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결전 (4)
잠시 시간을 되돌려, 1944년 9월 1일.
독일과 소련이 평화 협상을 체결하고 양국이 모두 군대를 철수, 이동시키기에 여념이 없던 바로 그 무렵.
소비에트 연방의 중심,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에서는 한 남자가 비밀리에 스탈린 서기장을 알현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게오르기 주코프.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직에 앉아서 독소 전쟁을 총괄 지휘하던 남자였다.
“오랜만이구려, 주코프 대장. 그간 잘 지내셨소?”
“···예, 서기장 동지의 배려 덕분에 편안히 잘 쉬었습니다.”
여전히 속뜻을 알 수 없는 서기장의 물음에 주코프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조심스레 답했다.
그러나 그가 딱히 아첨하려고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이 그를 시베리아 군관구 총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좌천시켜준 덕분에 그동안 한가하게 지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뭐, 엄밀히 말하자면 휴양보다는 유배에 가까운 생활이긴 했지만 말이지.’
그러나 서기장은 그런 주코프의 뼈있는 대답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답했다.
“그렇소? 아무쪼록 잘 지냈다니 정말 다행이구려.”
“···예, 감사합니다.”
“아무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주코프 동지도 독일과의 강화 소식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하오.”
“물론입니다.”
“그럼, 강화 조약 이면의 숨겨진 거래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오?”
‘···숨겨진 거래?’
주코프는 서기장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스탈린은 대충 사정을 짐작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처음 듣는 모양이군. 그럼 잠시 간략하게 설명하지. 우리는 독소 전쟁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해 각자 후방의 적을 상대하기로 약속했소.”
그런 스탈린의 말에 주코프는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아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일단, 동부전선에서 각자 병력을 차출하기로 한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조약으로 전쟁을 끝냈다고는 해도, 어제까지 싸우던 적을 눈앞에 두고서 바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저 어마어마한 대군을 국경선에 배치해놓을 수도 없으니, 양쪽 모두 동시에 병력을 빼내기로 약조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후방의 적을 상대한다는 말은 속임수로 후방에 병력을 숨겨놓았다가 다시 투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 텐데.
독일군은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을 상대한다고 쳐도, 우리는 도대체 누구랑 싸운단 말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주코프는 이내 한 국가를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일본입니까?”
“역시 이해가 빠르시구려. 그렇소, 우리는 극동으로 병력을 보내 만주와 조선, 그리고 가능하다면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작정이오.
나는 이 임무를 주코프 동지가 맡아주었으면 좋겠소.”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주코프는 그제서야 서기장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할힌골 전투의 영웅으로 유명한 주코프를 극동 군관구 총사령관으로 임명해서 일본군을 제압하도록 하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만약 약해빠진 일본군을 무찌르고 극동의 영토를 넓히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주코프 외에 다른 누구를 보내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스탈린은 왜 굳이 한번 좌천시켰던 그를 다시 불러내어서 이렇게 기회를 준단 말인가?
‘···혹시 이 임무 자체가 모종의 함정인 것인가? 그게 아니면 완전히 극동으로 보내버려서 두 번 다시 모스크바에 발을 딛지 못하게 만들 작정인 건가.’
그렇게 주코프가 한참 동안 대답을 망설이고 있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탈린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주코프 동지. 동지는 지금 소련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 뜬금없는 물음에 잠시 당황하던 주코프는 결국 이런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소비에트 연방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곧 그가 맞서 싸우게 될 일본은 얼마 전까지 소련과 중립관계이긴 했지만, 그래도 독일의 추축국 동맹이었으니 적이라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그리고 미국도 얼마 전까지 소련과 연합국 동맹이긴 했지만, 이미 그 관계는 파탄 난 데다가 본질적으로도 저들은 자본주의 국가이니 소련의 적성국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주코프의 대답에 스탈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틀렸소. 일본은 우리의 적이지만, 미국은 우리의 적이 아니오.”
“하지만, 독일과의 강화 수립으로 인해서 영미 연합국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결렬된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저들이 곧바로 우리의 적이 되는 것은 아니지. 그럼 주코프 동지는 극동에서 부대를 지휘하다가 미군과 만나면 전투를 벌일 거요?”
“······아닙니다.”
“바로 그거요. 즉, 지금 우리 소련과 연합국의 관계는 적도 아군도 아닌 애매한 사이라는 거지.”
비록 소련은 더 이상 연합국의 일원이 아니지만, 일전에 저들로부터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계속 요구받아온 데다가 독일과도 싸워왔으니 명분은 충분할 터.
