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103. 엇갈린 운명
데스퍼라도(Desperado)
엇갈린 운명
그로부터 3 일 후 슬레이어와 카라펠리오는 하몬이 머물고 있던 높은 계곡에서 나와 제르모 대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 2000년만에 만난 하몬에 대해서 아직도 혼란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지 표정들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다.
"이보게 슬레이어. 하몬이 2000년 전과는 뭔가 달라진 느낌이 들지 않은가?"
"흠.."
"뭐가 흠이야. 대답을 해보게.."
"험.."
슬레이어는 카라펠리어의 질문에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 슬레이어의 표정을 살펴본 카라펠리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후후. 자네도 뭔가 느끼는 모양이군. 어쨌든 하몬은 예전과는 달라졌다네..과거 그에게서 느껴졌던 겸손함과 리크 처럼 순수함마저 간직하지 않았나? 바로 그 점이 좋아서 자네나 나나 하몬을 좋아하게 이유였건만. 오늘날 하몬을 보니 다소 경박해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 그려. 그나저나 슬레이어 자네도 괜한 헛기침이나 하지 말고 얘기 좀 해보게나."
"후. 나도 잘 모르겠어. 자네 말대로 변한 건 사실이지만 분명 하몬이 맞긴 맞아. 그만의 특유의 미소와 말투 그리고 여러 가지 모습을 보아 분명 하몬이 맞는데..다소 공격적이고 외향적으로 바뀐 것 같아."
"내 말이 그말일세. 하몬은 차라리 수줍음을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지난 3일 동안 그를 살펴보니 그와 같은 이미지를 전혀 찾아 볼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하몬 본인이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기아몬 신전에서 얻은 아무르 위성의 빛이 자신의 잠재된 살성(殺成)을 부축이고 각성하는 과정에서 성격이 변했다고 말일세. 그러니까 칠계(七界)의 살성(殺成)은 원래 좀 거칠고 전투를 좋아하는 전사의 기질의 기운이라 그랬으니까. 하몬 역시 각성을 하면서 원래의 근원(根源)적 성격이 드러나는 건지도 모르지."
"후. 그래도 그렇지. 하몬이 붙잡아 왔다는 방울에 갇힌 그 천상인 소녀 말이야. 그냥 매정하게 죽여버리는 하몬을 볼 때 섬뜩함을 느꼈지만 자네 말대로 그의 행동이 살성(殺成)의 기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다른 프리즘의 빛을 받은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 아니인가?"
"그렇군. 리아몬, 포니, 세아린, 케이사르라 불리는 헬 전사 4명과 마족 대전사인 골고트 역시 아무르 위성의 빛을 받았으니 그들 역시 각 살성(殺成)으로 인하여 공격적으로 변해있을지 모르겠구먼.."
"아무튼 그런 것까지 우리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고 말이야. 하몬 말이 진짜라면 당장에 리크가 위험하지 않은가? 케시어스가 진짜 천상인 출신이라면 이거 큰일인데."
"이제 생각해보니 케시어스가 아미라스루텐 반데라스 가문의 비전 절기인 천애검법(天愛劍法)을 사용한다 그랬지. 이거 어째 불안한데. 하늘을 사랑하는 전투 기술이라..분명 하늘과 연관되었단 말이야. 그런데 천상인(天上人)들 역시 하늘에 사는 존재라 해석되지 않는가. 혹시라도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하몬에 의하면 이 시점에서 천상인들이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어 이 사계(四界) 전체를 대혼란으로 몰고 간다고 그랬는데..이것 참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두고 보면 하몬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겠지 그러나 저러나 우린 제르모 도시로 가서 그저 리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하긴 어차피 리크도 각성이 완전히 이루어지면 로엔스톤 대륙에 온다고 봐야겠지. 바로 [하늘이 열리는 곳]의 전설을 보러 말일세. 그리고 그곳은 멸성(滅性)인들의 차원 통로이고 바로 멸성인들은 천상인들의 근원체가 되는 존재들이라 했으니 이는 엄청난 힘들이 이 사계(四界)로 밀려오는 것일텐데. 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일단 가세나."
카라펠리오는 아직도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솔직히 난 아직도 모르겠네. 하몬 말대로 케시어스가 천상인이 변해서 리크에게 접근한 존재인지. 아니면 하몬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 말일세."
"젠장.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맞겠지. 하몬이냐. 케시어스냐..후후. 자넨 어디에다 걸겠냐."
"어디에다 걸다니?"
"하몬이 진짜인지 케시어스가 진짜인지 말일세."
이 빌어먹을 자식이! 이게 도박 놀음이냐?"
"사실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도박과도 같은 게임 아닌가? 하몬은 분명 그 옛날의 하몬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모든 비밀을 얘기해주고 이렇게 곱게 돌려보냈으니 그를 의심하자니 그것도 더 이상 부질없는 것 같고. 한편으론 하몬의 말이 사실이라면 케시어스가 리크를 암살하기 위한 천상인의 실체라고 하니 그것 또한 믿을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자네도 케시어스를 보면 알겠지만 그 아이는 오로지 리크에게 지나칠 정도로 헌신적인 아이 아닌가. 그리고 만일 케시어스가 진짜 천상인이라면 각성이 돌아오지 않은 리크를 미리 제거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케시어스가 기아몬의 백색의 빛을 받도록 방치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단 말이야."
