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독일, 그리고 일본
1944년 8월 20일.
독일과 소련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 포고를 해버린 지 며칠이 지났을 바로 그 무렵.
지구 반대편, 워싱턴 D. C.의 백악관에서는 연일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각료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소?”
“······.”
루즈벨트 대통령의 한숨 섞인 물음에 코델 헐 국무장관과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셜 대장은 침음을 삼켰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니···.
그것은 무엇에 대한 질문인가?
소련의 배신에 대해서? 혹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것에 대해? 그것도 아니면 독일과의 전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전부 다겠지.’
그러나 일개 군인에 불과한 마셜은 루즈벨트의 물음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각하의 결단에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마셜이 침묵하고 있자, 헐 국무장관이 입을 열었다.
“각하, 일단 소련 쪽의 문제는 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잊으라고? 장관, 지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설마 소련이 우리에게 한 짓을 눈감으란 말씀이시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동안 미국은 소련의 손아귀에 놀아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초기부터 소련에 대한 랜드리스 원조 물자를 아낌없이 보내주었고, 그들의 요구대로 북아프리카와 서유럽에 상륙해서 독일군과 싸워왔다.
그런데 이렇게 막대한 피를 흘려가며 서유럽에 발을 내딛자마자 자신들은 전쟁에서 빠져버리고, 이제 와서는 다 끝난 거나 다름없는 태평양 전쟁에 숟가락을 얹으려 하다니.
그동안 친 소련 인사라는 공화당의 비난을 묵묵히 감내하면서도 소련에 대한 도의와 협력을 계속 이어나갔던 루즈벨트에게 있어서 소련의 이번 행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저들이 강화 협상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협정을 맺어버린 것만 봐도 소련의 배신은 훨씬 이전부터 계획해왔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이런 난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헐은 냉정하게 답했다.
“물론 소련의 배반 행위는 외교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련을 상대할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이미 일본과 독일이라는 지구 반대편의 양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습니까.”
“···후, 그건 그렇지.”
헐 국무장관의 말에, 루즈벨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현재 미국은 태평양 건너편과 대서양 건너편으로 국력을 끊임없이 투사하며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전쟁들은 어느 쪽도 결코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이라는 희대의 참극을 벌인 만큼 반드시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야만 했고, 독일은 유럽 대륙이 반미국적인 세력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쓰러트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소련까지 적으로 돌린다면··· 그때는 미국의 국력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닥치게 되리라.
“···어쩔 수 없군. 그럼 소련에 대한 문제는 눈앞의 전쟁을 끝낸 뒤로 미루도록 하지.”
“예, 일본과 독일 쪽의 문제가 정리되기만 하면 소련놈들에게 얼마든지 대가를 청구할 수 있을 겁니다.”
“단, 태평양 전쟁에 소련이 숟가락을 얻는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놈들보다 먼저 일본을 점령해야 하오. 마셜 참모총장, 가능하겠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소련과 일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루즈벨트는 고개를 돌려 마셜을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으로··· 결국 문제는 독일이오만. 유럽 쪽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소? 처칠의 말대로 독일군이 몰려오기 전에 파리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소?”
“아직 확언 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저희의 예상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난 한 달간, 독일과 소련이 협상을 이어나가는 동안 영미 연합군도 결코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미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해 생로와 푸제흐, 그리고 렌 외곽까지 전역을 확대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그동안 전력을 회복한 영 1군도 다시 참전하면서 영미 연합군은 총 22개 사단을 투입한 상태였다.
“현재 아군이 확보한 생 말로와 세르부르 항구로는 이 정도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한계입니다만, 영국군이 생 브리외 항구를 확보하면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브르타뉴 반도를 포위하고 반도의 독일군을 섬멸한다면, 설령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몰려온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아군을 몰아낼 수 없을 겁니다.”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는 알 수 없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현재 위치를 사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잘하면 파리를 해방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서부전선이 장기화된다면, 등 뒤의 소련도 견제해야 하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끼고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프랑스를 다시 부활시켜서 유럽 대륙에 대한 독일의 지배력을 견제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런 마셜과 헐의 설명에, 루즈벨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소. 비록 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상황을 비관해 지레 포기해선 안 되는 법이지. 계속해서 힘써 주시오.”
“알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각하. 그럼 저희의 대 추축국 전략은 그대로 독일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
그렇게 각료 회의를 끝마치려던 루즈벨트는 이어지는 마셜 참모총장의 물음에 다시 고민에 잠겼다.
