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결전 (5)
“···어쩔 수 없군. 승산이 없다면 유럽 전선은 일단 철수하도록 지시하시오. 지금은 무엇보다 태평양에 전력을 집중해야 할 때요.”
그런 루즈벨트의 말에, 마셜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 말씀은, 독일과 강화를 맺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내 처칠 경과 영국을 생각해서라도 가능하면 끝까지 버텨보려고 했건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타협하는 수밖에.”
사실, 원래 루즈벨트는 독일과의 전쟁을 이렇게 강화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1차대전 당시의 ‘너무 가혹하지만 충분하지 못한’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이번 전쟁이 일어난 것을 반면교사 삼아서, 이번에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확실한 승리를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생각은 연합군이 독일군에게 밀리고 있던 한 달 전의 1차 회담 때까지만 해도 변함이 없었다.
비록 소련이 전쟁에서 발을 빼는 바람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어려워졌지만, 이제 어느 정도 연구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완료된다면 독일의 항복을 받아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루즈벨트의 기대는 독일과의 1차 강화 협상 이후로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회담이 시작되기 얼마 전부터 V-2 로켓을 런던에 날리며 무력시위를 하던 독일군은 회담장에 원수를 보내면서까지 원자 폭탄에 대한 이야기를 은연중에 흘렸다.
그렇다면 저들은 어째서 이러한 행동을 취하면서까지 정보를 흘렸는가? 사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딱 하나뿐이었다.
‘···아마 자신들이 원자폭탄 개발 경쟁에서 앞서나가고 있으니 괜히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겠지.’
이 시점에서 이미 미국이 독일에게서 항복을 받아낼 가능성은 모두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연합국은 원자폭탄을 완성하기는커녕, 맨해튼 프로젝트를 전면 중단하고 첩자를 색출하고 있는 판국이었으니까.
게다가 미국이 당면한 문제는 독일의 원자폭탄과 V-2 로켓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한편, 태평양 전선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의 적성국이 될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을 향해서 점점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독일에 이어서 소련 놈들까지 움직이다니. 이대로 저놈들이 동북아를 장악해버리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이번 세계대전을 통해서 전통적인 식민지 제국이었던 프랑스, 영국과 같은 열강들은 모두 과거의 위세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몰락해버렸다.
그럼 전후의 질서는 결국 유럽을 장악한 독일과 유라시아의 패자 소련, 그리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우리 미국으로 천하 삼분지계가 될 터.
그렇기에 미국은 일본과의 문제 이전에 자신들의 영향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소련이 태평양까지 진출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다.
“···그러니 지금은 독일놈들에게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유럽 전선을 정리하고 태평양에 집중해야만 하오. 어려운 일을 맡기게 되어 미안하오만, 헐 장관께서 힘써주시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2차 회담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루즈벨트의 결단에, 헐 외무장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사실, 독일과의 강화 협상은 그리 걱정할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비록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지배적인 지위를 인정하고, 지금 연합군이 점령한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이탈리아 식민지들을 모두 돌려줘야겠지만 독일 측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지는 않을 터였으니까.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해야 소련보다 먼저 일본을 점령하고 동북아를 확보할 것인가였다.
“좋소. 그럼 킹 제독, 그리고 마셜 대장. 두 사람 모두 기탄없이 확실하게 답해주시오. 만약 유럽 전선을 정리하고 태평양에 전력을 집중시키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까지 얼마나 걸리겠소?”
그런 루즈벨트의 물음에,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각하. 지금 영국과 북아프리카에서 대기 중인 병력을 당장 수송하기 시작한다고 해도 태평양에 재배치하기까지는 최소 한 달 이상 걸릴 겁니다.”
“저도 마셜 장군과 같은 생각입니다. 게다가, 지금 당장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를 거쳐야 하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예. 정 서두르시고자 한다면 필리핀 루손 섬과 이오지마 공략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일본 본토에 도달하는 것은 빨라 봐야 내년 이후일 겁니다.”
“···내년이라.”
그런 두 사람의 설명에, 루즈벨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록 소련놈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저들이 점령할 수 있는 것은 딱 조선 반도까지일 뿐, 일본 열도는 노리지 못할 겁니다.”
“···그건 어째서요?”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바다를 건너 대군을 실어나를 방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미 해군에게 탈탈 털리며 약체화된 일본 제국 해군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차대전 당시의 구형 함정들로 이루어진 소련의 태평양 함대에 지지는 않을 터.
게다가 첩보에 따르면 현재 일본 열도는 해안 요새를 증축하며 방비를 강화하고 있으니 소련군이 쉽게 일본에 상륙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킹 제독의 설명이었다.
“···그렇군.”
“최악의 경우에는 사할린 섬과 쿠릴 제도를 통해 삿포로까지는 갈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마저도 그리 쉽지 않을뿐더러 조선반도까지 점령하고 나서야 시도할만한 일입니다.”
