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맨해튼 프로젝트 (2)
1944년 10월 20일.
미국, 뉴욕시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교의 중앙 체육관.
현재 이 건물은 전시 물자보관이라는 명목하에 헌병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서며 일반인의 입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엔리코 페르미 박사는 당당하게 중앙 체육관으로 걸어가 헌병 장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나 연구 책임자인 엔리코 페르미 박사요. 길을 열어주시오.”
“예,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고생하시오.”
그렇게 병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체육관으로 입장한 페르미 박사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라켓볼 코트로 향했다.
페르미 박사가 코트의 관객석에 도착하자, 그곳에 먼저 모여있던 수많은 연구자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소장님 오셨습니까. 마침 실험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좀 어떤가?”
“···죄송합니다.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보아, 아마도 실패인 것 같습니다.”
“후··· 그런가. 역시 쉽지 않구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될 때까지 계속 해보는 수밖에.”
“예! 바로 다음 실험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동료 연구원의 말에, 페르미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라켓볼 코트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벽돌을 쌓아 올려서 만든 높이 7m의 블록 형상에 양옆으로 무수히 많은 파이프 관이 연결된 바로 그것.
그 기괴한 물체의 정체는 바로 페르미 박사가 만들어낸 세계 최초의 원자로, 코드 네임 시카고 파일 1호였다.
‘후··· 어떻게든 원자로를 완성해낸 것까지는 좋은데 그다음이 문제로군.’
분명 그의 가설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틀렸더라면, 지금까지 원자로를 만들어내지조차 못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인 그로브스 소장의 말에 따르면 유럽 전선의 전황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었지.
게다가 또 다른 말로는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그럼 우리도 최소한 3개월 안에는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할 텐데, 그것이 정말 가능하겠는가.
‘곤란하군. 하다못해 6개월 정도라도 여유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라켓볼 코트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에 깜짝 놀란 페르미 박사가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서서 연구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비록 총을 겨누지는 않았지만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군인들의 모습에 모두가 침묵에 잠긴 바로 그 순간, 페르미 박사는 용기를 내어 한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여기는 특급 기밀 연구구역이오.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총을 반입하는 것은 위험하오. 모두 물러나 주시오.”
그러자 군인들 사이에서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 나오며 그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들. 연구는 잠시 중단하시고 일단 저희를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그게 도채체 무슨 소리요? 우리의 프로젝트를 중단하라니? 총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을 불러주시오!”
그런 페르미 박사의 외침에, 양복의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 페르미 박사님.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나본데, 지금 그 그로브스 소장도 저희 쪽에서 취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희도 가급적이면 거친 수단은 쓰고 싶지 않으니, 협조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결국, 페르미 박사와 연구자들은 병사들의 철저한 감시하에 원자로를 정지시키고 라켓볼 코트를 폐쇄했다.
그리고 그들의 차량으로 연행된 페르미 박사는 점점 멀어져 가는 체육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맨해튼 프로젝트는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
그 무렵, 강화 협상을 끝마치고 돌아온 나는 곧바로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서부 전구 총사령부에 와 있었다.
“어서 오시오, 파울루스 원수. 기다리고 있었소.”
“예,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롬멜 원수와 모델 상급대장도 와 계셨군요.”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은 나는 먼저 와 있었던 롬멜, 모델 장군과도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뒤, 당번병이 커피를 내오자 서부 전구 총사령관, 클루게 원수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원수께서 직접 스웨덴까지 갔었다고 들었소만, 강화 협상이 잘 안 풀려서 안타깝게 되었소.”
“예, 결국 미국놈들의 사인을 받아내려면 연합군을 전부 몰아내야 한다는 것만 재확인하고 왔습니다.”
“하하하, 결국 전쟁은 우리 군인들의 손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법이지.”
클루게 원수는 자신들 서부전선군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강화 협상이 결렬된 것에 대해서 제법 기쁜 기색이었다.
그러나 사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회담은 대성공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지금쯤 미국은 존재하지도 않는 첩자를 잡기 위해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중단했을 것이고, 게다가 우리의 원자폭탄을 의식해서 강화를 적극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을 테니까.
‘어차피 서부전선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이제는 V-2를 날려서 런던을 압박하고, 원자폭탄에 대한 역정보를 조금 흘리기만 해도 미국으로서는 전쟁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나는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저들이 백기를 들어 올릴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이긴 전쟁이라면, 최대한 적을 몰아붙여서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저들도 더 빨리,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기대감에 가득 찬 클루게 원수의 표정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슬슬 서부전선도 끝을 봐야지요. 그럼 현재 전선의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뭐, 까놓고 말하자면 사실 다 이긴 것이나 다름없소. 자세한 것은 지도를 보면서 설명드리지.”