그렇다면 미국놈들이 태평양에서 일본 제국 해군과 피 터지게 싸울 동안 우리가 극동의 알짜배기 영토를 다 먹어도 저들은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애당초에 저들도 우리가 독일군 정예부대와 피 흘리며 싸우는 동안 바다 건너편에서 손가락 빨며 구경한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동지는 저놈들이 오기 전에 일본군을 섬멸하고 만주와 조선을 확보해놓으시오. 일본이 몰락하고 태평양 전쟁이 끝나면, 그다음에는 극동이 우리 소련과 미국의 최전선이 될 테니까 말이오.”
그런 스탈린의 말에, 주코프는 그제서야 그가 자신을 극동으로 보내려 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극동으로 가서 전후 미국의 확장을 견제하라는 것인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대로 시베리아 군관구 총사령관을 계속 맡아봤자, 기껏해야 후방에서 한직만 맴돌다가 전역할 뿐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주코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례를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좋소. 현 시간부로 주코프 동지를 극동 군관구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40개 사단을 극동 군관구로 이전하도록 허가하겠소. 이에 대해서는 바실렙스키 동지와 논의하시오.”
“감사합니다, 동지!”
그리하여 정식으로 극동 군관구 총사령관으로 취임한 주코프는 일주일 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뒤인 1944년 11월 7일.
극동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워싱턴 D.C.의 백악관에 전해졌다.
그것은 바로, 만주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 관동군 60만 명이 소련군에 의해 전멸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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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지금 뭐라고 하셨소? 소련군이 관동군을 전멸시켰다고?”
“예. 아직 완전히 확인된 것은 아니나, 소련군이 하얼빈과 송화강 일대까지 확보했다는 보고로 미루어보아, 관동군은 이미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단됩니다.”
“빌어먹을··· 아주 노골적으로 밀고 내려오는군. 이제 우리와는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건가.”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사실 루즈벨트는 소련이 독일과 강화를 맺고 일본에 선전 포고했을 때까지만 해도 설마 저들이 정말로 일본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이 그런 발표를 한 것은 독일을 의식해서 취한 행동일 뿐,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정이 어려운 소련이 또다시 전쟁을 시작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안 그래도 멋대로 독일과 강화하며 우리 미국을 배신한 소련이 다시 한번 우리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거기에 한 몫을 더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루즈벨트의 믿음을 배신하듯이 즉각 100만 대군을 움직여 관동군을 전멸시켜버렸고, 이제는 만주와 조선반도를 향해서 남하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군은 현재 어디까지 도달한 상태요?”
“일단 저희의 추측에 따르면 늦어도 이번 주 내로 장춘시와 선양시까지는 도달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음 달이면 조선반도까지 손에 넣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우리 미군 병사들은 지금 어디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소?”
“···현재 필리핀의 루손 섬에서 상륙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 마셜의 대답에, 루즈벨트는 세계지도를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아직도 필리핀에 묶여있는 건가···.’
필리핀에서 일본 본토까지의 거리는 일직선으로 계산해도 최소 1600km가 넘는다.
게다가, 어떻게 필리핀을 점령한다고 해도 곧바로 일본으로 진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필리핀과 일본 사이에 있는 무수히 많은 섬들이 모두 방어 진지처럼 무장되어 근방을 지나가는 함선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우회할 수 있는 것은 우회한다고 쳐도 비행장이 있는 섬들은 상륙해서 점령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는 대규모 상륙 작전을 펼쳐야 할 터.
그럼 이 모든 요새 섬들을 정복하고 일본 본토에 도달했을 때는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때쯤, 이미 만주에 도달한 소련군은 과연 어디까지 내려와 있을 것인가.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 미군보다 저 소련군 놈들이 먼저 일본 본토에 상륙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것은 루즈벨트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미국에게 있어서 일본은 진주만 공습이라는 희대의 악행을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독일과의 전쟁조차 수렁에 빠져버린 지금, 일본조차도 확실하게 끝내지 못하고 우리를 배신한 소련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긴다면 과연 미국의 시민들이 그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루즈벨트는 다음 대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전후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게 만큼은 반드시 직접 항복 선언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루즈벨트는 한숨을 내쉬며 마셜에게 물었다.
“그럼 현재 유럽 전선은 어찌 되었소? 아군 부대는 잘 버티고 있소?”
“그게, 영국군의 패퇴 이후로 전황이 조금 어렵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마셜의 대답에, 루즈벨트는 결단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군. 승산이 없다면 유럽 전선은 일단 철수하도록 지시하시오. 지금은 무엇보다 태평양에 전력을 집중해야 할 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