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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정복자-3화 (3/185)

<-- 3 회: 1권 - 행운 -->

역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달려오자 어느새 점심 무렵.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엄마! 아들 왔어요! 성진이에요!”

대문을 흔들자 어머니가 직접 나와 문을 열어주셨다.

“고생했다. 우리 아들.”

“고생은요.”

집으로 들어가니 성진의 밥상을 차려준다고 어머니가 부지런히 식사를 준비 중이셨다. 

“우와, 장어구이도 있네? 아들 전역한다고 이런 것까지 하셨어요?”

평소에 못 보던 산나물 반찬이며 열무김치에 대구찜까지 있었다. 그 외에도 성진이 좋아하는 반찬이 한상 가득 푸짐히 차려져 있었다.

“아버지도 오늘은 일찍 들어오셔. 너 온다고.”

어머니가 마저 남은 밑반찬을 가져오시는데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버지신가보다.”

“제가 나갈게요.”

잽싸게 대문으로 나갔다. 문을 여니 머리가 하얗게 샌 아버지의 익숙한 모습이 그대로 서 있었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을 한 아버지가 얼굴에 피로가 깃들어 있는 것도 잠시, 성진을 보자 마주 보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성진아! 전역한 기분이 어떠냐?”

“에이. 이제부터 시작이죠 뭐.”

“허허. 그래. 남자는 군대 나오고 시작이지.”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성진은 대문을 잠갔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유독 지쳐 보였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성진은 곧 숟가락을 놓고 밥을 펐다. 모처럼 성진이 모인 가족식사였다.

다만 여고 기숙사에 있는 성진의 여동생 성희가 빠진 자리가 허전했다.

“주말에 성희보고 집에 오라 그래. 오빠 왔잖아.”

“당신도 참. 이제 전역해서 맨날 볼 텐데 뭘 집에 오라고 해요. 공부하느라 바쁜데.”

“맞아요. 오지 말라고 하세요. 제가 언제 엄마 심부름 겸 해서 갔다 올게요.”

“그래 그게 낫겠다.”

식사를 다 마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 쉬시고 설거지를 하던 성진이 조용히 어머니에게 속삭였다.

“아버지 요즘 편찮으세요?”

“으응? 왜? 그래 보이니?”

“아니요. 좀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아서요.”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더니 아버지가 주무시는 안방 쪽을 흘금 눈짓하셨다.

“에휴. 너희 아버지 다니시던 회사가 망했단다.”

“네에?”

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째서요? IMF 때도 안 망하고 버티던 회사가.”

“그러게나 말이다. 어쨌든 말씀은 안 하시는데 여기저기 품 팔러 다니시는 모양이야.”

“그럼 아버지는 아직 숨기고 계신 거예요?”

“그래. 엄마도 회사에 전화했다가 알았어. 무슨 대기업이 인수를 했다는데 나이 든 사람들은 다 잘린 모양이더라. 너 휴가 나왔을 때만해도 내색 않던 양반이 요즘은 힘에 부치는지 원.”

“네에…….”

어머니는 그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설거지를 부지런히 끝내고 뒷정리를 마친 성진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누웠다.

“후우…….”

부대에 있을 때에는 그저 집에만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전역하고 집에 오니 현실 문제와 벌써 맞닥뜨려야 했다.

“아버지가 해고되셨을 줄이야.”

성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적은 월급에도 늘 야근하고 바쁠 때는 며칠씩 공장에서 잠을 주무시던 아버지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셨는데.”

이제야 아버지가 왜 그리 기운 없는 기색이셨는지 알았다. 평생 일터로 삼아온 곳에서 쫓겨났다.

가족들한테는 한마디 말도 못한다. 몰래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마음이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젠장.”

성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돈을 벌어야겠구나.”

전역 직후에는 조금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장을 잃으시고 저렇게 되셨는데 낯 두껍게 놀 수는 없다.

“가만 있어보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인근에 알바자리나 알아볼까.”

집에 있어봐야 인터넷은 끊은 지 오래다.