기존에 영미 연합군의 전략목표는 일본보다 독일을 먼저 쓰러트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대독일 전선에서 발 빼고 갑자기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독일에게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동시에 다 이긴 것이나 다름없던 태평양 전쟁도 서둘러 끝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부전선에 있는 독일군이 서부전선까지 오려면 최소한 수개월은 걸릴 테고, 마셜의 말대로 어차피 독일을 협상장에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유럽 쪽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미국의 입장에서는 유럽의 독일을 견제하는 것보다 극동의 영토 확장을 노리는 소련놈들을 견제하는 편이 훨씬 더 급선무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극동이나 일본 열도에서 소련놈들과 국경을 맞대고 힘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루즈벨트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은 유럽보다 태평양을 더 우선시하겠소.”
“각하! 그 말씀은···.”
“마셜 장군, 이미 3개 야전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마당에 유럽 쪽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소? 그것보다는 소련과의 도쿄 레이스에서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소만.”
“···그건 그렇습니다만. 유럽 쪽도 아직 안심할 수준은 아닙니다. 독일군이 오기 전에 브르타뉴 반도를 점령하지 못한다면 아군이 밀려날지도 모릅니다.”
“흠···.”
그런 마셜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루즈벨트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지난번에 보고받았던 신형 중전차를 유럽 전선에 한번 투입해보면 어떻겠소?”
*****
1944년 9월 1일.
브르타뉴 반도의 항구 도시, 생 브리외에 배치된 235번 판터 전차장 호프링겔 중사는 페리스코프 너머로 몰려오는 연합군 전차들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들, 매번 당하면서 이번에도 똑같은 길로 들어오는군.”
현재 적들이 들어오는 길목과 그의 전차와의 거리는 약 1200m.
연합군의 주력 전차인 M4 셔먼으로는 이 거리에서 결코 판터의 정면 장갑을 관통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저들이 판터를 격파할 방법은 몰래 우회하거나 포격을 견디며 돌파해서 측면을 잡는 것뿐인데, 이 근방의 지형상 그것도 어려울 터였다.
“좋아, 오늘도 공습만 좀 신경 쓰면 되겠군. 보어만, 일단 제일 앞에 있는 놈부터 멈춰 세워라.”
“예!”
간단히 지시를 내린 호프링겔 중사는, 팔짱을 낀 채 스코프 너머로 적 전차들을 주시하며 느긋하게 전황을 관망했다.
원래라면 거리나 위치, 탄종 등 좀 더 세세한 지시를 내렸을 테지만, 며칠째 이 자리에서 셔먼을 십여대나 격파했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이제 곧 눈앞에 보이는 저 전차도 정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연기를 뿜어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호프링겔 중사가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캉!
“뭐야! 무슨 일이야!”
“도, 도탄··· 되었습니다.”
“뭐? 보어만, 집중해서 똑바로 쏴라!”
“아, 아닙니다! 정말로 제대로 맞췄습니다!”
판터의 70구경장 75mm 주포로 제대로 맞췄는데도 도탄되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셔먼 따위는 제대로 맞추기만 하면 어디에 맞든 간에 무조건 관통될 터.
분명 보어만이 방심하고 대충 조준하는 바람에 빗맞은 것이리라.
“···일단 확인해보지. 한스, 차탄 장전! 보어만, 너도 조준을 수정해라.”
“예!”
호프링겔 중사는 쌍안경을 들고 해치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적 전차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사의 예상과는 다르게, 쌍안경 너머로 바라본 전차의 전면 장갑에는 선명한 도탄 흔적이 나 있었다.
‘정말 제대로 맞췄는데도 도탄 되었다고? 아니, 잠깐. 저 녀석, 셔먼과는 다르다!’
넓고 납작한 차체, 그리고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실루엣까지.
그것은 셔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부전선에서 보았던 JS-2와 가까운 형상이었다.
‘···설마, 연합군 놈들이 소련으로부터 JS-2를 공여받은 것인가? 아니, 지금은 그런 것을 고민해봐야 소용없지. 일단은 어떻게든 격파하는 수밖에.’
JS-2 혹은 신형 중전차라면 어디를 노려야 하는가.
우선 차체 정면 장갑은 도탄 되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포탑을? 아니, 포탑에는 포방패가 있으니 더 튼튼할 터. 그렇다면···.
“철갑탄 장전 완료했습니다!”
“전차장님, 어서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기관총이다! 기관총구를 노려라!”
“예!”
콰앙!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호프링겔 중사의 235번 판터를 덮쳤다.
판터와 티거와도 정면에서 맞상대할 수 있는 연합군의 신형 중전차, M26 퍼싱이 전선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