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59. 사계(四界)
데스퍼라도(Desperado)
사계(四界)
"어..어머니."
"엄마!"
리크와 패샷보이가 동시에 외치는 이름은 놀랍게도 지상에서
생(生)을 마감한 고인(故人)들이 아닌가. 더구나 그들은 이들의
어린 가슴속에 너무나도 처절한 한(限)을 심어주고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들이었으니 도대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리크와
패샷보이는 아직도 자신들의 두 눈을 의심했다.
"리크.."
"세아린.."
꿈이던 생시이던 이들 각각의 모자(母子)모녀(母女)는 서로 와락
부둥켜안았다. 과연 어릴 때 일지감치 어머니를 여윈 리크와
세아린은 둘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죽 흘러
내렸으며 다시는 떨어지기 싫었는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꼭 껴안고는 한참을 흐느꼈다.
가스톤 역시 자들의 감격스런 상봉에 감격했는지 콧등이 시큰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의 임무
를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방을 슬며시 나가버렸다.
과연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이던가? 어떻게 산자와
망자(亡者)간의 만남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들은 분명
서로간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얼룩진 진한 교감을 한참동안
이나 느끼고 있었으며 이는 현실임이 분명 했으리라.
약속이나 한 듯 제법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고 이내 리크의
어머니가 그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 말문을 열었다.
"리크..고생이 무척 많았지.."
"............."
리크는 아직 목이 매어와 대답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어머니
의 손을 꽉 잡을 뿐이었다. 리크는 자신이 10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 얼마나 보고싶었던
엄마였던가.
파카트 제국의 귀족 가문 출신인 리크는 기사단인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전사하시고 전세마저 불리해지자 어머니와 그의
2명의 누이동생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수많은 하인들
마저 징집되어 전장에 나갔으니 어머니는 대충 짐을 꾸려
아들, 딸들과 함께 전쟁이 미치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무작정
피난길에 올랐다. 귀족 출신의 이들 가족들은 살이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에 산을 넘고 강을 넘는 험난한 여정을 겪어
야만 했다. 더구나 굶주림에 지치다 못해 결국 막내 여동생
이 죽었고 그때 겨우 열살 짜리 리크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막내의 무덤을 맨손으로 파야만 하였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3일 후 폭설로 산 한가운데
갇힌 그들은 오도가도 못하고 죽음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 이미 동상이 심하게 걸려 전혀 움직이지 못한 어머니
는 자신 때문에 자식들조차 폭설과 추위에 동사 당할까봐
강하게 밀어냈다. 리크는 하나 남은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폭설을 헤치며 산 아래로 무작정 뛰 쳐 내려갔다. 어머니
의 구조를 요청하려는 일념으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겨우
산아래 마을 발견했지만 모두 피난을 갔는지 마을은 텅텅
비어져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뒤늦게 산 위로 다시 올라갔
지만 이미 어머니는 빳빳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리크는
자신의 손으로 다시 한번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제 겨우 10살인 리크가 자신의 7살 짜리 여동생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향하던 도중 어느작은 도시를 발견했고 다른
피난민 아이들과 섞여 한동안 구걸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임시 아동 피난 보호처에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한동안 굶주리지 않고 지낼 수가 있었다.
그해 늦바지 여름 리크의 여동생은 어느 부유한 집안의 양녀
로 들어가자 리크는 바로 그 집 주위를 3개월 정도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틈으로 우연히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자신의 여동생의 모습마저 살 필수 있었다. 여동생은 무척
행복한 듯 웃고있었으며 양부모와 다른 자녀들도 자신의
여동생에게 잘해준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로 리크는 그
도시를 떠났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아폴립스의 숲이
있던 가드린 마을에 도착했고 카란의 가족들과 인연을
맺게된 것이다.
오래 전 굶주림과 추위에 동사하신 어머니 바로 그 어머니
품에 리크는 지금도 안겨있었다. 그 당시 10살 짜리 꼬마
리크가 이젠 건장한 20살의 청년의 모습이었건만 아직도
아이가 어리광 부리듯 자신보다 한없이 작은어머니 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한편 저쪽 테이블에선 패샷보이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고
그녀의 어머니 또한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어마. 정말 미안해요. 엉. 전 엄마를 나두고 저만 혼자
살려고 무작정 도망쳤단 말이에요. 엉엉."
