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퍼라도] 5. 아폴립스의 목검
데스퍼라도(Desperado)
아폴립스의 목검
"코끝을 스치는 잔잔한 바람과 초록의 물결이 이는 들판..후..
옥빛 하늘조차 고향 엘시온과 흡사하군.....더구나 렉 녀석
마저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으니.....이곳 아폴립스 숲은
분명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묘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오랜 방랑생활을 한 헤수스는 마치 늙은 영감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이곳 파가논 제국의 변방 촌구석
은 분명 헤수스에게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가드린
마을과 팔튼 마을 사람들은 아폴립스의 자생지를 경계로 두고
각기 평화스런 전원의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
사실 이 두 마을의 아이들이 아폴립스의 경계를 두고 전쟁놀이
를 시작한 계기는 지난해 대전란으로 인한 피난민들과 군인들
이 몰아 닥치면서부터였다. 피나민들은 전쟁에서 겪은 고초 때문
인지 저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몰골마저 상접
하니 그런 모습을 생전 처음 보는 마을아이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더구나 패잔병들이었지만 그들의 전투복과 힘없이
땅바닥에 질질 끌고 오는 철검 등이 아이들에게는 무척 인상적
이었으리라. 급기야는 자신들의 아버지들 마저 병사로 징집되어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런 배경 속에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쟁에서 심한 부상을 당해 팔을 잃거나 다리를 잃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한 두 명 씩 귀환함으로서 분명 아이들은
간접적이나마 전쟁의 참상을 느꼈으리라.
오늘날 아폴립스의 숲에서 렉을 상대로 사냥놀이를 하는 아이
들 역시 그 동심이 변질되면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잔인한
내면이 어린 나이에 비해서 일찍 부각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대전란으로 인한 후유증 혹은 부작용으로 볼 수도 있었다.
한편 헤수스는 커다란 배낭과 함께 낑낑대며 아폴립스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후..이 참에 아예 배낭상인으로 전업을 해버릴까....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장사도 하고 돈도 벌고 여행도 하니...그리 나쁜
직업 같지는 않는 것 같은데.....후후."
헤수스는 자신이 기거하는 거대한 아폴립스 나무에 다다르자
한순간에 30 M를 점프하여 나무 위에 있는 움막으로 올라갔다.
만약 지나가는 사람이 그와 같은 모습을 보았다면 도무지 믿어
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늦었군요."
"호..이게 누군가..렉 결국 살아남았군.."
헤수스는 자신의 움막에 렉이 자신을 기다린 것을 이미 안 것
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헤수스는 나무 아래를 한번 흘끔 쳐다
보더니 다시 말문을 이었다.
"벙어리인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군...그런데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왔니....."
"................"
근 한달 만에 만난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한달 전만 하더라도 마을 아이들에게 무차별하게 폭행당하거나
온갖 치욕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항변조차 못했던 렉이 헤수스 자신
의 움막에서 누워 대뜸 자신에게 말을 건네 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
의 사건일수도 있었다. 어쨌든 헤수스는 자신의 배낭을 풀고 아폴
립스의 잔가지로 만든 움막 안에 여러 생필품들을 차곡차곡 정리
하기 시작했다. 헤수스는 렉을 흘끔 한번 쳐다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사냥감 신세냐?"
"아니요...."
"흠..잘됐군...렉"
"리크."
"리크 라고?"
"예."
"렉이 아니라 리크....후후..좀 낫군..."
"리크 가벤더"
"리크 가벤더라.....좋아 앞으로는 리크라 부르마...."
"아저씨는?"
"헤수스."
"성은요?"
"성이라....나중에 말해주마...."
"좋으실대로..."
"허..이 놈 봐라..제법 당돌한데.....그나저나 한달 전 너 혼자
덜렁 나두고 이 숲을 떠난 것 미안하군."
"나를 위해서겠지요...알아서 살아 남으라고.."
"마을 아이들의 폭력근성을 네가 깨웠으니 네 스스로 수습을
할 책임이 있지..후후 마을 아이들의 폭력근성이 그 강도가
높다하더라도 처절하게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생존본능을
제압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테니......아무튼 제법인데 어린아이
치고는 못할 경험을 했구나......"
"어린아이는 아니죠..난 14 살이거든요.."
"흠. 보기보다 그렇게 어리지는 않군.....지난번 내가 준 아폴립스
의 목검을 좀 볼 수 있겠니.."
리크는 자신의 등뒤에 목검을 헤수스에게 건네 주었다. 목검의
하단 부분에는 홈이 파여 있었고 가는 밧줄이 칭칭 감겨 리크
의 손목과 연결 되어있었다.
