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17. 프리즘
데스퍼라도(Desperado)
프리즘
타레탄 마을 사람들은 세도스의 신비한 전투기술에 힘입어 극적으로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각각 산 속에 숨어있었던 마을 사람들이 세도스의 주위로 모여들어 저마다 감사의 표시를 취했지만 주변에 널려있는 천살전사들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는 한편 몸서리를 쳤다. 어쨌든 세도스의 손속이 너무 잔인하다지만 분명 그는 타레탄 마을 사람들을 위한 전투를 벌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 와중에 그 옛날 3군단 시절 17막사 출신이었던 현 천살전사 소속의 루베니우스와의 만남으로 세도스의 과거 행적을 가늠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수확이었다. 그날 밤 숲 속 공터에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며 그 주위에는 세도스와 파슬렌, 소피아나가 르베니우스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르베니우스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리크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실을 알고는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사실 리크 가벤더라는 이름은 하몬이 나타나기 이전만 하더라도 사계(四界)의 모든 주민들에게 꽤나 친숙한 이름이었다. 그 유명한 카밀로스탄의 하몬디아 제국과 마족간의 대전쟁에서 위기에 빠진 하몬디아 외곽성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갈비아스 파동검술로 마족 부활 살육전사들을 제거함으로서 리크의 위명은 하몬의 후계자로서 전 모든 대륙에 빛이자 구세주로 알려졌었다. 하물며 케록시아 대륙 남단의 조그만 나라인 레아 제국 산골 동네인 타레탄 마을 사람들 역시 리크 가벤더라는 이름을 한 두번 정도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덤벙대는 성격의 소피아나가 아까부터 신기하고 놀란 눈초리로 세도스를 살펴보았다.
"후. 세도스 아저씨가 옛날 하몬의 후계자로 불리던 리크 가벤더였다니..후. 정말 믿어 지 지 않는군요. 정말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을 줄이야.."
세도스는 르베니우스가 자신의 과거 관한 내용을 말하는 대에도 별 관심이 없는 듯 아까부터 모닥불의 장작만 들썩거릴 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한편 파슬렌과 소피아나는 르베니우스가 말하는 과거 리크라는 인물과 현재 세도스라는 인물을 연상시키려고 제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공통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으니 그 점 또한 미스테리였다.
"아무리 기억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의 성격이 단번에 180도 바뀔 수 있지요?"
소피아나가 말하자 파슬렌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흠. 하긴 리크 가벤더라는 인물은 나도 옛날에 소문으로 몇 번들어서 알지만 무척 온순하고 수줍음마저 잘 타는 성격의 소유자라 그랬는데. 바로 그 유명한 하몬의 후계자인 리크 가벤더님이 현재의 세도스 아저씨라니. 후. 뭔가 앞뒤가 전혀 연결이 안되고 있잖아."
르베니우스는 자신의 옛날 상관인 리크를 살펴보더니 한마디했다.
"분명 리크님이 맞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분 같군요. 도대체 아무리 기억을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가요. 지금의 리크님 표정은 너무 싸늘하다 못해 심장이 얼어버릴 것 같으니.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세도스의 눈을 잠깐 바라보았던 르베니우스는 온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세도스는 주위에서 뭐라 하던 지 그저 침묵만을 지키며 장작만을 태울 뿐이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장작이 거의 타서야 세도스가 르베니우스에게 한마디했다.
"이보게."
"네. 리크님..아니..세..세도스님.."
"자넨 레아 제국 남부지방 소속 천살 전사라 했지?"
"예."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아까 죽은 게아트 대장이 아크 수호전사라 그랬나. 그 정도 계열이면 어느 정도 전투 실력이 있는 건가?"
"후후. 그 옛날 세도스님도 아크 수호전사였던 적이 있었는데. 아무튼 기억을 못하시니 제가 다시 정리를 해드릴게요. 또한 현재 군 개편도 새로운 지도자인 하몬에 의해서 완전히 바뀌었으니까요?"
