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36.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데스퍼라도(Desperado)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그 날 저녁 리크는 실로 오랜만에 세아린과 단둘이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사계(四界)에 도착하자마자 한동안 헤어져야만 했던 리크와 세아린은 한동안 별말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분명 지금의 만남은 그다지 자연스럽지만은 못했다. 이 둘이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에게 많은 일들이 벌어졌으니 이제는 옛 감정을 살려서 대화를 시도해야만 했다. 워낙 괄괄했던 세아린이었지만 오늘의 재회만큼은 그녀 자신도 무척이나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리크가 군대에 입대하던 날, 어둠의 전사 가스톤 스승을 따라 나섰던 일들, 라우타르의 지팡이 기연을 얻던 일, 기아몬 신전에서 리크와의 만남, 리크와 자신과의 사이에 케시어스라는 여인이 개입하던 일, 특히 하몬이 아버지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간 정부군의 프리즘 전사로 지내왔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리크 역시 세아린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어왔다. 지금은 이 사계에서의 반란군의 지도자로서 하몬의 정부군을 제압한 이 순간이지만 그에게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옛 연인을 다시 만난 일이었고 아직 도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록 세아린이 하몬의 딸이자 적으로서 자신 앞에 나타났지만 그런 것들은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 앞에 그토록 보고싶었던 세아린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세아린 뭐라고 얘기 좀 해봐. 후후. 그 발랄했던 네 성격이 변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보다도 리크 네가 많이 변한 것 같아."
"내가?"
"응..전에 알았던 리크 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
"세월이 적지 않게 흘렀으니..그나저나 지난번 기아몬 신전에서 만나고 이게 몇 년 만이지?"
"약 3 년 정도.."
"흠. 제법 세월도 흘렀지만 우리 서로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아."
"일어난 것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지. 난 내가 라우타르의 전인자이자 프리즘의 전사라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데 더욱 놀란 것은 리크 네가 창성인이라는 사실이야."
"나 역시 그 점에 대해서 실감이 나지 않아. 아무튼 휴론계에서 네가 패샷보이라는 남자 행세를 할 때부터 우린 인연(因緣)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야. 네가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났던 일들 너와 함께 2계라는 곳에서 지냈던 일들 그리고 이곳 사계에 같이 온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일들 말이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비록 너와 한동안 헤어져있었지만 난 잠시라도 널 잊어본 적이 없어."
"하하. 나도 그랬다면 믿겠니?"
"거짓말.."
"진짜야..사실 네가 하몬의 딸이라는 사실에 무척 놀란 건 사실이지만 이제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아."
"리크 아버지를 용서해주어서 정말 고마워.."
"고맙긴..자신의 능력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아니. 오히려 잘되었어. 아버지는 그저 평범하게 사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그래도 한때 모든 사계 종족으로부터 대 영웅의 추앙을 받던 분이신데.."
그때 세아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케시어스가 너를 천상인들로부터 보호하여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니? 내가 알기로는 케시어스가 네 가슴에 단도를 박았다고 그랬는데.."
"후후. 나를 살리기 위해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살리기 위해 죽이려고 했다니..솔직히 난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는데.."
리크는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창성인의 각성을 못한 자신에게 멸성인들이 보낸 암살자가 케시어스라는 사실..그런 케시어스가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암살을 하고 더 이상의 추적 암살단을 속였던 일들. 저 타레탄 마을에서 온 젊은 파슬렌이 부상당한 리크를 마차에 태우고 급히 빠져나갔을 때 케시어스가 직접 보호를 해주었던 일들. 잠시후 세아린은 리크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나서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나..난 케시어스에게 화만 냈으니.."
"세아린 네가 성질 못된 건 진작에 알았지만 그토록 흥분할 줄은 몰랐어. 하하."
"내 성질이 못되었다니. 단지 덜렁 될 뿐이지. 그리고 리크. 어쩜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하하하. 결국 그 성질 언제 나오나 했더니 역시나 나오는군."
"정말 살살 건드릴 거야? 쳇."
한편 다른 방에는 케시어스와 파슬렌 남매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파슬렌의 여동생 소피아나는 다소 무거운 표정의 케시어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정말 세도스 아저씨 너무해요. 진짜 생명을 구해준 케시어스님은 딴전이고 오히려 잘 알지도 모르는 세아린이라는 여자와 벌써 3시간째 얘기만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때 오빠 피슬렌이 소피아나를 점잖게 타일렀다.