시내에서 생활정보지를 구해다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가려니 문득 팔에 차고 있는 인공지능 팔찌가 생각났다.

“가만 혹시…….”

성진은 그 순간 이 외계인에게서 선물 받은 팔찌를 통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간략하게 들었던 사용 기능법과 더불어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 착상들이 얽혔지만 쓸 만한 발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 하긴. 고작 말하는 팔찌를 가지고 무슨 돈을 벌겠어.’

외계인이 주고 간 선물이라고 밝히면 과학자들은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거 가지고 돈이 될까?

심하면 외계인 운운한다고 정신병자나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았다.

‘그러고 보니 외계인이 준 물건치고는 어째 참 약하단 말씀이야?’

슈퍼맨처럼 건물도 무너뜨릴 힘을 내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스파이더맨처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뭔가 감이 잡힐 듯하면서도 아직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고민을 접은 성진은 현관을 나섰다.

때가 아직 한낮이라 여름 무더위가 이글거렸다.

“아 이거 멀리 가기에는 너무 더운데.”

동네 입구에 있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니 다행히도 생활정보지 몇 장이 칸칸이 남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구직란을 펼쳐보자 주로 일용직 노동일이나 용접공, 택배업 등이 대다수.

성진이 생각하는 가벼운 아르바이트 자리보다는 기술이 있는 경력직이나 하루 온종일 일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용접이라면 나도 할 줄은 아는데…….’

공병 부대에 있으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용접 일이었다.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따로 용접 자격증이 없는 성진이 지원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일단 용접은 나중에 생각해봐야지.”

다음으로는 택배 배달기사를 구하는 일이 제일 많았다.

그 외에 인력사무소에서 일용직을 구하는 일 등이 주류.

간간이 사무직 자리도 있었지만 모두 2년 이상 근무할 사람을 뽑는 자리였다.

“후, 나하고는 조건이 영 안 맞네.”

그때 바로 다른 일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이게 뭐야? 총 300만원 상당. 장당 사만 원?”

엄청난 액수에 사기가 아닌가 싶어 아래를 보니 그제야 알아본 성진이 피식 웃었다.

“에이, 그러면 그렇지. 번역 일이었구나. 일어, 중어 번역이라?”

전공이 무역학인지라 영어는 어느 정도 공부했지만 번역을 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일본어, 중국어는 더더욱 문외한이다.

게다가 출판사였다. 이런 곳이면 상당한 실력이 필요하리라.

그래도 한번 일하고 300만원이라면 탐나는 액수이기는 했다.

“이런 거 보면 뭐해. 하아! 정말 외국어 잘하는 사람들이 부럽구나.”

한숨을 쉬며 다른 일을 찾으려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 마스터. 외국어를 익히길 원하십니까?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뜩이듯 인공지능의 메시지가 울렸다.

“어? 으응. 그게 아무래도 잘하면 좋지.”

외계 기술로 만들어진 팔찌다. 아무래도 외국어를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 알겠습니다. 어떤 언어를 알고자 하십니까?

“글쎄. 아무래도 지금은 일본어나 중국어?”

농담 삼아 말하는 심정이었다.

지금 당장 공부 시작해서 돈이 될 리 없다.

물론 학문의 가치를 꼭 돈에 비교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성진에게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돈이다.

- 마스터. 현재 수집된 데이터 수준으로 전체 약 20시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뭐?”

대뜸 하루 가까이 되는 시간을 요구하니 성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 현재 축적된 일본어, 중국어 데이터를 숙달하시는 데 총 20시간이 소요됩니다. 이 중, 일본어만을 원하실 경우 약 4시간, 그리고 중국어는 16시간이 소요됩니다.

“중국어 데이터 숙달이라고? 그러고 보니 아까.”

성진은 아까 전에 팔찌의 기능 설명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머릿속에 직접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 마치 노도처럼 밀려드는 정보량에 성진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호, 혹시 외국어를 직접 내 머리에 입력하는 거야?”