리크가 아무르 위성의 비밀을 풀려고 케시어스와 집을 나선 지 어언 2년 가까이 되니 분명 그 기간 중에 이 사계(四界)에는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2 년 전 로엔스톤 대륙에 [하늘이 열리는 곳]이란 전설이 시작되면서 천상인(天上人)들의 도래설이 사계 전역에 번졌고 그때까지 반목을 일삼고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인간종족과 마족, 어둠의 종족들간에는 새로운 협력관계가 구축이 되었다. 어쨌든 기아몬 신전에서 하몬이 출현하자 그때까지 하몬의 후계자라 떠받들던 리크와 하몬의 운명이 갈리면서 일대 대변혁이 일어났다. 물론 리크는 케시어스와 함께 자취를 감추자 자연스럽게 하몬이라는 2000 년 전 대영웅이 자연스럽게 리크의 자리를 대신했음은 당연했다. 더구나 기아몬 신전에서 아무르 위성의 백색의 빛을 받은 일명 프리즘의 전사들이야말로 앞으로 도래할 천상인(天上人)들과 맞설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 전 사계(四界) 주민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프리즘의 빛을 받은 전사들은 인간종족의 하몬과 어둠의 종족 헬 전사들인 리아몬과 포니, 세아린과 케이사르 마족 고대 전사인 골고트 전사로서 총 6명이었다. 실질적으로 6명의 프리즘 전사들이 이 사계의 3대 종족 최고 상층 집권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들 6 명의 프리즘 전사들 사이에서도 누군가 이끌어갈 집권자가 필요했으므로 서로간의 전투능력의 우열로서 단 한사람만을 뽑기로 하였다. 그 당시 서로의 대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세하게 알려진 바 없지만 하몬의 검을 사용한 하몬이 상상도 못할 전투기술을 선보이며 다른 프리즘의 전사들을 압도했다. 결국 사계의 3개 종족의 전 통치권 자리에 하몬이 오르면서 그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시기에 맞물려 로엔스톤 대륙의 [하늘이 열리는 곳]의 전설이 시작되는 성역이 없어짐으로서 드디어 천상인(天上人)들의 도래가 본격적으로 예견되었으므로 사계 프리즘 전사들로 이루어진 집권부는 극도의 긴장 속에 경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천상인들이 주민을 대상으로 숙주 형태의 공격을 취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더구나 이미 사계 주민들과 귀족들 중에는 오래 전부터 천상제단을 차려서 천상인들의 도래를 기다렸던 숭배자들 역시 상당수에 이르자 사계의 모든 대륙은 일대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과연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와중에 사계 통치자인 하몬은 극명한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으니 그것이 바로 천살전사(天殺戰士)의 창단이었다. 천살전사라 함은 오로지 천상인(天上人)들만을 척살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특공전사의 형식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새로운 천살전사 군대는 그후 사계 전체 군대 개념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주로 대도시같이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는 상급전사들로 이루어진 천살전사들이 투입되었고 주로 소도시나 마을은 지방 소속의 천살전사들이 투입되었다. 즉 천살전사 자체의 서열도 상,중,하로 나누어서 각자 전투능력에 맞는 임무를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로지 천상인(天上人)들만 찾아내어 척살하는 천살전사들의 임무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젠 주 피해자인 지방이나 시골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하나의 천상인 숙주를 제거하기 위해 죄 없는 마을 사람들 수백명이 살육 당했으니 결국 천상인보다 천살전사들이 더욱 잔학한 대상으로 주민들 가슴에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천살전사들의 임무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으로 변질되었고 심지어 살육의 피 맛에 물들은 그들의 행태는 이젠 살인하는 것 자체가 당연시하기까지 했으니 대륙 곳곳의 지방 마을 사람들의 피 맺힌 절규가 끊일 날이 없을 정도였다. 천살전사들은 그것도 모자라 각 지역마다 자신들의 자치 행정부를 형성하고는 집권부의 명령 없이 자체적으로 살육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굳이 천상인이 출현이 없다하여도 가끔 사냥 형식으로 어느 마을을 지정하여 죄 없는 주민들을 살육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었다. 바로 그것이 천상인들이 원했던 의도였는지도 몰랐다. 허나 집권부 최고 통치자인 하몬은 현재 천살전사들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강조할 뿐 이렇다 할 방법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천살전사들만이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뒷받침 해 주니 그로서도 굳이 현재의 군 체제를 바꿀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그도 극소수의 천상인을 척살 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책과 명분 그리고 실리에 그 중점을 더 두었고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사람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 보았다.