"소피아나. 그건 네가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야. 세도스 아저씨는..아..아니 이젠 리크 아저씨라고 불러야겠지. 아무튼 리크 아저씨의 진짜 연인은 바로 그 세아린이라는 여자분이란 말이야."
"오빠! 케시어스님이 앞에 계신데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 순간 케시어스가 다소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전 괜찮아요. 사실 파슬렌 말이 맞는걸요. 그 둘은 원래 다정한 연인관계였어요. 제가 그들 사이에 끼어 든 모양이 되었지만."
소피아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케시어스님이 리크 아저씨의 목숨을 구했잖아요! 그렇다면 리크 아저씨는 케시어스님에게 돌아와야 한단 말이에요."
"후후. 제게 그토록 신경을 써주어서 너무 고맙군요. 하지만 소피아나는 너무 어려서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남녀관계란 말처럼 쉽게 설명되어질 수 없는 거랍니다."
"제가 어리다니요. 전 이제 15살인데요."
[쿵]
"아얏. 오빠!"
"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아무튼 더 이상 시끄럽게 굴지마!"
"시끄럽다니! 난 적어도 그 마녀 같은 세아린 여자보다는 여기 천사 같은 케시어스님이 더 좋단 말이야!"
"바보야! 누굴 좋아하든 말든 그건 네가 상관 할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조용히 해!"
"오빠야말로 내 입 가지고 내가 뭐라 하는데 뭔 상관이야!"
"어쭈 요게. 혼 날라고 끝까지 개기네.."
그때. 방문을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똑똑]
"저. 세아린인데..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그 순간 방안에는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잠시후 소피아나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한마디했다.
"쳇.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케시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방문을 열어주었다.
"세아린님..들어오세요."
"케시어스님.."
세아린은 방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거북한 듯 말했다.
"저..케시어스님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은데요."
그때 파슬렌이 소피아나의 팔을 붙들고는 강제로 방에서 나와버렸다.
"오빠! 이거 놔! 아프단 말이야! 그리고 난 리크 아저씨와 케시어스님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탁!]
"아얏. 왜 때려! 내가 동네북이야.."
결국 파슬렌 남매는 방밖으로 나가버렸고 이제 방안에는 케시어스와 세아린 단 둘만이 남았다. 케시어스는 조금 전 소피아나가 하고 나간 말에 혹시라도 세아린이 기분 나빠 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저..조금 전 소피아나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봐도 저보다는 케시어스님이 리크와 더 잘 맞는 것 같은데요."
"아..아니. 전 그런 게 아니라.."
"그렇다고 저도 마음놓고 있지는 않을 거에요. 이젠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선의 경쟁을 해야겠죠."
"선의의 경쟁이라니요?"
"제가 생각해도 좀 우스운 제안인 것 같은데..어쨌든 우리 둘 다 리크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설마 그걸 부인하는 건 아니겠죠. 더구나 난 케시어스님이 현자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위해 리크를 양보하거나 희생한다는 식으로 갑자기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아요."
"......."
케시어스는 별말 없이 차를 마시고있었고 세아린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살피기라도 한 듯 똑바로 쳐다보았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는 성격인가요?"
"상대에 따라서.."
"결국 저처럼 말많은 상대에게는 언제나 침묵으로 항변하나보죠?"
"후.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세아린님의 선의의 경쟁이니 하는 이런 식의 대화가 어색해서 그럽니다."
"제가 또 너무 성급했나보군요. 제 성질이 워낙 직접적이다 보니까..전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는 성격이거든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게 털어놓으시니까 더 편한 것 같아요. 적어도 세아린님은 겉으로 말해놓고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실 분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그건 잘 보셨어요. 전 꿍한 성격이 제일 싫거든요. 이거면 이거 저거면 저것이지. 어중간하게 말을 빙빙 돌려서 표현을 잘 못해요."
"그럼 저도 용기를 내서 제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은데요."
"네 말씀해보세요."
"리크를 사이에다 두고 선의 경쟁이니 하는 그런 분위기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차피 리크는 세아린 당신과의 인연인지 제가 끼어 들어 갈 자리가 없다고 봅니다. 그것보다도 전 세아린님이 저를 친구로 인정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친구.."
"예. 제가 이 자리에서 원하는 것은 바로 세아린님 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