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76. 새로운 만남
데스퍼라도(Desperado)
새로운 만남
그때 슬레이어가 마룡들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뭐라 말했다.
"그 인간 아이를 내게 넘겨주게."
푸론의 고룡(古龍)과 어둠의 전사 슬레이어까지 나타났으니 마룡들은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처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순간 슬레이어의 검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렇게 할 수 없다니"
"이 아이를 넘긴다면 우린 한순간에 당신의 피의 제물이 될 것이요."
"그런데?"
"그런데라니요. 당연히 우린 이 하몬의 후계자를 인질로 삼아 이 곳을 빠져나가야겠죠. 이곳 프론 산을 빠져나가면 그때 이 아이를 돌려드리겠소."
"살다보니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일이 다 있군. 한낮 미물도 못되는 것들이 나와 거래를 하고자 하니. 하하하."
"거래가 아닙니다. 저희 목숨을 지키려는 마지못한 결정이니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 좀 해 주시기 바랍니다."
"넓으신 아량이라..이 슬레이어에게 그런 것도 있었나?"
그 옆에 있던 프론의 고룡 마저 그 소리를 듣고는 피식 웃었다.
"슬레이어에게 아량이라. 하하하. 이거 정말 웃기는군. 어둠의 종족들이 모두가 피에 굶주린 존재들이건만 바로 그 종족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대살육 전사에게 아량이라."
"이봐 늙은 용 너무 비꼬지 말게나. 사실 난 이놈들이 나와 감히 거래를 안 했다면 저 들을 살려 주려 했다네."
"자네 같은 대살육의 악마가 그런 소리를 다하다니. 말세로군 말세야. 허허."
"하지만 이미 늦었지."
슬레이어가 가볍게 손을 허공으로 내 젓자. 검은 기류가 생겨남과 동시에 각 마룡들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허공에 날개를 퍼득거리던 마룡들이 한순간에 피를 사방으로 튀기며 폭사(暴死)하기 시작했다.
"퍽!
"팍!"
"컥!"
"억!"
대장 마룡마저 폭사 당하자 리크는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저절로 몸이 붕 뜨더니 이내 슬레이어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현재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심정으로 한껏 의기소침한 리크는 자신의 몸이 떠가는 대로 그저 가만있었다. 잠시후 슬레이어와 고룡 카라펠리오는 기진맥진(氣盡脈盡) 한데다가 그 눈동자의 초점마저 멍한 리크를 요리 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흠. 슬레이어 진정 이 아이가 하몬의 후계자 맞는가?"
"후후. 왜? 아닌 것 같나?"
"하몬의 검을 쥐고 있으니 뭐 믿어야만 하겠지만 전혀 의욕이 없어 보이는군. 아니 마치 죽고 싶을 정도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으니. 허허. 인간 종족의 희망이란 하몬의 후계자의 꼴이 정말 우습군. 어쨌든 이 아이에게 기대를 거는 인간 놈들 정말 불쌍하군 불쌍해. "
"과연 그럴까? 그나저나 이보게 오랜만에 친구가 왔는데 이런 높은 곳에서 언제까지 세워 둘 참인가?"
"친구라고? 자네와 내가 친구였던가? 젠장 세월이 제법 흘러서 이거 헷갈리는군."
"하하. 그러니 늙으면 죽어야지. 벌써 망령이 들었군."
고룡 카라펠리오는 과거 일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뭐라 중얼중얼 거리면서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저 악마 같은 슬레이어 놈하고 내가 친구였나? 이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빌어먹을."
슬레이어는 고룡 카라펠리오의 모습이 우스운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리크 역시 허공에서
끌려가듯이 그들이 가는 곳으로 움직였다. 잠시후 푸론의 숲 정상 근처에 있는 통나무로 지어진 집안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고룡 카라펠리오와 슬레이어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리크는 그 옆 침대에 누운 체 이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카라펠리오는 푸른색을 무척 좋아했는지 집안 구석구석이 온통 파란 색이었고 집기, 식기, 탁자와 의자, 벽난등이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자신의 긴 망토 역시 푸른색이었고 머리카락 마저 같은 색으로 염색한 듯 했다. 카라펠리오는 고룡(古龍)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주 미남형의 젊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편 슬레이어는 상당히 두꺼운 금속형의 전투복을 착용했으며 그 색은 대부분 검었다. 흑발이 가지런히 어깨까지 내려왔지만 그에 반에서 상당히 횐 피부와 오똑 솟은 콧날과 다소 냉소적인 눈빛을 가진 이지적인 젊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보게 슬레이어 자네가 이곳에 오긴 왔던가? 더구나 친구라니 난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후. 오긴 왔었지. 바로 하몬이 자네를 만나러 이곳에 왔을 때 난 그의 검 속에 있었거든.."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생각나는군. 그 당시 하몬은 자네를 제압하고는 거의 기진맥진(氣盡脈盡)해서 이곳을 찾았지. 하긴 7일 밤낮으로 자네와 전투를 벌였으니 상당히 녹초가 되었지. 헌데 자넨 그에게 봉인을 당한 건 아니잖나. 하몬은 단지 자네와 실력을 겨루었을 뿐이라 했거늘 전투에서 진 자네가 무슨 이유인지 스스로 그의 검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던데."