"흠..목검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아예 목검과 네 손목에 줄을
이어났군. 좋은 생각이야..."
헤수스는 목검을 들어 위아래로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목검의 날은 울퉁불퉁 이가 빠져 있었다. 더구나 말라비틀어
진 검붉은 선혈자국에 목검 여기저기에 얼룩이 져 있었다.
"너..혹시..."
리크는 미소를 한번 짓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 심하게 하진 않았어요....."
"다행이군....아무튼 리크 이젠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할 일이 남았다니..."
"카란....빌로마....다른 몇몇 아이들....."
"이번 사냥놀이는 제법 오래 가는데....한 달이 흘렀건만....."
"내일이면 끝날거에요. 그리고 그들에게 갚을 일도 있죠."
"음..갚을 일이라....어쨌든 잘됐군 적어도 내일은 심심하지
않을 테니,..."
"저 갈게요."
리크는 가지에 묶여 있는 밧줄을 이용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크가 가버리자 헤수스는 벌떡 일어나 서산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석양노을은 아폴립스
의 숲을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흠..이거 뜻밖인데....렉...아니 리크가 말을 내게 걸어오다니..
후후..하긴 그게 정상일지도. 하여간 점점 이곳이 좋아지기
시작하는데..이거 몸은 옛날 같지 않고 한동안 이 고장에서
쉬어볼까."
한달 전과는 아폴립스의 숲에는 분명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리크를 대상으로 한 사냥놀이는 이젠 그 의미를
잃은 지 한참이었다. 한달 전 헤수스가 리크 혼자 남겨
두고 이 숲을 떠났을 때 리크는 마을 아이들의 사냥대상
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우선 리크는 제법 커다란 나무 위에 자신의 둥지를
틀었고 비교적 빽빽하게 들어선 아폴립스 나무들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각 나무에 밧줄을
걸어 놓았다. 처음 일주일간은 쥐 죽은 듯 한 나무에서
지냈고 리크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은 날이 어둑어둑
해져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제법 밧줄을 이용
하여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동이 수월해진 리크는
헤수스가 준 아폴립스의 목검을 가지고 밤새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검법을 모르는 리크였지만 아폴
립스의 가벼운 목검으로 여러 동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좌로 한번 우로 한번에서 벗어나 찌르기의 3연속
동작을 반복 연습했다. 때로는 순서를 거꾸로 해서 찌르기
좌로 베고 우로 베는 동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 밤낮 가리지 않고 검만을 휘둘렀으니 그 속도만큼은
점차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마을 아이들이 차고
다니는 치칼라 나무의 무거운 검과는 대조적으로 솜털처럼
가벼운 아폴립스의 목검은 어설프지만 그럭저럭 쾌검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크는 체구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작았고 근력
마저 약했으니 그들과 정면승부를 벌인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다, 더구나 그들의 숫자는 가드린 마을과 팔튼
마을과 합쳐 근 60여명이 되지 않는가. 하지만 마을 아이
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대 여섯 명 씩 조를 나누어 다닌다
는 것에 그들의 허점을 노리려 하였다. 즉 이 나무 저 나무
로 옮겨 다니며 한 조씩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리크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약 20일 정도가 지나
자 아이들 중에 부상자들이 늘어갔다. 거의 철검과 맞먹는
강도를 지닌 아폴립스의 목검은 결코 아이들에게 사정을
두지 않았다. 더구나 마을 아이들은 사냥놀이 정도의 게임
으로 생각했지만 리크에게는 거의 생사를 건 싸움이었기에
그는 쉽사리 그들에게 잡힐 리 없었다.. 나무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머리통을 가격하고 훌쩍 나무위로 숨는가 하면 혹은
나무 가지에 걸어 놓은 밧줄을 타고 나타나 자신들의 가슴
과 몸통을 후려치니 아이들의 몸은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한달 여가 되자 리크의 목검은 더욱 빨라졌고 그 위력
마저 달라졌으니 급기야는 리크의 기습 공격에 아이들의 머리
통 혹은 다른 부위에서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현재 리크
를 잡기 위해 사냥놀이에 참가한 60 여명 중 불과 10명 정도만
남았으니 이 사냥놀이의 승산은 점차적으로 리크에게 기울어
지고 있었다.
한편 리크는 이 지겨운 사냥놀이에 막을 내리려고 결심을
굳혔다. 지금의 리크 입장은 사냥감이라 기보다는 아이들을
잡는 사냥꾼의 위치에 더욱 가까웠다. 그러나 아직도 리크
자신을 사냥감이라 여기는 카란 대장과 빌모아 대장 그리고
그들의 심복들이 자신을 포기 안 하니 내일만큼은 그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줄 심산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