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08. 이름 없는 자
데스퍼라도(Desperado)
이름 없는 자.
세아린과 케이사르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있던 케이사르가 말문을 열었다.
"후. 어쨌든 불쌍한 건 리크 밖에 없군. 자신을 사랑한다던 두 여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설사 리크가 부상에서 회복되어 살아 있더라도 지금쯤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세상 모두가 자신을 배반했다는 생각에 아마 자살이라도 하고 싶을걸. 하몬의 검과 하몬의 배신, 게다가 철석같이 믿었던 세아린, 케시어스가 등을 돌리거나 죽이려고까지 하질 않나 더구나 한때 하몬의 후계자라 떠받치던 인간종족들의 기억 속에는 더 이상 후계자라는 개념이 남아있지 않고 요즘 떠오르는 하몬이나 우리 같은 프리즘의 전사들을 더 알아주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리크가 가야할 곳이 어디 있겠어. 정말 안됐어. 쯧쯧."
케이사르가 리크 얘기를 하자 세아린과 케시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 기아몬 신전에서 리크를 나두고 떠난 세아린이나 그후 리크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케시어스나 지금으로서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더구나 현재 리크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에서 그가 얼마나 괴로워 할 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리크의 연인들이었던 세아린이나 케시어스는 고개를 떨 꾼 체 잠시 침묵을 지켰다. 도대체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왔는지 저마다 개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세아린은 리크를 죽이려고 했던 케시어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따지고 보면 기아몬 신전에서 리크를 떠났던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조금 전 케이사르가 한 말이 이들 두 여자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는지 몰랐다. 케이사르는 그녀들의 표정을 한번 살펴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후. 괴로운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리크를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군. 그래도 다시 리크가 나타난다면 아마 또 배신을 때릴지도 모르겠네. 후후."
"그만해! 케이사르 너 진짜 죽고싶어! 더 이상 지껄이면 가만 나두지 않겠어!"
세아린이 버럭 소리치자 케이사르가 움찔했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 더 이상 리크에 대해 말하지 않을게. 사실 나로서도 리크의 잔재가 길게 이어지는 것이 별로 거든. 어차피 난 오로지 세아린 너뿐이니까.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리크를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 미친놈이 아까부터 헛소리를.."
"헛소리라니..만일 리크가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 같은가."
"웃기는 소리! 비록 리크가 시련을 겪었다 할지라도 리크는 절대 변할 사람이 아니야."
"욕심도 크군. 리크가 아무리 착해도 바보는 아니겠지. 그러니까 예전과 같은 순수한 감정으로 돌아오지는 않을텐데."
그때 케시어스가 이들의 대화에 끼어 들었다.
"리크가 창성(創成)인으로의 각성이 완전히 돌아온다면 과거의 순진했던 리크가 아닐거에요."
갑자기 세아린이 불끈했다.
"너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기아몬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세요. 하몬이 리크에게서 검을 뺐고는 즉시 사라졌던 이유를 말이에요."
"그게 지금의 얘기랑 무슨 상관 있다고 그래."
"물론 상관 있습니다. 하몬은 살성(殺成)의 기운을 받은 프리즘의 전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칠계 검의 주인입니다. 그가 뭐가 두려워 리크에게 검을 취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겠습니까? 다른 프리즘의 전사들인 헬 전사 혹은 마족의 골고타 전사일까요? 그는 바로 리크가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에 도망 친 거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몬이 리크를 두려워한다고?"
"네 맞습니다. 살성의 최고 전사인 하몬이나 저와 같은 멸성인들 조차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바로 영성이나 창성의 존재들이죠. 그 당시 리크가 혹시라도 아무르 위성 백색의 빛을 받고 창성의 기억이 순식간에 돌아오면 어떡할까 하고 하몬은 부리나케 사라졌던 것입니다."
"젠장 창성인의 기억을 찾는다고 리크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존재로 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무시무시한 존재 개념의 그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라니.."
"그 이상이란 것만 알뿐 저도 창성(創成)인에 대해 구체적인 것은 잘 모릅니다. 어쨌든 현재로서 당신들 사계(四界)인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바로 천상인(天上人)들입니다. 이미 전 대륙에 퍼진 천상인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하여 대혼란이 불어닥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천상인들 뒤에는 항시 나와 같은 멸성(滅性)인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랍니다."
"네가 그 딴 거 알려주고 목숨을 구걸할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
세아린이 라우타르의 지팡이를 허공에 향하고는 케시어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케시어스가 들어오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세아린 당신과 나는 어차피 나중에 대결해야 될 운명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과 싸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힘이 남아 있다면 차라리 천상인들로부터 사계(四界)인들을 위해 싸우세요."
"건방진 년.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어차피 너도 천상인과 한통속인 멸성인 아니야. 그런데 우리를 생각해주는 척하다니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리크님과 한때 인연을 맺었던 제가 당신들에게 드리는 마지막 충언입니다. 그럼 이만."
[파파팟]
케시어스의 모습이 투명해지더니 이윽고 사라져버렸다.
"뭐야. 어딜 도망가려고 해! 이 나쁜 계집애 당장 돌아오지 못해."
그때 허공에서 케시어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드릴 말씀이..하몬을 너무 믿지 마세요. 그에게서 보이는 능력이 능력은 아닙니다. 또한 그는 생각이 많은 존재입니다. 그럼..]
"야! 이 나쁜 계집애 너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모습을 나타내란 말이야!"
케이사르가 팔짝팔짝 뛰는 세아린을 말렸다.
"케시어스는 이미 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진정 좀 해라."
"빌어먹을.."