"휴. 그 당시 난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지. 당시 어둠의 종족 중에선 최고라 자부했던 내가 한낮 인간 전사에게 패배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네. 7일 전투를 벌이던 마지막날 하몬은 갈비아스 파동검술 제7공격으로 날 제압했지만 난 도저히 나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네. 비록 인간이지만 하몬은 대영웅의 기질을 갖고 있었고 단지 승부였다면서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그러던군. 쳇. 아무튼 이간에게 그런 동정까지 받으니 난 미칠 것만 같았지 그래서 그의 검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한동안 충격을 달래려고 세월을 보냈다네."
"그렇다면 자넨 봉인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갔군."
"숨어 들어갔다라..하하하. 그렇지 난 내 창피한 모습을 감추려고 숨은 것이나 진배없지. 아무튼 그후에 하몬은 자신의 검 주인을 다시 찾으려 했다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검의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더군.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갈비아스 파동검술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하몬의 검에 갈비아스 파동검술을 벗어나는 다른 공격술이 더 있다는 것인가?"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 사계(四界)에는 갈비아스와 아무르 그리고 프레아세톤이라는 세 개의 위성이 있지. 바로 인간들의 자신들의 영웅의 이름을 붙인 거라네. 갈비아스는 인간 제국에서 23만년전 나타난 대영웅이었네. 바로 하몬이 2000년전 전 대륙의 통일을 갈비아스 파동검법 하나로 이룩하려고 했지. 뭐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몬이 갑자기 시라 지는 바람에 그 통일의 뜻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흠. 하몬은 다른 위성의 이름인 아무르와 프레아세톤의 비밀을 밝히려 했군. 뭐 그들 역시 인간 제국의 영웅이었겠군."
"갈비아스가 23만년전 인물이라면 아주 먼 예날 사람 아닌가? 그런데 아무르와 프레아세톤은 갈비아스보다 훨씬 태고적 인간이었다니 도대체 어느 시대사람인지 인간들조차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야. 단지 태고적에는 천상인(天上人), 어둠의 종족, 마족, 영계(靈界),인간 종족 그리고 수십개의 다른 종족들이 한데 어울려 지냈다는 전설이 있는데 바로 그 시대에 활약했던 대영웅들이라 하더군. 하몬은 여기까지 그 비밀을 밝혔지만 더 이상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 했지. 그리고는 칠계(七界)의 대운성의 기운을 받은 자가 그 모든 비밀을 풀 것이라 예언까지 했지."
"칠계(七界)라. 후 정말 대단하군. 정말 칠계라는 그런 초상위 세계가 존재 하긴 하는가? 나는 오계(五界) 존재들까지는 만난 적이 있지만. 말이야."
"하몬은 자신의 검이 칠계(七界)로부터 왔다고 굳게 믿고 있지. 결국 그 검의 주인은 칠계(七界)와 관계 있는 자가 주인이 되야 한다고 말했지."
순간 카라펠리오는 저편에서 힘없이 누워 눈을 깜빡거리는 리크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 인간 아이가?"
슬레이어 역시 리크를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사실 난 리크가 처음 하몬의 검을 얻어 수많은 경험을 하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았지. 리크가 죽을 고비만 맞지 않는다면 난 평생 모습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까 자네가 불을 뿜으려 할 때 자칫 잘못 하다 리크의 목숨이 위험하더라고."
"그래서 결국에는 그 귀한 모습을 보이셨군. 하하."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난 아직도 못 믿겠군, 저렇게 나약한 아이가 하몬의 검 주인이라는 것을.."
"후. 그 능력이야 하몬에 못 미치는 것 같지만 적어도 저 아이의 순수함에서 웬 지 모르게 끌리는 구석이 있거든. 분명 다른 인간종족들에게 느끼지 못한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네. 때로는 바보 같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이 저 아이에게서 엿보이지만 그건 결코 순진함이 아니라 때묻지 않은 맑은 영혼(靈魂)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네.
"맑은 영혼이라? 자네 같은 대살육 전사가 그런 용어를 쓰다니. 오래 살고 볼일이군."
"하하. 이거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벌써 허기가 지는데. 어서 식사나 차려주게."
"빌어먹을. 뭐 내가 요리사줄 알아."
"그래도 손님 아닌가?"
"손님이라고? 누가 초대라도 했는가? 젠장. 명색이 세간에서는 무시무시한 전설의 용이라 불리는 내가 요리준비나 하다니."
카라펠리오는 뭐라 투덜투덜 거리면서 주방 쪽으로 갔고, 이내 신경질적으로 식기들을 딸그락 딸그락 거리며 요리 준비를 하였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여지없이 카라펠리오의 잔소리로 아침이 시작되었다.
"이것들이 여기가 뭐 여관인줄 아나. 밥 먹여주지 재워주지 내가 청소 다하지. 젠장 언제까지 여기 눌러 있을 거야!"
"하몬과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진정하게."
"이런 빌어먹을! 툭하면 하몬을 팔고 그래. 젠장. 아무튼 오늘부터 네놈들이 식사, 청소 다 하라고."
"알겠네. 일단 리크와 저 아래 산 좀 갔다오고서."
"오늘도 그 아래 나무들과 바위가 남아나지 않겠군. 뭐 여기가 너희들 수련 장소인줄 알아! 머지 않아 이 프론 산 전체가 깡그리 황폐해지겠군. 제발 작작 좀 하라고."
"후. 또 잔소리. 원래 그렇게 늙으면 푸념이 많아지나?"
"이런 염병할 놈 같으니라고."
카라펠리오가 폭팔 하기 일보직전 슬레이어와 리크는 산 아래로 잽싸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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