“그럼 킹 제독의 말씀은 당장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오?”
“그간 아닙니다만, 그래도 수개월 정도는 우리에게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영토도, 저희가 일본 열도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낸다면 전후 점령지 문제를 논할 때 소련 측에게 할양을 요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흠.”
그 정도라면, 지금부터 태평양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면 어떻게든 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마셜 장군의 말대로 소련에게 강하게 요청하면 랜드리스로 미국에게 막대한 빚을 진데다가 지난 전쟁으로 빈곤해진 소련놈들이 감히 거절하진 못할 터.
“알겠소. 그럼 독일과의 전쟁을 정리하고, 일본을 수개월 내에 끝장내는 것으로 하지. 그럼, 장군들께서는 이에 대한 방책을 마련해보시오.”
그렇게 루즈벨트가 회의를 끝내려고 할 때, 마셜이 갑자기 다른 말을 꺼냈다.
“그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각하. 괜찮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각하께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오?”
“미 육군항공대 소속, 커티스 르메이 준장입니다. 작년부터 유럽 전선에서 전략폭격을 지휘하며 고속 승진해, 현재는 최연소 소장이 된 친구입니다.”
“흥미롭군. 한번 불러보시오.”
그러자 잠시 뒤, 어깨의 견장에 별 두 개를 단 남자 하나가 집무실로 들어와 절도있게 경례를 올렸다.
그러나 소장이라는 상당히 높은 계급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얼굴은 중년이나 심지어 청년으로도 보일법한 모습이었다.
“···소장이라 들었는데, 의외로 상당히 젊어 보이는군.”
“예, 각하. 올해 초, 37살에 소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최연소라고 듣기는 했지만, 설마 마흔조차 되지 않은 나이에 장성 계급장을 달 줄이야.
루즈벨트는 그런 르메이의 모습에 내심 깜짝 놀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전시이니만큼 이런 쾌속 진급 사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데다가, 이렇게 빨리 진급했다는 것은 그만큼 유능하다는 뜻일 테니까.
“그래. 자네가 나를 만나고자 했다고 들었네만, 무슨 일인가?”
“예! 저희 육군 항공대 전략 사령부에서 일본 열도 공격 계획을 한번 작성해 보았습니다. 이에 대통령 각하께서 한번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어려울 것도 없지. 좋소. 한번 보여주시오.”
루즈벨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두툼한 서류 뭉치를 하나 내밀었다.
그 서류의 제일 첫 장에는 이런 제목이 크게 적혀있었다.
Operation Downfall (몰락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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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무렵, 베를린 빌헬름가 85번지에 위치한 외무성 관저에서는 리벤트로프 장관이 한 남자를 응대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원수 각하. 각하께서 저를 찾아오시다니 별일이군요.”
“···그러게 말이오. 갑작스레 방문해서 미안하게 되었소.”
“하하, 아닙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각하를 한번 만나 뵙고 싶었던 참이었거든요.”
리벤트로프 장관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육군 원수를 바라보았다.
사실 오늘 그가 방문한 것은 리벤트로프에게도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리벤트로프 장관은 파울루스 원수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곧 있을 미국과의 회담 때문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이겠지.’
그가 이렇게 짐작한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하면, 파울루스 원수가 참가했던 지난번 회담 이후로 자신을 대하는 미국 대사의 대답이나 태도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회담에서 자신들이 주고받은 담화는 특별할 것이 전혀 없었으니, 미국 측이 변화를 보인 이유는 아마 파울루스 원수의 말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미국과의 2차 회담을 앞둔 지금, 그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 것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한 것이겠지.
그렇게 리벤트로프 장관이 기대와 흥미가 가득한 눈빛으로 파울루스 원수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장관님께서는 내가 왜 왔는지 대강 짐작하시는 모양이구려.”
“하하하, 외교관을 하려면 이 정도 눈치는 당연히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파울루스 원수께 매우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나에게?”
“예. 이런 말을 하면 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장군님들은 모두 전쟁과 정복만을 생각하시니 말입니다. 각하처럼 국제정세를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되지요.
해서, 미국과의 이번 2차 회담에 대해서도 각하의 고견을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리벤트로프가 유려한 언변으로 대화를 유도하자, 파울루스 원수도 마음이 동했는지 입을 열었다.
“하하, 역시 장관님은 못 당하겠구려. 좋소, 내 짧은 생각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말씀해드리겠소.”
“경청하겠습니다.”
과연 파울루스 원수는 어떤 신묘한 계책으로 미국놈들을 구워삶은 것일까.
그렇게 긴장하며 귀를 기울이는 리벤트로프를 향해 파울루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장관님께서는 원자폭탄에 대해 들어보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