- 그렇습니다.

“그러면 완벽하게 익히게 되는 건가?”

- 현재 축적된 데이터 기준으로, 중국 표준어인 북경어와 광둥성 지역의 방언인 광둥어만이 가능합니다. 그 외에 중국의 수많은 소수민족들의 지방 방언은 데이터 수집량의 부족으로 제공해 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아. 광둥어나 북경어는 회화 정도는 가능한 수준이지?”

- 회화는 물론 작문 또한 가능합니다.

“오옷. 좋아. 그 정도로 충분해!”

사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다. 중국 표준어인 북경어만 완벽하게 익힐 수 있어도 중국 수출이 증대되는 이런 시기에는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중국어는 단계가 깊어지면 그만큼 익히기가 매우 힘들다. 한자의 종류가 워낙 많을뿐더러 성조라고 해서 읽는 억양에 따라 읽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일단 북경어만 익힐 수 있을까?”

- 예. 알겠습니다. 마스터. 약 10시간의 소요가 예상됩니다. 두뇌에 대용량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 중에는 두뇌가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어떠한 자극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 주변의 안전을 확보해 주십시오.

“하긴 10시간이나 걸린다니 일단 집으로 가야겠구나.”

신문지만 챙겨들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밖으로 나간 성진이 생각보다 빨리 들어오자 어머니는 놀란 표정이었다.

“어머 아들. 왜 이리 빨리 들어왔니?”

“예에. 생활정보지만 구해오려고 한 거였어요.”

가볍게 둘러댄 성진이 들고 온 생활정보지 뭉치를 들어 보였다. 아무리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라도 보이지도 않는 외계인 팔찌를 설명하기는 무리다.

성진은 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어머니. 저 한 10시간 정도만 방에 있을게요. 죄송한데 방문을 잠그고 있을 테니까 잠시만 들어오지 말아주세요.”

“응? 10시간 동안 잠그고 있겠다고?”

어머니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머 아들. 혈기 왕성한 나이인 건 아는데, 대낮부터 그……. 야……. 동영상을 보기에는 좀 그렇지 않니?”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성진은 순간 아차 싶었다. 참 단단히 오해를 살만한 부탁이 아닌가.

“아아, 저 그런 게 아니라요. 제가 진짜 중요한 일을 해야 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아주 깊이 집중해야 하거든요.”

“뭐어? 집중까지? 얘가 점점.”

어머니가 실눈까지 뜨시자 성진은 안절부절 못했다.

“아이 참. 어머니,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성진이 당황해서 한참을 쩔쩔매고 나서야 어머니는 표정을 풀고 웃으셨다.

“호호 그래 알았어. 이 엄마가 믿어줄게. 까짓 거.”

말과는 달리 키득거리시면서 부엌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하셨다.

성진은 얼굴이 벌게져서 항변했지만 소용없는 노릇이다.

“하아 참. 정말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알았다니까 아들. 호호호.”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끝내 성진을 놀려먹을 심산이신 모양이셨다.

“후. 아무튼 저 10시간만 있다가 나올게요.”

이상한 오해를 산 채 방을 들어간 성진은 방문부터 걸어 잠갔다.

“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하지?”

소리를 통한 자극도 위험하지 않나 싶어 성진이 물어봤지만 인공지능의 대답은 간단했다.

- 염려하지 마십시오. 직접 정보 전달 시에는 원활한 정보전달과 안전을 위해 시각과 청각을 차단합니다. 직접적인 신체 자극이 아니라면 상관없습니다.

“음. 그래. 알았어.”

중국어, 정확하게는 북경어를 10시간 만에 마스터한다는 생각에 들뜬 성진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책상 의자에 앉았다.

“이대로 시작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원하신다면 누우셔도 상관없습니다.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해주십시오.

“난 이대로 괜찮아.”

- 예.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럼 이제부터 중국 언어 – 북경어 범주로 수집된 모든 정보를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인공지능의 음성이 울리고 성진도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곧바로 머릿속에 강렬한 정보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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