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15. 탈출
데스퍼라도(Desperado)
탈출
천살전사(天殺戰士)들의 추적방식은 그야말로 신속하고 정확했다. 마을 사람들이 허둥대며 남긴 수많은 발자국들을 보고는 그들이 마을 뒤 바위산 쪽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고 그 즉시 추적이 시작되었다. 현재 이들 천살전사들은 3개 종족 남부 지방 연합군 소속으로 레아 제국을 비롯한 주변 마족, 어둠의 종족들을 통틀어 케록시아 대륙의 서남쪽에 출현하는 천상인들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해오고 있었다. 현재 이들 남부지방 천살전사들을 이끄는 대장은 한때 인간종족인 아미라스루텐 제국의 케시어스 3군단 소속 아크 계열 수호전사였던 게아트라 불리던 자였다. 피도 눈물도 없기로 소문난 냉혈한이란 닉네임이 따라붙는 게아트 대장은 이 곳 타레탄 마을에 오기 전 벌써 13개 마을을 지도상에서 그 흔적을 지워버린 경력이 있었다. 물론 죄 없는 많은 생명들이 그와 그의 수하들에게 죽임을 당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케아트의 천살전사들이 뒤 산 바위 능선을 타고 추적한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파란 하늘마저 석양의 주황빛으로 탈색되어 가는 듯 했다. 능선 어느 부군에서 드디어 게아트가 기다리던 소식이 앞서갔던 척후병들에 의해서 전해졌다.
"대장님. 타레탄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한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게아트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그는 은근한 미소마저 지었다.
"계속해봐."
"맞은편에 보이는 하얀 바위 산 건너편 아래에서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젊은 사람들 약 150여명 정도가 낫이나 농기구 등으로 주변에 망을 보고 잇고 노인이나 부녀자, 어린아이들이 숲 안쪽에서 쉬고 있는 듯 합니다. 일단 파악 가능한 총 인원은 약 500여명 정도로 일단 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전사나 병사차림의 사람들은 없었나?"
"그런 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사견으로 그들 대부분은 타레탄 마을 사람들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네놈의 개인적 사견이 아니라도 모든 정황 자체가 그런 것 같군. 자 그렇다면 이젠 사냥하는 일만 남았지. 후후."
게아트의 엷은 미소가 흐르고 잠시 후 그의 사냥 명령이 떨어졌다. 천살전사들의 임무는 그야말로 편안한 보직이었다. 반항한번 제대로 못하는 농민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을 청소하는 일은 직접 검을 다루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가벼운 운동조차 되지도 못했다. 물론 이들이 이런 임무를 처음 수행할 때에는 적지 않은 갈등과 고뇌를 겪어야만 했다. 천상인들의 숙주 대상체 하나만 죽여도 될 것을 주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연합군 최고 상부인 프리즘의 사령관 하몬의 절대적인 명령이었고 언제 천상인들의 숙주가 일파만파(一波萬波) 늘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두 눈 딱 감고 저마다 합법화된 살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게아트 대장은 이러한 임무를 처음부터 즐긴 듯 하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그의 잔인한 성격에 이런 보직이 딱 맞았는지도 몰랐다.
잠시후 게아트를 선두로 천살전사들이 맞은 편 산 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그들은 목표지에 거의 다 오자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바로 산아래 숲 속 공터에 타레탄 마을인들이 여기저기 모여 쉬고있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게아트의 한번의 명령이면 500명 이상의 마을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부모와 노인들의 얼굴에 전사들에게 쫓긴다는 긴장감도 돌았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뛰어 놀고 그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간간이 미소를 짓곤 하였다. 그때였다. 천살전사들이 몰래 숨어있던 곳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마구 외쳤다.
"천살전사다!! 모두 도망치세요!!"
나무 위에서 망을 보던 타레탄 마을사람이 이제서야 천살전사들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던 것이다. 산 아래에는 일대 나리가 났다.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죽음의 공포가 순박한 마을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타레탄 마을에서 자체 방어단을 구성한 젊은이들조차 철제 농기구, 철검, 낫 등을 손에 들고도 도망가는 자가 더 많았다. 개중에는 용감하다는 자들 몇 명이 도망가지 않고 천살전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벌벌 떨리는 손을 제대로 가늠조차 못했다. 약 30여명의 타레탄 젊은이들은 공터 곳곳에 솟아 나있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천살전사들이 나타나다니. 망보는 놈은 어떻게 된 거야? 졸기라도 했단 말인가?"
"우..우린 모두 죽겠지."
"어차피 이판사판이니 싸우다 죽자."
"무서워. 그냥 도망치자."
"나도 무서워서 오줌이 다 나올 정도야.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시간을 조금이라도 번다면 마을사람들이 더 멀리 도망칠 수 있잖아."
"우..우린.?"
"우린 어차피 죽는다는 거 알잖아.."
"젠장 난 잘 몰라. 그저 살고 싶단 말이야.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후후.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 중 장가 간 놈 한 놈도 없어."
"씨. 난 아직도 총각이란 말이야."
"미친놈. 멍청하기는..적어도 여자 경험은 했어야지..후후."
"켁켁!"
"하하."
마을 젊은이들은 여기저기에서 킥킥 되며 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웃음소리 뒤에는 두려움과 죽음의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았다. 그들 스스로도 이것이 마지막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들은 10대 후반에서 20살 정도 되었을까 아직 혈기 왕성한 자들이었다. 기특하게도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희생으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의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려던 것 같았다. 그때 이들 젊은이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장가를 가지 않은 것 같은데..기억이 나지 않는다마는.."