"진짜 문제는 대도시의 사람들이 지방에 이처럼 참혹한 살육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거죠."
세도스는 르베니우스가 현재의 군 체제 모순과 하몬의 무지막지한 정책을 비판하며 열을 올리며 하는 얘기를 무심코 듣고 있다 갑자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르베니우스..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언제쯤 다시 천살전사들이 이곳으로 추적해 들어오는 것이네."
"후. 세도스님이 아까 낮에 몰살시킨 자들이 레아 제국의 남부 지방소속 하급계열의 천살전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부지방 주력부대인 천살전사들이 여기로부터 약 3일거리에 있으니 아무래도 소식이 끊어진 부대원들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대거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오늘 온 병력보다 약 10배정도 많은 4000명 정도입니다."
그때 파슬렌과 소피아나가 외쳤다.
"4000명이나.."
"만일 그들이 진짜 이곳에 오기라도 한다면 우린.."
"한마디로 끝이지."
세도스 역시 4000명이란 르베니우스의 말에 다소 어두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3일거리에 있는 것이 확실한가?"
"남부 지방 천살전사들의 본부가 프리다 지방에 있고 라픈 산맥과 아스렌 평지를 거쳐온다면 3일정도 걸립니다. 그러나 오늘 자신들의 지분 부대가 전멸 당했다는 소식을 알려지려면 그나마 시간이 걸릴 테니 아마 8일에서 10일정도 안에는 그들이 오지 않는 다고 봐야겠죠. 그 안에 마을 사람들과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아마 추적범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파슬렌이 말했다.
"후. 아저씨 말대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근 500여명이 넘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숨을 곳이나 있긴 해요?"
"하하. 시골에 사니 촌놈일 수밖에 없군. 이곳 케록시아 대륙만 해도 아직 사람들이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들이 더욱 많단다. 그 정도로 넓다는 얘기야. 나도 들은 얘기지만 사실 하몬의 무지막지한 정책과 폭정, 천살전사들의 만행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의 보금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그러더군."
"진짜에요?"
"아무렴 내가 이 마당에서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니. 어쨌든 이 대륙의 서 남쪽에는 따뜻한 대륙풍과 해양성기류가 만나서 이루어진 엄청난 숲지대가 있다는 군. 그곳은 너무 우거졌기에 한번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려 다시는 못나온다는 말도 있어. 실제로 1년 전 북부 중급 계열의 천살전사들이 주민들을 쫓아서 그 숲에 들어갔다가 지금도 못나오고 있잖니."
"길을 잃어서요?"
"후후. 그야 모르지. 그 숲 속에 들어간 주민들만 해도 그 숫자가 적지 않을 텐데 그들에게 잡혔나보지."
"후. 그런 곳이 다 있나요?"
"그곳은 카젠모르 숲이라 불리는 곳이야. 방대한 숲 지대가 천연의 요새 역할을 한단 말이지. 한번은 북부 천살전사 중 어느 대장이 그 숲을 태우려고 불을 놓은 적이 있었지만 숲을 이루고 있던 나무와 잎새들이 통통할 정도로 수분 량이 엄청나서 화공으로도 끄떡없는 곳이기도 하지. 여하튼 그곳으로 도망친 사람들만 하더라도 웬만한 제국은 건설하고도 남을 인원이지."
그때 소피아나가 외쳤다.
"우리도 그곳으로 가요!!"
"맞아요. 어차피 천살전사들의 추적을 영원히 피하려면 그 카젠모르라는 숲밖에 없는 것 같아요."
