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회: 1권 - 조우 -->
- 빠밤 빠빠빰 빠빠라빰 빠빠라빰 빠빠빰 빠빠빰 빠빠라 바빠빰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 같다. 이 귓전에 아예 박힐 듯한 기상벨 소리.
전군 60만 장병을 깨우는 대한민국 국군의 기상나팔 소리가 심신을 흔들었다.
“아으으아으…….”
성진도 신음을 흘리며 매트리스에서 잠을 깼다.
하지만 오늘은 여느 날과 다르다.
부대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기상.
국방부 시계는 언제나 돌고, 전역의 날짜는 반드시 온다. 아니 드디어 왔다.
드디어 아침이 밝았음을 깨달은 전역자 성진은 양팔을 쭉 펴들고 속으로 만세를 질렀다.
‘아. 드디어 전역이다.’
잽싸게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말끔한 A급 군복을 갈아입었다. 미리 전투모에 박아 넣은 예비군 마크가 오늘따라 왜 이리 뿌듯한지 모른다.
“아하. 드디어 오늘이 전역이로다.”
그런데 문득 생각난 전날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조상님이나 돼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외계인이라니?
‘차라리 길몽이다 싶으면 로또라도 긁을 텐데.’
이상한 외계인이 나타나 뭐라 중얼거리며 꿈이 끝나버렸다.
묘하다 싶어 생각하던 성진은 피식 웃었다. 그저 기분 좋게 미리 광을 낸 전투화를 신었다.
기쁜 전역일에 꿈이야 무슨 상관이랴.
* * *
아침 점호를 마치자마자 대대장실을 찾아간 성진은 우렁차게 전역 신고를 했다.
대대장실을 나와 내무실로 짐을 챙기러 올라가는데 축하해주러 찾아온 행보관이 말을 건넸다.
“이 녀석. 부사관 해보라니까 말 참 안 듣더니. 아무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밝게 웃는 성진을 보며 행보관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등병 시절부터 온전히 자기 휘하에서 성장하는 걸 본 성진이었다. 짬 먹고 병사들을 이끄는 병장을 놓치는 것도 부대 살림을 책임지는 그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눈치였다.
“전역하고 할 일 없으면 부대의 품으로 돌아와라. 반갑게 맞아주마.”
양 팔을 벌려 보인 행보관을 보면서 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에효,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뭐야, 인석아?”
너스레를 떨며 전역 신고를 마친 성진은 나는 듯한 발걸음으로 부대를 나섰다.
* * *
위병소를 나서고 한 10여분 걸었을까. 곧바로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성진의 부대가 비교적 민간인 지역에 주둔하는 덕이다. 다시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으려는 찰나 기다릴 새도 없이 곧장 버스가 도착했다.
‘오늘따라 운이 좋은데?’
버스는 단숨에 도로를 내달려서 시내 중심가로 들어갔다. 한참을 달리고 드디어 성진이 내린 정거장은 바로 맞은편에 기차역이 있는 곳이었다.
“아아. 이 사회의 공기여.”
아침 출근길로 바쁜 행인들, 요란한 차 경적 소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아침 도시의 활기만으로도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기분 좋게 기차역으로 들어간 성진은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깃거리를 산 뒤 출발 시간부터 확인했다.
“지금이 8시 35분이니까 딱 15분 뒤네.”
마침 기차 시간도 딱 맞았다. 성진은 쾌재를 부르며 기차 승강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른 오전 시간이라 지방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성진은 비어 있는 의자 한쪽에 앉아 기차역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베어 물었다.
한 개를 다 먹어가니 드디어 기차가 들어오는 알림벨이 울렸다.
- 잠시 후 기차가 들어옵니다.
딩딩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성진도 남은 김밥을 봉지에 챙기고 일어나는데 심상찮은 광경이 눈에 띠였다.
“엇, 저런.”
양복 차림의 중년인이 탄식을 흘렸다. 화기애애 떠들던 여성들도 손으로 입을 가렸다.