"젠장 가뜩이나 혼란스러운데 네 놈의 얘길 들으니 이거 머리가 아파 죽겠군."
"후후. 하몬이냐 케시어스냐..과연 누가 진짜지?"
"슬레이어! 지금부터 한마디도 지껄이지 말고 조용히 가세나."
"하몬이라.. 아냐! 아냐! 그렇다면 케시어스..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후. 과연 누굴까?"
"닥치라고 했지. 빌어먹을!"
***
[쏴! 철석!]
"매번 황혼이 질 때마다 각기 다른 장관을 연출하다니 정말 아름답군.."
리크는 오늘도 변함없이 해변 언덕에서 서편 노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시어스가 이곳 별장을 떠나 자신의 본가로 간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가뜩이나 인적이 없는 외딴 이곳에 케시어스 마저 없었다. 리크는 그저 해변을 거닐다 채소밭과 과수원에서 그날그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심하군."
잠시후 리크는 해가 지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별장으로 향했다.
"후. 말동무가 없으니 정말 무료해. 그나저나 케시어스는 언제 오려나.."
북쪽 별장으로부터 동쪽방향으로 약 걸어서 사나흘 떨어진 예키츠 지방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케시어스의 가문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아미라스루텐 제국의 3대 명문가중 하나인 반데라스 가문은 케시어스와 같은 군단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명가(名家)였다. 제법 높은 바위지대 언덕에 자리잡은 반데라스 성(城)은 예키츠 지방에서만 나는 대리석 질감의 귀한 메스로탄 석(石)으로 견고하게 지어졌다. 보통 귀족들의 집 내부에 장식용 받침대, 테이블, 의자, 테라스, 기둥에 재료로 쓰이는 하얀색의 메스로탄 석(石)을 사용해서 통 체로 성(城)을 구축했으니 반데라스 가문이 이 아미라스루텐 제국에서 명가(名家)로서 그 얼마나 위용이 높은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케시어스는 집을 떠난 지 근 3년만에 자신의 고향인 반데라스 가문에 도착하였고 벌써 일주일째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케시어스는 오늘만큼은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리크가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지만 부모님과 하나뿐인 오빠가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아 내심 걱정이 되었다. 현재 케시어스는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여러 번 눈치를 보아가며 이곳을 떠나겠다는 망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빠인 케트오스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인가.
"케시어스. 너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려 머리 굴리고 있지?"
"아..아냐. 오빠.."
"뭐가 아니야. 아까부터 식사는 안하고 아버지 어머니 눈치만 살피고 있는 네 녀석의 마음을 모를까 봐."
"치. 사실 급히 볼일이 있어서.."
"하하. 내 짐작이 맞았군..그래 3년만에 돌아온 네 녀석이 고작 일주일도 지내지 못하고 벌써부터 안달이니. 무슨 계집애가 역마살(役馬殺)이 꼈나..후."
그때 아버지가 큰소리로 오빠인 케트오스를 꾸짖었다.
"허. 이 놈 역마살이라니? 네 동생이 어디 놀러갔다 온 것도 아니잖니. 더구나 이 애비 이후로 군단장의 대를 이은 자랑스런 딸이고 자신의 직분을 다 하기 위해 그간 바빴던 모양이지."
"쳇. 이 못난 아들놈은 군단장조차 못 되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요즘 인간종족에서 군단장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그러십니까? 더구나 하몬의 후계자이니 하몬이 나타나고서는 제국의 군단 이미지가 땅바닥에 떨어진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또 그 군단장 타령하십니까?"
"뭐..뭐라고 이놈이 감히.."
"도대체 아버지는 그까짓 잘 난 직급에 아들이고 뭐고 항상 무시하시니 제가 어디 창피해서 살겠습니까?"
"이..이놈이 내가 언제 너를 무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지금 무시하는 말투 아닙니까?"
"이 놈이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이지..누가 누구를 무시했다고 그래.."
"에잇. 전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렵니다."
오빠 케트오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현관 밖으로 나가버리자 식사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머리가 반백인 아버지 역시 스픈을 테이블에다 탁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으로 가버렸다. 케시어스는 자신과 어머니만 달랑 남자 무척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후. 또 저 때문에 아버지와 오빠가 다투는군요.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빨리 떠나려 했건만..휴. 그나저나 어마 저 오빠한테 갔다올게요. 오빠 성질에 한번 집 나가면 몇 달이잖아요."
잠시후 케시어스는 현관 밖을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오빠 케트오스는 왼편에 뾰족한 성 탑 아래 마루에 기대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케시어스가 다가가자 케트오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 미안해..나 때문에.."
"미안하기는..젠장. 이번에도 내가 또 흥분을 했군..어쨌든 반데라스 가문의 망나니 같은 자식인 이 오빠 때문에 네 녀석에게 먹칠을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구나."