클루게 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전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연합군은 코탕탱 반도를 중심으로 아브랑슈부터 생로, 그리고 오마하 해변까지 장악하고 있소. 그리고 이들의 규모는 약 15~17개 사단 정도로 추정되는 상황이지.”
“최대 17개 사단이라··· 제 예상보다 훨씬 많군요. 그런데 저들의 보급로는 세르부르 항구뿐이지 않습니까?”
일전에도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세르부르 항구는 아군이 철저하게 파괴해놓은 덕분에 기껏해야 1개 야전군, 총 9개 사단 정도의 보급량을 소화하는 게 한계였다.
물론 원체 큰 항구인 만큼 그동안 수리와 보수를 했다면 조금 더 많은 물자를 적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 봤자 17개 사단의 보급을 실어나르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런데 저들은 어떻게 저만한 대군의 보급을 이렇게 장기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내 물음에, 클루게 원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이것 참 놀라운 일이오만, 아군 정찰 부대의 보고에 따르면 저들은 아무래도 항공 수송으로 부족분을 메우는 모양이오.”
“···항공 수송 말입니까.”
“그래. 세르부르 인근에 설치된 간이 활주로에 매일같이 대형 수송기가 드나든다는 모양이더군. 어쨌든, 보급문제로 저들을 압박하는 것은 조금 어려울 거요.”
회귀 전, 독일군의 몰락을 앞당겼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사례처럼 1개 야전군 규모의 보급을 항공 수송으로 지탱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없는 자원을 쥐어 짜내서 날려 보냈던 우리 독일과는 다르게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 미친 짓을 지속할 수 있는 나라였다.
게다가, 지금까지 저렇게 버티고 있다는 것만 봐도 연합군은 프랑스에서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군. 물러나지 않겠다면 직접 밀어내는 수밖에.’
“좋습니다. 그럼 동부전선의 병력은 얼마나 재배치되었습니까?”
그런 내 물음에 답한 것은 재배치된 부대들을 통괄 지휘하는 B 집단군 사령관, 모델 상급대장이었다.
“현재까지 2개 야전군, 총 40만 정도가 재배치되었습니다. 다만, 그 전에 영국군이 패퇴하여 전선이 축소되는 바람에 더 이상은 병력 수송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나는 모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과 같이 전선이 코탕탱 반도로 한정된 상황에서는 병력이 많아봤자 다 투입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뭐, 예비대를 확보한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도 2개 야전군이라면 충분할 테고 말이지.
그렇게 모든 정황 보고가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클루게 원수가 나에게 물었다.
“이걸로 참모총장께서도 대강의 사정은 파악하셨으리라 생각되오만. 그래서, 원수께서는 이번 공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흠···.”
클루게 원수의 물음에, 나는 잠시 작전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전선의 상황은 올해 6월, 미 1군이 코탕탱 반도 윗부분에서 포위되었을 때와 거의 유사한 양상이었다.
다만 다른 부분이라면, 르세부터 코랑탕까지였던 전선이 아브랑슈에서 생로, 오마하까지로 확대된 것과 8개 사단이었던 미군이 17개 사단으로 늘어난 것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늘어난 전선과 적의 수만큼 아군의 병력도 대거 늘어났으니 전체적인 형세는 그리 다르지 않을 터.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처럼 방어선 돌파를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작전을 계획할 것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정석적으로 정면에서 들어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정면에서? 그럼 기갑부대를 앞세워서 방어선을 돌파하자는 말인가?”
“흠··· 그랬다간 지난 6월처럼 지형지물에 진격이 막혀서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내 말에 롬멜과 모델은 지금까지 아군의 특기였던 전격전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하긴, 지난번에도 노르망디 지역 특유의 보카쥬 지형 때문에 기갑부대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으니 저들이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하지만 이번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면전은 전차를 앞세워 돌파하는 전통적인 전격전이 아니었다.
“하하, 제 말뜻은 그게 아닙니다. 지금 장군들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제까지 아군은 전격전을 통해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승리를 거둬왔습니다.”
“···그렇지. 그게 최선이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지금 서부전선에서, 아군은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 우세의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효율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내 말에, 장군들은 할 말을 잃고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이 말을 이었다.
“···설마.”
“예, 맞습니다. 대규모 전력을 투입해서 압도적인 물량으로 적들을 몰아내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