술에 취했는지 걸음이 어색한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기차가 들어오는 선로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봐요!”
한 중년인이 제지하려 불러봤지만 남자가 뒤돌아 본 순간,
“아니 저런!”
남자의 몸은 막 선로로 떨어져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딩딩거리며 우는 기차의 경고음 소리가 더욱 또렷해지고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전면부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어머 어떻게 해.”
당황한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고 탄성만 지르는 사이 성진이 곧바로 튀어 나갔다.
남자가 선로 쪽으로 떨어지는 걸 본 순간에는 그저 ‘저러면 안 되는데’하는 생각뿐이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기차가 들어와 사람을 깔아뭉갤 상황이 되자 성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몸을 던졌다.
총알처럼 달려나간 성진은 선로로 뛰어들어 레일 위에 나자빠져 있는 남자를 흔들었다.
“이봐요! 당장 일어나요!”
다급한 성진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남자는 성진을 돌아보더니 멍한 눈빛으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이런 제기랄!”
술에 단단히 취한 모양이라고 생각한 성진은 설득을 포기했다. 대신 온 힘을 다해 남자를 일으켰다.
“이봐요! 제발 좀.”
억지로 힘을 줘서 어떻게든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는 그저 힘없이 성진의 손길에 이끌려 엉거주춤 끌려 세워졌다. 그때. 기차의 딩딩 거리는 경고음이 굉음이 돼서 귓전을 흔들고, 기관차의 모습이 지척에 나타났다.
“헉!”
쿵쾅거리는 기차의 진동이 땅을 타고, 레일에 딛는 발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성진은 눈앞으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기관차의 육중함에 고스란히 압도당했다.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성진은 숨조차 죽인 채 기차를 바라봤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순간 기관차가 눈앞으로 크게 다가왔다.
성진은 죽음의 공포에 전율한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
아무런 고통이 없자 이상함에 눈을 떴다.
“하!”
기차는 성진의 코앞에 얌전히 멈춰 있었다.
“으허어어.”
긴장이 풀린 성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긴장으로 멈췄던 숨을 거세게 몰아쉬면서 성진은 쓰러질 듯 누워버렸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놀란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는데 성진의 머리 위로 사람 얼굴이 보였다.
“많이 놀랐나요?”
그는 다름이 아니라 성진이 위험에 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 멋대로 선로에 나자빠진 남자였다.
성진은 갑자기 약이 올라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니 아저씨! 대체 백주대낮에 술 좀 적당히 마셔요. 아저씨 때문에 이게 다 뭡니까.”
거세게 화를 내는데도 남자는 멍하니 공허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이 없었다.
“아저씨?”
술이 덜 깼나 싶어 쳐다보는데 찬찬히 바라보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의 전체적인 느낌은 뭔가 아저씨같이 나이 들어 보이는데 묘하게 피부가 너무 좋다.
주름이 군데군데 있기는 한데, 부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러운 주름이 아니라 정말 묘하게도 인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의 눈동자가 빙글 움직이며 성진을 바라봤다.
“아. 상황을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어요. 제가 실례를 했군요. 지구 인류의 교통체계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나 봐요.”
“예?”
엉뚱한 말에 황당해하는 성진을 두고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눈동자는 성진을 바라봤지만 입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표정이 없는 얼굴.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는 표정.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 성진이 주변을 돌아봤다.
“이게 대체 뭐지?”
승강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진 쪽을 바라보며 아우성을 치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너무 놀라 그런 걸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계기는 하늘 저편에 날아가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참새 두 마리였다.
구름 한 점 미동 없이 멈춰있는 세상. 성진은 이 기이함에 질려서 다시 남자를 바라봤다.
“아저씨. 뭐하는 분이세요?”
남자는 빙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눈도 뒤늦게 따라 웃는데 왠지 어색했다.
“글쎄요. 당신 입장에서 저는 외계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허.”