소피아나와 파슬렌의 말에 르베니우스의 반응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흠. 물론 그곳으로 간다면 좋긴 좋지만..문제가.."
"좋으면 좋은 거지 뭐가 문제라 말이에요?"
"거리가 너무 멀어서..물론 소수의 사람들이 밤마다 능선과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서 간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5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단 이동을 한다면 금방 천살전사들에게 발각되겠지."
"도대체 얼마나 먼 곳이기에?"
"흠. 여기 레아 제국의 남부 지방이니까? 서남쪽에 위치한 카젠모르 숲까지는 요고르 제국하폰소 제국 두 개를 거쳐야 하고 중간 중간에 마족들의 영역과 어둠의 종족들 마저 출현할 수 있는 지역 또한 거쳐서 가야하지. 그러니까 어림잡아 2개월 정도 그것도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는 가정하게 말이야."
"후. 2개월이라. 정말 멀군요."
"멀다는 개념도 있지만. 사계 주민들의 시선을 피해간다는 것이 더 어렵다네 이미 타레탄 마을 사람들은 이 대륙의 전 천살전사들의 리스트에 올라있고 다른 주민들 마저 상금에 눈이 어두워 신고할 수 있으니."
"후.."
"휴.."
파슬렌과 소피아나는 절망적이었는지 커다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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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라스루텐 제국의 어느 외각 대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길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석 포장도로에는 약 20여대의 화려한 마차가 줄을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만 하더라도 근 100여명에 달했고 20대의 마차 중 가장 화려하게 장신 된 마차 주변에는 범상치 않은 차림의 전사들이 약 20 명 정도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그 중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눈빛을 번뜩거리며 사방을 둘러보며 가니 그 마차 안에는 상당히 높은 신분의 사람이 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한편 마차 행렬 도로 맞은 편 거대한 신전 지붕 위에는 정체 불명의 두 남자가 잔뜩 긴장한 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 행렬이 신전 쪽으로 다가오자 비장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헤르만! 드디어 때가 된 것 같군요."
"라울! 우리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닐 거요."
"민중의 살육자 하몬을 죽인다는 자체가 오히려 영광이겠죠."
"어쨌든. 지난 1년간 그대와 내가 오로지 이 날을 위해 수도 없이 연습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나저나 분명 저기 3번째 가장 화려한 마차가 분명 하몬이 타고 있겠죠."
"더구나 저 마차 주변에는 상급전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호위를 하니 틀림없겠죠."
"자. 마차가 바로 코앞까지 왔습니다. 그럼.."
그 두 남자는 서로 손을 꽉 잡고는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신전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준비됐소?"
"예!"
"그럼.."
[쉭]
두 남자는 신전 지붕에서 동시에 몸을 날렸다. 햇빛에 빛을 번쩍이는 두 개의 검에서 강렬한 붉은 빛이 폭사되었다.
[파파팍]
[콰쾅쾅]
순식간에 마차가 부셔지면서 그 안에 타고 있던 화려한 의상의 남자마저 마법광선에 의해 불이 붙었고 괴성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호위병사들은 그제 서야 그 암살자들을 포위했다. 상급호위전사들이 재빨리 그 두 남자에게 검을 들이대자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했는지 검을 땅바닥에 던지고는 순순히 항복을 했다.
"헤르만.."
"라울..우리가 성공한 게 맞소?"
"분명 새까맣게 타서 죽은 자가 하몬이 맞겠지요. 허허."
"자. 소원을 이루었으니 이젠 운명을 달게 받읍시다."
그 둘은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더니 두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때였다. 맨 뒤에 마차에서 그저 평범한 횐 의복을 입은 중년의 사나이가 뒤짐을 진 체 이쪽으로 어슬렁 걸어오더니 외쳤다.
"그들을 죽이지 말아라!"
횐 의복의 사내가 가까이 오자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허리를 숙여 말했다.
"하몬님 괜찮으십니까?
"응. 나야 뒤 마차에 있었으니 당연히 괜찮지. 후후."