"그나저나 케시어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은 것 같군. 후. 명색이 프리즘의 전사라는 우리들이 멸성인에게서 직접 중요한 정보를 얻다니..이거 참 창피스럽기도 하고.."
"멍청한 자식 너 진짜 케시어스 그 불여우 같은 계집애의 말을 믿는 거야."
"비록 내가 세아린 너보다는 머리회전이 빠르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내 직감이 맞을 것 같아. 그러니까 조금 전 케시어스가 말한 내용은 웬 지 전부 진실 같아."
"그 계집애가 왜 우리에게 그따위 비밀을 얘기한단 말이야?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한때나마 사랑했던 리크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지도 모르겠지."
"배려라고. 젠장. 그 따위 존재가 감히 우리에게 배려를 베푼다고?"
"그나저나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 말이야. '하몬에게 보이는 능력이 능력이 아니다. 그는 생각이 많은 존재이다' 그게 무슨 뜻이지. 어째든 하몬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야. 그리고 내가 진짜 궁금한 것은 하몬이라는 자가 자신의 딸인 세아린 너를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걸까? 후. 벌써부터 머리가 복잡해지는 군."
"관심 없어."
*****
케록시아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비에르 지방의 산골 어느 작은 마을에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부터 목동들이 가축을 저지대의 초원으로 방목을 시키고 있었다. 약 200 여 채의 집들이 옴폭 패인 산허리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테라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워낙 두메 산골에 있었으니 그 오랜 전란으로 인한 전쟁의 여파조차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숲 지역은 테라탄 마을이 외부로부터 잘 보이지 않는 지형적 역할을 했으므로 일부러 지도를 보고 찾아오는 외부 상인들조차도 겨우 이 마을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비록 적은 산골 마을이었지만 테라탄 마을은 고요한 평화가 흘렀고 순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 마을 사람들이 내 가족 네 가족 할 것 없이 모두가 한가족같이 따뜻한 정을 베풀며 아기자기하게 그들만의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곳이었다. 헌데 요즘 이 마을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7 개월 전 이 마을에 온 이방인 때문이었다. 그 이방인은 이름도 없는 무명인(無名人)에 다가 7개월 동안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와도 대화조차 하지 않았으며 항상 무표정으로 가끔 뒷산 바위 언덕에 산책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방인을 데려온 사람은 바로 이 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의술을 물려받은 파슬렌이란 청년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윈 그 청년은 자신의 여동생인 소피아나마와 함께 마을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며 살고 있었다. 어쨌든 파슬렌은 8개월 전인가 병을 고쳐주는 성자(聖者)의 소문을 듣고 그를 보기 위해 무작정 북쪽 지방으로 떠났고 얼마 되지 않아 거의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이 마을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 이후로 파슬렌은 자신이 아는 의술과 약초를 총 동원해서 그를 겨우 살릴 수 있었다. 어쨌든 오늘날 파슬렌과 여동생 소피아나는 자신의 집에 2층에서 기거하는 사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빠가 데려온 사람 진짜 과거에 많은 사람들 병을 고쳐주던 성자(聖者) 맞아?"
"응. 분명 내 두 눈으로 봤다니까. 어떤 약초나 도구 없이 손 한번 갔다되면 빛이 일어나고는 그냥 그 자리에서 사람이 낫더라고."
"후. 그런 성자(聖者)가 왜 저 모양이 되었지. 말고 하지 않고 항상 무표정으로 그저 하루하루 생활을 보내고 있잖아."
"흠.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충격 때문이 아닌가? 그 당시 선조 대로부터 배워온 지혈요법과 비상으로 가지고 있던 우리 가문의 약초가 아니었다면 진짜 큰일날 뻔했어. 어쨌든 그 당시 난 저 분의 신비한 의료 요법만 배울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구나 하고 무조건 이리로 모셔 왔는데..이거 내가 괜히 저분에게 결례를 저지른 게 아닌지 모르겠군."
"요즘 마을 사람들이 저분에 대해 수근수근 거리고 있어. 이름도 모르지, 말도 안 하지, 7개월 동안 한번도 웃지를 않으니 마을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그래도 자기가 할 일은 알아서 하잖니. 일부러 우리를 도와주려고 아침부터 헛간 청소랑 오후에는 가축들 사료를 챙기고 집안에 부셔진 것이 있으면 수리도 해주고 말이야. 가끔 바위산으로 등산하는 것은 뭔가 답답한 심정을 달래려 듯 탁 트인 평야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같고."
"그런데 오빠 저 분 진짜 이름이 뭘까? 정말 궁금하지 않아?"
"궁금은 하지.."
"오빠. 무슨 사연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은데. 젊은 나이에 신비한 의술로 사람들을 고쳐주니 그 심성이 천사처럼 착할 것은 분명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여자에게 칼로 찔렸으니. 뭔가 기막힌 사연이 있을지도.."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점심 준비나 해라."
"그런데 지금의 저분 표정은 서늘하다 못해 싸늘할 정도로 너무 무서워. 가끔 저분의 방에 청소하러 들어가면 뭔가 차가운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있지."
"소피아나 너 정말. 그만하랬지. 오빠 배고프니까 당장 식사 준비나 해!"
"치. 알았어."
그때 2층에서 이 두 남매가 얘기했던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남매를 보더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치고는 문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피아나가 말했다.
"아저씨. 오늘도 바위산으로 올라가시는 거죠. 그나저나 어제처럼 늦지 마세요. 음식이 다 식어요."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소피아나가 투덜거렸다.
"쳇. 한마디 대답이라도 해주면 뭐가 어때서. 진짜 이상한 분이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