20대 후반 혹은 갓 30살이 되었을까? 바로 세도스였다.
"세도스 아저씨.."
세도스는 나이로 보아 이들에게 형뻘 정도 되었지만 워낙 마을에서 차가운 카리스마가 풀풀 풍기는 세도스에게 그 누가 감히 형이란 호칭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저 파슬렌과 소피아나가 아저씨라 부르니 이들 젊은이도 아저씨라 불렀던 것이다. 어쨌든 세도스가 나타났으니 그나마 이들에게 위안이 되긴 되었다. 그때 파슬렌과 소피아나가 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저씨!"
"세도스 아저씨.."
"흠. 도망치지 않고 왜 왔니?"
파슬렌과 소피아나는 바위 뒤에 숨어있던 다른 아이들과 손짓으로 인사를 나누더니 세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 놈들이 전부 여기 있는데 도망가기가 창피하더라고요."
이번엔 세도스가 소피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여자이고 나이도 이제15살밖에 안되었는데 지금이라도 다른 마을사람들과 함께 저 숲 안 쪽으로 피신하거라."
"오빠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에요."
그때 바위 뒤에 있던 누군가가 한마디했다.
"과연 남매는 용감했다. 헤헤."
"치..너 죽을래."
"어차피 조금 있으면 죽을텐데.."
순간 침묵이 흘렀고 조금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사라졌다. 이제 천살전사들이 쳐들어오면 저승에서라도 봐야할 친구들이었기에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있는 데로 까불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때였다. 저편 숲 속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밀려왔다. 세도스가 소리쳤다.
"내말 명심하거라! 절대로 바위 뒤에서 나오지 말아! 절대로.."
세도스는 한마디하고 적들이 밀려오는 와중에 숲 속 공터 한복판에서 의연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후 세도스가 손바닥을 펴서 허공으로 들어올리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가는 빛줄기가 손바닥에서 형성되더니 한 타래의 실뭉치가 나타났다. 세도스는 그 실들을 풀어서 재빨리 숲 안쪽의 나무 여기저기 묶어서 서로를 잇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도대체 세도스가 뭐를 하는지 바위 뒤에서 고개를 쭉 빼고는 살펴보았다. 분명 실들을 묶는 것 같은데 육안으로는 그 실들이 너무 가늘어서 보이지 않으니 혹시라도 세도스 아저씨가 미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잠시후 세도스가 일을 다 끝마치자 약속이나 한 듯이 천살 전사들이 바로 그 방향으로 들이 닥쳤다.
[와! 와!]
검은 전투복의 천살전사들의 모습이 보이고 함성소리마저 요란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전 세도스가 실을 이어놓은 숲 속을 통과하면서 그 함성소리는 비명소리로 변했다.
[악!]
[헉!]
[칵!]
천살전사들은 숲 속에서 공터로 나오기 전 모가지와 몸통 팔뚝 다리 등이 이미 분리가 된 체 땅바닥으로 나 뒹굴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은 가는 실에 의해 자신들이 절단된다는 것 조차 인식을 못했는지 잘려진 머리들은 저마다 멍한 표정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이들조차 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에 경악을 할뿐 숨소리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세도스 만이 이러한 일들을 예측이나 한 듯 팔짱을 낀 체 유유히 지켜보고 있었다.
"멈춰!! 함정이다!"
대장 게아트가 외쳤다. 그 순간 숲 속 어느 지점에서 천살전사들의 공격이 일시에 멈추어 섰다. 잠시 후 게이크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더니 숲 속의 나무들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실이 묶여 있었군. 빌어먹을 이렇게 가는 실이 존재하다니.."
그는 직접 손으로 나무 이쪽 저쪽의 이어져 있던 실을 만져보고는 자신의 검으로 실들을 직접 끊었다. 게이트는 직속 수하들과 몇 번을 거듭 확인 한 후에야 아래 공터에 서있는 자를 살펴보았다.
"누..누가 이런 함정을.."
게아트가 무심코 공터 중앙에 선 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탄성을 질렀다.
"헉..이..이럴 수가.."
게아트의 수하들은 대장 게아트가 놀라자 의아해했다.
"대장님..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저..저놈은 리..리크 가벤더.."
"설마 예전에 하몬의 후계자라 말하던.."
"빌어먹을. 이런 곳에서 저놈이 나타나다니.."
게아트는 불현듯 과거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케시어스 3군단 시절에 리크 라는 17막사 수장 출신이 전쟁에서 단 한번의 공으로 3계급 특진하여 수호전사로 진급되었던 일. 또 자신이 아크 수호전사 장으로 있었던 수련 실에서 리크와 벌였던 대결. 바로 그 대결은 게아트 자신으로서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바로 갈비아스 파동검술 제1공격인 순간지체기술의 그 첫 번째 희생이 자신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리크는 하몬의 후계자였고 더 이상 자신이 올라갈 수 없던 위치에 그는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하몬이 직접 출현하면서 하몬의 후계자라는 리크의 허명이 드러났고 그 때문에 게아트 그 자신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어쨌든 오늘날에 직접 리크를 보니
게아트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기꾼 같은 자식.."
잠시후 게아트가 직접 세도스 앞으로 다가갔다.
"리크. 후후. 이게 웬일이신가. 하몬의 후계자라 사기 친 게 들통나니까. 이젠 이런 산골로 숨어들어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던가. 정말 꼴이 우습군. 하하."
"리크라니?"
세도스는 상대방이 자신을 리크라는 말에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