순간 땅바닥에 주저앉은 두 남자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바로 앞의 하몬을 바라보았다. 하몬 역시 그들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후후. 어째서 그리 실망스런 표정들을 짓고 있나?"
"네..네놈이 하몬.."
"내가 하몬이다."
많은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저마다 웅성거렸다. 대 낮에 감히 그 누가 하몬을 암살하려 했단 말인가? 더구나 하몬은 가장 삼엄한 경비를 받는 마차 대신에 저 뒤에 보잘 것 없는 마차에서 내리니 분명 그는 이런 암살에 대비해 일부러 위장 마차와 자신과 닮은 사람으로 대체한 듯 하였다. 결국 하몬을 암살하려던 그 두 남자는 지신들이 실패했음을 알아차리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하몬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마디했다.
"이 둘을 놔주어라!"
하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으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었고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후. 하몬님이 또 암살자들을 용서하는데..""
"도대체 자신을 암살하려던 놈들을 풀어주다니.."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지방과는 달리 프리즘 집권부가 위치한 이곳 아미라스루텐 제국의 대도시에서의 하몬은 요즘 자신에게 등을 돌린 민심을 바로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일환으로서 자신을 암살하려던 자들을 관용을 베풀어 용서해주는 것이었다. 하몬은 그 두 암살자들을 즉시에서 풀어주고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군중을 향해 간단한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요즘 이 사계에는 저에 대한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천살전사들의 만행이 도를 지나친다는 그런 소문 말이죠. 하하하. 과연 여러분은 그와 같은 말을 진정 믿으십니까? 저는 그런 유언비어 소문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고 피를 토하고 이 자리에서 죽고도 싶은 심정입니다. 어떻게 주민을 보호하려고 결성된 군대가 주민을 살육합니까? 그런 일들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 입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를 잘 보십시오. 만일 그러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사계의 통치자로서 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몬이 갑자기 옆에 서있던 마차를 주먹으로 쳤다.
[쾅!!]
그는 자신의 흥분을 못이긴 것처럼 눈가에 눈물마저 흘렀다.
"제 눈을 잘 보십시오. 자 들여다보세요. 제가 이렇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한 우리 군대 아니 여러분의 군대인 천살전사들이 주민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 들 중에는 나를 암살하고 싶은 사람이 더러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난 이 자리에서 공표 합니다. 그 누구든 다 용서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소문만을 듣고 나를 원망하는 자들!! 난 그들 마저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조금전 날 죽이려 했던 사람들 역시 지금은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바로 내 눈앞에서 말이죠."
하몬의 연설은 약 30분간 더 지속되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만 하더라도 수천 명에 이르렀고 개중에는 감복을 받고 눈물을 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몬은 그야말로 진정한 달변가였다. 그의 표정 하나 하나에 사람들의 숨소리가 멈추었고 그의 맑은 목소리와 힘있는 어투 역시 사람들의 가슴을 휘어잡았다. 지방과는 달리 대도시에서의 하몬을 바라보는 시각은 편이하게 달랐다. 천살전사들의 만행과 살육은 결국 지방 시골의 소도시에 국한 된 것이고 대도시 사람들은 그저 소문만을 들었을 뿐 그런가 보다 하는 반응이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단순했다. 더 나아가서 표현하자면 무심하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자신과 직접 연관되지 않는 일이라면 쉽게 잊어버리고 잊혀지기를 원한다. 그것이 인륜을 저버린 살육이든 아니든 저 먼 지방의 소문일 뿐이다. 가끔 진상조사를 원하고 확실한 규명을 바라지만 실상 관심은 자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나와 관계없는 일들은 그저 지나가게 마련이고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은 평상시의 생활로 돌아간다.
결국 제국을 움직이는 것은 90% 이상의 인구밀집지역인 주요 대도시이고 하몬은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 자신의 정책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대도시를 돌아다니며 열변을 토하고 호소를 하는 차원은 바로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려는 속셈에 있었다. 어쨌든 그날 저녁 궁으로 돌라온 하몬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바로 그의 오른팔인 파칸이었다. 파칸은 페몬 수호전사출신으로서 그의 전투실력은 같은 폐몬 계열 중에서도 최고였다. 강직하다 못해 다소 거칠 은 감이 있는 파칸은 하몬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자였다.
