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회: 1권 - 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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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출발하고 30분쯤 지났을까.
좌석에 앉고 가만히 있으려니 그제야 팔목에 씌워진 은색의 금속 팔찌가 신경이 쓰였다.
“그나저나 이건 어떻게 씌운 거지? 접이식도 아닌 거 같은데.”
무심코 말한 순간,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 착용 시에는 착용자의 신체 크기에 맞춰서 자동으로 착용됩니다.
“헉!”
깜짝 놀란 성진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누, 누굽니까!”
당황하는 성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 안심하십시오, 마스터. 저는 마스터께서 착용중인 장신구형 인공지능입니다.
성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신구형 인공지능이라구요?”
- 그렇습니다.
성진이 팔찌를 바라봤다. 알록달록 박혀있는 큐빅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사방을 돌아봤다. 성진이 앉은 기차 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의심하는 사람들의 눈총을 피하려고 일부러 아무도 없는 기차 칸을 골라 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정말 이 팔찌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이 팔찌가 당신……. 아니, 참. 네가 이 팔찌라고? 그러니까 인공지능?”
- 그렇습니다, 마스터. 지금부터 마스터에게 저를 양도한 분께서 미리 지시하신 기능 설명을 간략히 실행하고자 합니다. 이 기능 설명에는 마스터의 두뇌 스캔 결과 약 5분여가 소요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눈앞에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에나 나올 메뉴창이 떴다.
초보자 기능설명이 시작됩니다.
프로그램 메뉴창이 시야 한편에 나타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SF영화에나 나올 안경 모니터를 착용한 기분이었다.
- 메뉴 조정은 의식을 통해 간단히 실행하실 수 있습니다. 조정 방법 매뉴얼을 두뇌로 직접 전송합니다.
인공지능의 안내말이 나오자 신기하게도 메뉴의 조정방법이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원래부터 있던 몸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처럼 손쉽게 눈앞의 메뉴가 선택됐다. 신기한 기분이 든 성진이 ‘예’를 눌렀다.
- 초보자 기능 설명을 실행합니다. 진행 시간은 5분. 중단을 원하시면 언제든지 종료할 수 있습니다.
안내말과 함께 막대한 정보량이 성진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헉!”
절로 감탄이 나왔다. 마구 밀려드는 정보를 성진의 두뇌가 물먹는 솜처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이 개발된 외계 문명의 유래, 간단한 역사, 장신구형 인공지능의 개발에 이르게 된 내력과 필요성, 장신구형 인공지능의 주요 기능과 작동 방식에 대한 간략한 설명까지 성진의 머릿속에는 빼곡한 정보가 자동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졌다.
“이럴 수가!”
중간에 종료할 수 있다지만 성진은 종료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막대한 정보량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저장되는 경험은 신선하고 생경했다. 그렇게 5분을 꼬박 채워 모든 정보를 흡수한 성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그렇구나. 넌 무려 수억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물건이었네.”
- 그렇습니다. 또한 기능 설명을 통해 아셨겠지만 저는 현 행성 지구의 모든 정보를 전자파장을 통해 자동으로 흡수, 분석합니다. 차후 데이터가 갖춰질 때마다 저를 통해서 지구상의 필요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정보는 막대하게 들어왔지만, 기능 하나하나가 어떤 중요성을 가졌는지, 어떻게 응용해서 사용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실제 사용보다는 외계의 역사나 유래 같은 성진한테는 꼭 필요하지 않은 정보가 더 많았다.
오히려 실제 기능정보는 간략하게 개념만 알 수 있는 정도였다. 때문에 인공지능은 스스로 주인의 이해도를 추정하고 기능 사용법에 대한 부연설명을 했다.
- 자세한 기능 사용법은 해당 상황 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지나친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오히려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성진은 몰랐지만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훨씬 더 주인의 능력을 반영해가며 섬세하게 적응을 돕고 있었다.
“그, 그래. 고맙다.”
갑자기 당황스런 일을 너무 많이 겪은 성진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 아울러 직접 말씀하시지 않아도 생체 신호와 뇌파를 통해서 직접 저를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익숙해지시면 따로 지시를 내리시지 않아도 생각하시는 것만으로 간단한 기능을 실행합니다.
“으음. 알았어.”
엉겁결에 대답은 했지만 아직 실감은 나지 않는다. 현재 성진은 그저 말하는 신기한 팔찌를 얻은 기분이었다.