성진은 이마를 짚었다. 취객마냥 휘청대다 선로에 떨어진 아저씨가 이제는 외계인이라니.
어이없는 성진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저씨는 웃는 체로 태연히 말했다.
“저는 사실 당신이 저를 구하려는 걸 보고 무척 감동했어요. 타인을 향한 선의. 이건 우주적으로 아주 중요한 가치관이거든요.”
자칭 외계인이라는 아저씨가 자신에게 감동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성진은 도저히 마음 놓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럴 수 없다.
세상이 온통 멈춰있는데 움직일 수 있는 건 눈앞의 남자와 오직 자신뿐이었다. 인정하기 힘들지만 이 겁나는 상황에서 태연자약한 저 아저씨가 외계인이 아닐 리가 없다.
“외, 외계인이라구요?”
금성인 바이러스에 외계인처럼 별난 사람들이 나오는 걸 본 적은 있지만 그런 상황은 비유적인 거다.
지금 눈앞에 아저씨인지, 청년인지조차 헷갈리는 이상한 남자는 그저 눈알을 굴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래요. 지금은 많이 놀란 모양이네요. 두려움과 불안이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요. 난 절대 악의를 지니지 않았어요. 오히려 당신의 선의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보답이요?”
“그래요. 당신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될, 어쩌면 나, 우리에게도…….”
“그 보답이라는 게 뭐죠?”
순간 호기심이 든 성진은 궁금함이 일었다. 눈앞에서 시간을 멈추는 외계인이 자신에게 해주겠다는 보답이 무엇일지 기대감이 드는 게 당연했다.
“이거에요.”
성진이 손을 내밀자 자칭 외계인 아저씨가 팔목에 무언가를 덥석 씌웠다.
“어?”
작은 큐빅이 여러 개 박혀 있는 큼지막한 은색 금속 팔찌다. 굵기는 얇았지만 면적이 넓어서 팔목 1/3을 덮을 정도다.
“아저씨. 이거 뭐하는…….”
성진이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아저씨를 돌아보는데 다짜고짜 자칭 외계인 아저씨가 성진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선로가 아니라 승강장 위로 성진과 아저씨는 순간 이동했다.
또 한 번 어안이 벙벙해진 성진을 두고 몇 걸음 떨어진 아저씨는 마치 작별하듯 양손바닥을 흔들었다.
“미안해요. 구체적인 설명은 바빠서 힘들지만 스스로 기능 설명을 해줄 거예요. 안녕.”
“어? 아저씨?”
아저씨의 몸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성진이 놀라 소리쳤다.
“아저씨!”
눈 한번 깜빡할 찰나. 양손을 흔들던 아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황당해서 바라보는데 바로 그때,
세상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참새가 허공으로 날아가고 구름이 다시 흘렀다.
그리고 선로로 들어오는 기차가 굉음을 울리며 승강장으로 다가왔다.
- 딩 딩 딩
- 지금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기차에 탑승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음성이 울리고, 기차가 승강장으로 다가오면서 고함과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아이고 이거 어떻게 하나!”
“사람이 깔렸네. 깔렸어.”
난리법석을 떠는 것도 잠시, 문득 옆에서 멀쩡히 서 있는 성진을 보고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전까지 선로에서 기차에 치이기 직전이던 사람이 어느새 옆에 서 있다니!
“아니 이봐요, 군인…….”
놀란 아저씨가 뭐라 묻는데 난처해진 성진은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 취한 아저씨는 외계인이었고 이상한 팔찌를 선물로 줬다고 말할까?
묵묵부답인 성진을 두고 다른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특히 성진과 남자를 목격했던 기관사는 급 브레이크를 밟고 기차를 멈춰 세웠고 다시 긴급 후진까지 했다.
물론 그럼에도 선로 위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해프닝 끝에 출발이 30분이나 지연되고 모든 사람들의 눈총이 성진을 향했지만 성진은 그저 딴청만 피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