"이보게 파칸!"
"네 하몬님.."
"처리했나?"
"예. 그런데 이번 놈들은 레쏘비나 중급계열의 수호전사 출신이라서 조금은 애를 먹었습니다."
"후후. 감히 나를 암살하려 하다니. 물론 그 놈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아무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깨끗이 처리했겠지?"
"예 아까 낮에 하몬님이 그들을 풀어주었을 때 미행을 시켰고 나중에 제가 직접 가서..."
"그만 이제 잘 알아들었네."
하몬은 오랜 여정으로 인한 피로가 갑자기 느껴졌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것 도 못할 짓이군. 도대체 한달 동안 7개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30 여 차례 연설을 했으니. 젠장. 이 통치권의 자리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니군. 도대체 지장자치 위임권을 준 각 소속 천살전사 놈들이 어떻게 행동을 하였기에 모든 화살이 내게 돌아온단 말인가?"
하몬은 등뒤의 검을 풀고는 파칸에게 주었다. 파칸은 정중하게 검을 받아들고는 미리 준비해온 붉은 비단으로 둘둘 말아서 다시 하몬에게 건네주었다.
"이보게 파칸. 오늘 나와 간단하게 술 한잔하는 것이 어떤가?"
"피곤하실텐데.."
"허허. 피곤이 풀어지라고 먹는 술이건만..그나저나 내일이 프리즘의 회의가 열리는 것이 맞는가?"
"예."
"흠. 피곤한 놈들이 몰려오겠군. 후. 아무르 위성은 내게만 백색의 빛을 줄 것이지 어째서 다른 놈들에게까지..젠장 아무튼 프리즘의 전사들이 온다니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되겠군. 이보게 파칸. 술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난 잠시 내 딸을 보러 가겠네. 그러니 자네도 이젠 들어가서 쉬게나."
"예. 그럼.."
하몬이 거실 맞은편 대리석 계단 쪽으로 향했다. 잠시후 이 층 복도 끝에 도착한 하몬이 문 앞에서 외쳤다.
"세아린.."
"........."
"세아린! 애비가 잠깐 들어가겠다."
잠시후 조심스럽게 문을 연 하몬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세아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테라스에 나가서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몬은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후. 해도 너무 하는 구나 한 달여 만에 돌아온 이 애비를 마중 나올 생각도 안 하다니.."
그제 서야 세아린이 깜짝 놀라서 뒤를 쳐다보았다.
"아..아버지..언제 오셨어요?"
"후후.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다 놓고 있기에..물론 또 리크 생각이겠지만.."
"......."
세아린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하몬이 한숨을 푹 쉬었다.
"휴! 아직도 내게서 화가 풀리지 않았던가. 설마 프리즘의 전사들 중의 한 명이 내 딸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 정말 놀라워 그 옛날 내가 휴론계에서 잠시 정분을 나눈 여인이 있었지만..설마 이렇게 큰딸이 사계(四界)오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냐?"
"쳇. 정말 모르셨어요? 결국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나중에 이곳 사계에서 어머니를 다시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후후. 더 놀란 것은 당신이 제 아버지였다는 사실이었죠. 그나저나 어머니는 그때 잠깐 나타나시고 지금은 어디 계신 거죠?"
"하위차원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 중 어떤 영혼들은 영계(靈界)라는 곳으로 올라간단다. 내 추측이 맞다면 아마 네 어머니는 그곳에서 영성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야."
"도대체 영성인은 뭐고 살성인, 멸성인, 창성인은 뭐죠? 혹시 아버지가 다 꾸며낸 얘기들 아네요?"
"허허. 이놈아 세상에 딸한테 실없는 소리하는 아버지 보았냐?"
"그렇다면 리크가 창성인이라는 사실이 맞긴 맞는 거에요?"
"틀림없단다."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거죠?"