"세아린.. 울지 마라.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너도 알잖니."
"그래도..엄만 결국 그 병사들에게 치욕을 당하시고 죽음을..
흑흑. 나도 그때 엄마 따라서 죽을 걸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세요. 그리고 그 끔찍한 악몽이 평생 저를 따라다니며 얼마
나 괴로웠는지 아세요? 흑흑"
"세아린..정..정말. 미안하구나. 어린 나이에 충격이 얼마나
컸겠니.."
"엄마는 왜 내 생각만 해! 엄마가 더 불쌍한 일을 당했
으면서.."
어머니는 20살에 너무나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한 세아린을
다시 살펴보고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정..정말 고맙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으로 커 주어서.
그 동안 엄마 없이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그런데 엄마 근데 여긴 도대체 어디냐. 이렇게 돌아가신
엄마랑 얘기를 할 수 있다니. 아무튼 여기가 어디든지 난
이제 절대로 엄마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죽어도 말이야."
리크와 세아린은 각자 애절한 이별을 경험했고 현재 가장
사랑했고 보고싶어했던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곳 사계(四界)에 도착한 첫날
부터 이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의 선물을 받았
으니 이젠 더 이상의 여한이 없었으리라.
그 다음날 리크는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급하게 외쳐대기
시작했다.
"어머니! 어머니!"
혹시라도 지난밤 어머니와 만났던 일들이 혹시 꿈이 아닌가
무척 불안했던 모양이다.
"어머니! 어머니!"
"리크..엄마 여기 있단다."
"어머니.."
거실 밖 테라스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자 리크는 안도
의 한숨을 내 쉬었다.
"휴..정말 다행이야. 꿈이 아니었어."
리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머니 어디 가시더라도 제게 꼭 귀뜸을 해주세요. 깜짝
놀랬잖아요."
리크는 다시 침대로 향하더니 마치 장난꾸러기처럼 보기
좋게 매트위로 다이빙을 하였다. 또다시 일어나 다이빙을
연거푸 하더니 갑자기 오른쪽 벽면에 휴론계 언어로
쓰여진 문 귀를 발견했다.
"음..저게 뭐지?"
그때 어머니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만 뭐라 말했다.
"리크. 넌 아버지나 다른 여동생들에 대해선 한마디도 물어
보질 않는구나. 그 문귀는 바로 아버지가 이방에 머무르셨
을 때 적으신 시 귀란다. 한번 읽어보겠니?"
"네? 그럼 아버지와 여동생들도 이곳에..?"
"막내 인 리아는 아직 휴론계에서 삶을 살고 있지만 아버지
와 나 그리고 린은 여기 에 있단다. 아무튼 조만간 만날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나저나 그 시 귀 좀 큰소리로 읽어주겠니.
바로 아버님이 이곳 사계(四界)에 처음 오셨을 때 휴론계를
못 잊으셔서 적은 글이니.."
"아..네.."
[ 내 가슴속에 황홀한 미풍이 스며드네.
그것은 머나먼 나라에서 불어오는구나
아, 초록의 물결들이 넘 실 되던 언덕들이여!
그 뾰족탑과 농장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던가?
잃어버린 추억의 땅이여. 넓은 들판이여!
찬란한 나날들이여! 아련한 기억 속에 사라지려는가?
아! 이전에 거닐던 뒤뜰과 오솔길이여!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후. 이 시를 보니 아버지는 무척이나 휴론계의 삶을 그리워
하신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지금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리크가 아버지 얘기를 하자 어머니는 갑자기 안색이 어두
워지셨고 이내 침대로 다가가더니 모퉁이 한켠에 자리를
잡으시고 앉으셨다.
"리크. 잠깐 이리 와서 앉아주겠니. 내 너에게 할말이 있단다."
"네..어머니.."
