안 물어본 내 잘못이기도 해.”

    - 마스터.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두뇌강화를 통해서 대용량 정보전달을 좀 더 자주, 여러 번 견딜 수 있는 상태로 개선할 수 있습니다.

    “두뇌 강화?”

    - 그렇습니다. 현재 마스터의 두뇌 능력 대부분을 전담하는 뇌의 각 부위 신경 체계를 전기적 자극을 통해서 개선할 수 있습니다.

    성진은 인공지능의 구체적 설명에 대해 바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뜻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인공지능이 말하려는 바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그러니까 어쨌든 내 뇌를 발달시킨다는 거야?”

    - 그렇습니다. 1차적으로 사고 지각 능력의 대부분을 전담하는 두뇌 피질의 신경 전달 체계를 개선합니다. 이 경우 사고력과 지각력, 기억력 등이 향상됩니다. 차후 단계에 따라 추가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겠지만 현재는 1차 개선을 시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뇌의 성능부터 바꾼다는 소리였다. 두뇌 능력을 아예 바꿔버린다는 말에 성진은 또 놀랐다.

    “어째 좀 무서운데?”

    SF영화에서 뇌를 바꾸는 이미지가 떠오른 성진은 몸서리를 쳤다.

    “혹시 내 성격이나 인격이 뒤바뀌는 거 아니야?”

    인공지능이 특별히 악한 의도가 있을 거라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사고방식과 성진의 가치관이 같을 거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외계인이 만든 물건이 아닌가.

    -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스터. 저 같은 인공지능은 사용자의 인격과 성격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흠.”

    성진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식을 자주 전달받고, 뇌의 능력까지 강화된다는 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경험이 없다면 몰랐겠지만 성진은 이미 경험을 했다.

    마치 지식의 홍수 속에 잠기는 듯한 황홀한 기분을. 그리고 지금도 그 지식들은 고스란히 자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성진은 결심했다.

    “좋아. 믿어보겠어.”

    - 수락하시겠습니까?

    “응. 물론이야.”

    그러자 곧바로 눈앞에 안내창이 나타났다.

    허락하려던 성진이 문득 생각난 듯 인공지능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몇 시간짜리야?”

    -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뇌 강화 작용은 상시 적용됩니다. 식사, 취침시간에도 마찬가지이며 모든 일상의 생활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상시적으로 적용됩니다.

    한마디로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 늘 자동으로 꾸준히 관리된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어쨌든 위험한 건 아니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좋아.”

    성진은 결심을 굳히고 예를 눌렀다.

    “어라?”

    헌데 아무런 변화의 조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시작한 거야?”

    - 그렇습니다. 마스터. 마스터께서 직접 체감하실 만큼 효과를 보시려면 최소 7일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별한 뭔가가 느껴지는 것이 없어 조금 의외였지만 성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주일이라. 참. 그러면 다음 정보 입력은 언제 받을 수 있어?”

    - 저의 예측으로는 약 15일 후에 하실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한 달에서 대충 이주일이 줄어든 셈이었다. 비록 몸으로 느껴지는 효과는 없었지만 성진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이주일이라면 까짓 거 기다리지 뭐.”

    성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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