"후. 그러게 말이다. 나 역시 그를 위해 지금의 통치자로서 직분을 다하고 있단다. 현재의 모든 사계의 권력과 통치기반, 천살전사, 군대의 확립은 바로 앞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리크를 위한 기반이야. 결국 그가 사계를 맞아 주어야 천상인들과 혹 앞으로 출현할지 모르는 영성인들과 겨우 대적할 수 있단다."
"아버지. 한가지 물어볼게 있어요. 지금 전 대륙의 지방에서는 천살전사들에 의해 참혹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허허. 이거 원 딸마저 이 애비를 믿지 못하니 난 누굴 믿고 살아가야 한단 말이냐? 넌 내가 자기 백성을 해치면서까지 이 사계를 통치한다고 보는 게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워낙 소문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기에.."
"물론 천살전사들 중에는 너무 임무에 충실하다보니 무고한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단다. 그것만큼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후. 그게 아니라 한마을에서 천상인 숙주가 한사람이라도 발견되면 마을인들 전체가 학살 당한다는 소문 말이에요!!"
하몬은 세아린의 말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갑자기 큰소리를 내서 웃었다.
"하하하하하."
"쳇. 왜 웃어요?"
"설마 그런 황당한 소문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 하하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젠 잘 준비나 하거라. 그리고 내일 프리즘의 전사 회의가 열리니 물론 너도 참석해야 할 것이다. 알겠냐?"
잠시후 하몬이 문을 닫고 나가자 세아린은 다시 테라스 쪽으로 나가서 밤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후. 리크. 도대체 창성인으로 변한 리크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후후. 쑥맥은 아닐 테고 아마 멋진 전사의 모습 아니면 지적이고 다정다감한 모습으로..그나저나 언제 나타나려는지..아무튼 이번에 나타나면 절대로 리크의 곁을 떠나는 일은 없을 거야.."
세아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비장한 결심을 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오전 예정대로 프리즘의 전사들이 각 자신들의 통치대륙으로부터 머나먼 여행을 거쳐서 하나둘씩 아미라스루텐 제국의 하몬 궁으로 입성을 하였다. 각 프리즘의 전사들의 행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화려했고 수천 명이 넘는 직속 상급전사들을 대동하였다. 대도시 사람들은 그들을 맞이하면서 길 양옆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와! 와!]
"야. 이번엔 어둠의 종족인 프리즘 전사 리아몬님과 포니님인 것 같은데.."
"후. 과연 저기 수천명의 어둠의 종족들 좀 봐. 헬시 전사 헬폰소 전사들이 호위병으로 프리즘 전사들을 주변을 가득 매 우고 있어."
"난 말이야. 검은 계통의 금속성 전투복인 어둠의 종족 복장이 제일 멋있는 것 같아."
"나도."
"뭔가 다르게 보이지.."
"솔직히. 다들 잘 생겼잖아. 특히 저기 프리즘의 전사인 리아몬님 말이야."
"그런데 마족의 프리즘 전사인 골고트는 언제 오지.."
"젠장 그 골고트 말이야! 올해는 오지 안았으면 좋겠다. 작년에 골고트가 얼마나 깽판을 부렸는지 모르지? 역시 마족들의 개 같은 성격은 어디가나? 게다가 마족들이 술 취하면 얼마나 거친 줄 아니? 작년에 마족들이 거쳐간 술집의 모든 집기가 박살이 났다지."
"뭐? 그렇기야 하지만 어차피 협력체제이니 그래도 환영을 해주는 것이 도리이겠지."
그날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가 되서야 6명의 프리즘 전사가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단 한 개의 상석에는 하몬이 앉아있었고 그 아래 테이블 왼쪽으로 골고트, 세아린과 케이사르, 그리고 맞은편엔 리아몬과 포니가 있었다. 각 프리즘의 전사들 뒤에는 자신들의 직속 수하 한 명씩이 포진하고 있었다. 오늘은 사계(四界)의 모든 대륙을 대표하는 3개 종족의 최고 실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