"내말 잘 듣거라. 이곳은 영혼(靈魂)과 비 영혼(非靈魂) 그 외에
여러 파동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 있는 세계란다. 영혼과 비
영혼간의 구분은 바로 육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물질에 의해서
나누어진단다. 그 외 여러 파동을 기초로 존재하는 영역이 있고
그 중에는 상상도 못할 무서운 존재들이 있단다. 또한 그들이
공존하는 수백개 대륙이 있지. 나처럼 하위계에서 생(生)을 마감
한 영혼들 역시 이 세계에 머물기 위해 올라오지. 우린 그들을
영혼이라 부르고 원래 이 곳 주민들을 비 영혼이라 부르지. 우린
서로 조화롭게 잘 어울려 나름대로 평화로운 삶을 즐기고
있단다. 케록시아 대륙의 아미라스루텐이라는 이곳 또한 드넓은
사계(四界)영역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단다. 또한 그 외
알 수 없는 수많은 영역들과 대륙들이 존재하지만 여기처럼
항상 평화로운 곳만 있는 건 아니란다. 이곳에도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하고 저 어둠의 영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초월존재들이 서로간에 세력을 넓히는 전쟁을 한단다.
후. 결국 이곳 아마라스루텐 도시도 저 아득하게 먼 영역의
세력다툼에 연계가 되었고 결국 이곳 수호전사들 역시 머나먼
원정길에 오르게 되었지. 바로 네 아버지도 원정팀 소속이니
한동안 여기에 못 오실 거야. 정말 네 아버지도 얄궂은 운명이
시지. 휴론계에서 삶을 사셨을 때에도 기사단원으로 전쟁에
나가시더니 이곳 사계(四界)서 조차도 같은 전사의 운명에 휘말
리시다니."
"정말 야속하군요. 지상에서도 그놈의 전쟁 때문에 아버지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봤는데 여기서조차 아버지 얼굴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니.."
"하지만 이 엄마는 옛날처럼 불안하지만은 않구나. 바로 내
아들이 이렇게 건장한 청년으로 돌아왔고 더구나 하몬의
검을 갖고 왔으니..아무튼 리크 네가 그 검의 주인이 되었
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질 않는다."
"하몬의 검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후. 이것 참."
"리크 수백개의 모든 대륙의 희망이 바로 너란 걸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우와. 대륙이 수백개나 된다고요. 이곳이 얼마나 넓기에 그
많은 대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거죠..더구나 내가 모든 대륙
의 희망이라니요. 어머니도 가스톤님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말씀만 하시네요."
한편 패샷보이에서 아리따운 숙녀로 변한 세아린은 밤새도록
엄마와 얘기꽃을 피워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졸린 기색이었다.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세아린은 맞은편 방에서 리크가 나오자
얼른 가서 부둥켜안았다. 이에 깜짝 놀란 리크가 화들짝 놀라
면서 뭐라 소리쳤다.
"패샷보이 뭐야. 너 미쳤어! 이 안 놔!"
"고마워!"
"뭐..뭐가 고마워? 젠장 빨리 떨어지란 말이야! 징그럽게.."
"너 때문에 우리 엄마 만난 거 말이야. 정말 고마워 이건
진심이야!"
말이 끝나자 리크를 껴안은 세아린의 팔이 풀어졌다. 리크
는 아직도 눈가가 촉촉한 세아린 얼굴을 보자 웬 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패샷보이. 저..저기 말이야. 이제부턴 너를 여자로 봐도 되겠지.
음 그래서 앞으로 패샷보이 대신에 세아린이라 부를게.."
세아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 친한 친구가 여자로 변하다. 후후. 정말 웃기는군. 하지만
이제 보니 너무 예쁜 것이 여자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몰라! 몰라! 잉.."
"헉..잠..잠깐!! 이거 아직도 닭살이 솟는 것 같은데..세아린
아직도 네가 남자였다는 선입관이 있으니 갑자기 그렇게 확
바뀌지는 말라고. 아직은 징그럽다고.."
"잉. 창피하게. 몰라 잉."
세아린이 리크의 팔을 꼬집자 이내 비명을 질렀다.
"꺅!!"
리크는 혼비백산(魂飛魄散)해서 아래층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한편 세아린은 도망치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후후. 장난한번 친걸 가지고. 하여튼 저 쑥 맥은 아마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야. 바보 같은 자식."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