순간 케시어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오빠! 정말 다시 그런 소리하면 나 정말 화낼 거야!"
"휴. 아무튼 동생 앞에서 창피하군. 그나저나 너 얼굴 상처 말이야. 왜 안 고치고 있어? 설마 아버지를 못 믿는 것은 아니겠지?"
"몰라. 그냥 무서워."
"무섭기는 우리 가문이 이렇게 까지 명문가(名文家)로 올라섰던 건 바로 천상제단(天上祭壇)때문이라는 거 몰라 그리고 그곳의 힘을 빌리면 네 얼굴 정도야 쉽게 고칠 수 있단 말이야."
"후. 그건 나도 아는데. 다시는 천상제단(天上祭壇)이 있는 지하 석실에는 가지 않을 테야. 어릴 때 아버지와 한번 가보고서는 기절했잖아. 내려가는 입구와 통로서부터 기이한 그림들과 음침한 분위기 등..정말 싫어."
"후후. 웃기는군. 바로 그 곳에 적혀있던 가문절기인 천애검법(天愛劍法) 때문에 군단장이 된 네가 그곳에 가기 싫어하다니?
"아무튼 기분 나뿐 곳이야!"
"그러고 보니 나와 네가 각성(覺醒)의식을 치를 때도 다가왔군."
"뭐..뭐라고! 각성(覺醒)의식이라니?"
"바보야.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 기억 안 나? 반데라스 가문인이라면 근원의식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후. 각성이라. 모르게 두려워! 도대체 무슨 각성이 필요한 거지.."
"하긴 우리가문만 아니라 소문에 듣자하니 천상제단(天上祭壇)을 모셔놓은 곳이 무척 많다고 그러더라. 더구나 각성의식을 치른 사람들은 모두가 이상하게 변한다고 그러더라."
"그만해. 무섭단 말이야."
"하하하. 그 위대한 3군단장님께서 두렵다고? 아무튼 이번엔 각성의식을 치루어야만 외출이 허락될걸."
"그렇다면 아버지도 이미 각성의식을 하셨단 말이야?"
"아버진 오래 전에 이미 하셨지."
"후. 그래도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그야 모르지. 적어도 내가 보기엔 각성의식을 받으신 그 이후로 완전히 변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특히 3군단장 시절 네가 하몬의 후계자라 하는 사람과 어울려 다니는 것에 대해 무척 관심이 높으셨지. 더구나 아버진 자신의 심복을 시켜 너와 그 하몬의 후계자를 철저하게 감시를 하라는 것을 우연히 들었어. 그때는 뭐 아버지가 딸에 대한 관심이이려니 하고 무심코 지나갔지만.."
"무심코 지나갔지만 또 뭐야. 무슨 얘기가 더 있는 거야?"
"바보야. 사실 아버지는 네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알고 계시단 말이야.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단순히 네가 걱정되어서 감시자를 네게 붙이는 게 아니라 바로 리크라는 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
"헉! 그..그렇다면 아버지와 오빠는 지금 내가 북쪽 별장에서 리크와 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어떻게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 할 수가 있어?"
"지금 말하고 있잖아! 아무튼 아버지도 내가 이런 얘기를 네가 한다는 사실을 아시면 노발대발하실 거야. 그나저나 각성의식만큼은 너도 피하지 못할 거야.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어.
뭐 별일이야 있겠어. 모든 가문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성인이 되면 받아야하는 일종의 성인의식정도에 지나지 않겠지."
"그런데 왜 아버지는 리크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지?"
"후후. 혹시 알아. 장래 사위 감으로서 자세하게 살펴보시는 건지."
"치. 그런데 왜 그렇게 비꼬듯이 말해? 아무튼 오빠 지금 기분 풀렸지."
"하하. 내가 언제 화냈다고 그래."
"에고 말을 말아야지. 어쨌든 오빠랑 같이 각성의식을 받는다면 나도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아."
"젠장. 나를 끌어들이기는."
"치..괜히 오빠인가?"
"이럴 때만 오빠 대우받는군."
그 다음날 오빠 케트오스 말대로 아버지는 각성(覺性)의식에 대한 언급을 하였다. 케시어스와 케트오스는 어차피 치루어야 할 의식이라 생각하고 별반 생각 없이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각성의식을 받기로 한 그날 밤은 순식간에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마구 비를 뿌렸다. 천둥소리와 번개까지 동반한 폭풍우는 가뜩이나 불안한 케시어스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후. 정말 싫은데. 꼭 해야하나. 지금 당장이라도 몰래 도망쳐서 리크에게 돌아갈까? 아니야. 뭐 별일 있겠어. 아버지 말씀에 금방 끝난다고 했으니 그냥 받자.'
케시어스는 웬 지 모르게 이번 각성(覺性)의식에 대한 거부감이 저 가슴속으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불안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지만 한편으론 가문의 의식이라는 명분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그냥 받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케시어스는 리크 곁에서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핀다는 곳에 대해 무척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굳이 또 다른 근원적 기억을 위한 각성(覺性)의식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였다. 즉 현재의 행복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심리가 작용했던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