한편 인공지능은 주인인 성진의 뇌 반응과 신체대사를 스캔한 결과 집중력이 저하되고 확신보다 모호함이 앞서는 걸 판단하고 설명을 중단했다. 한꺼번에 막대한 정보량이 입력된 상태였다.
아직 주인은 기능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어려울 거라 자체 추측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지금은 그저 집에 갈 생각에 젖어있는 전역군인일 뿐.
대신 팔찌가 신기해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으려니 문득 자신이 요란한 모양의 팔찌를 차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거 너무 튀는 디자인이지 않나?’
성진은 팔찌를 만지면서 아무래도 군복에 이런 요란한 장신구를 걸치려니 내심 부담스러웠다.
팔찌를 벗으려 해도 이리저리 당겨보니 팔찌는 성진의 팔목 굵기에 딱 맞아서 손에 걸린 채 잘 빠지지 않았다.
“어? 안 빠지잖아.”
그 순간 성진의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곧바로 인공지능의 음성이 울렸다.
- 현재 저의 착용모습은 다른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광학 미채로 모습을 위장하고 있으며 지금 제 모습을 인지하시는 이유는 마스터께 뇌파전송을 통해서 착용 모습을 보실 수 있게 해드리기 때문입니다.
“뭐? 광학미채? 그게 뭐야?”
- 빛을 이용한 위장기술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가시광선으로 저의 착용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조작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외부의 인간들은 저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밖에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진은 팔찌를 가만히 들어 올려 기차 창문에 비췄다. 그런데 창에 비치는 것은 성진의 팔뚝뿐. 팔찌는 온데간데없었다. 긴가민가해서 아예 왼팔을 작게 들었다 내렸다 운동하듯 움직였다. 그래도 창문에 비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정말인가.”
- 사실입니다. 마스터.
이쯤 되니 성진도 일단은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 다른 승객들이 들어왔다. 성진은 일부러 다른 승객에게 자기 왼팔을 은근히 대고 시간을 물어보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사람들은 성진에 팔에 이런 요란한 팔찌가 붙어있다는 걸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헐.”
누구도 자신이 팔찌를 차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대단한 기능이지만 성진의 감상은 그저 팔찌가 말하는 재주에 안 보이는 기능까지 추가됐다는 정도였다. 가시광선을 완전 조작해서 존재를 감추는 것은 인간의 통상적인 과학기술을 수세대는 앞서는 일이다. 광학 기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알면 까무러칠 물건. 그런 엄청난 팔찌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성진은 일단 벗어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근데 벗을 수는 없어?”
성진의 물음에 인공지능이 반문했다.
- 불편하십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더울 거 같아. 지금 여름이잖아.”
-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의 무게는 0.0001g에 가깝습니다. 또한 공기, 열을 완전 투과하며, 신체 근육조직에 대해 어떠한 압력도 가하지 않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성진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일단 좀 벗게 해주면 안 될까?”
이쯤 되자 인공지능도 슬슬 사정조였다.
- 저기 마스터. 그러니까 저를 착용하신 상태에서 어떤 불편도 느끼지 않으실 거라 말씀드린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제야 성진도 감을 잡았다.
“그러니까 혹시 못 벗는다는……. 그런?”
- 예. 그렇습니다.
“허얼?”
- 저의 본래 소유주께서 제가 도난당하는 일을 우려하셨습니다. 때문에 마스터의 사망 이전에는 결코 탈착할 수 없습니다.
사망 이전에는 탈착불가. 그 말은 즉 죽을 때까지 팔찌를 차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건 좀 너무하는데.”
-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그럽게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평생 팔찌를 달고 살아야 한다 생각하니 귀찮은 혹이 달린 기분이었다.
‘그 외계인 아저씨 정말 이상한 짓을 해놓고 가셨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기묘한 이유로 만난 외계인의 선물이지만 일단 이 팔찌는 아주 신기한 체험을 하게 해줬다.
“에휴. 어쩔 수 없지. 좋아. 일단 앞으로 나와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니. 잘 부탁할게.”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해놓고 보니 조금 기분이 이상해진다. 마치 애인한테 프로포즈를 하는 느낌?
-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스터.
“그럼 가자고.”
나직이 웃으며 기차 좌석에 몸을 누인 성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까지도 성진은 이 새로운 동반자 덕에 어떤 일을 겪게 될 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