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동상이몽 (3)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전화기 소리에 루즈벨트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뭐지? 오늘 전화 올 곳이 남아있었던가?’
바로 그때, 비서실장이 다급하게 집무실의 문을 노크하며 들어왔다.
“갑작스레 죄송합니다, 각하. 지금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자네인가? 마침 잘 왔네.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이건 어디서 걸려온 건가?”
“그게··· 처칠 총리께서 지금 당장 각하와 통화를 해야겠다고 우겨대서 말입니다.”
“···아아. 처칠, 그 양반인가.”
상대가 처칠이라는 말에, 루즈벨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선약도 없이 갑자기 전화를 거는 것은 외교적으로 무례에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처칠의 성격과 현재 영국이 처한 입장을 생각하면 비서실장도 함부로 거절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알겠네. 내 받아볼 테니, 자네는 나가서 기다리게나.”
“알겠습니다.”
루즈벨트의 대답에 비서실장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방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루즈벨트는 살짝 심호흡을 하며 아직까지도 시끄럽게 울고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드디어 받으셨구만. 나 윈스턴 처칠이오.”
“지난번 회담 이후로 처음이군요, 총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뭐, 피차 피곤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소련이 독일놈들과 강화 협상을 재개했다는 소식은 들으셨소?”
“예, 저희도 나름대로 보는 눈이 있는지라.”
사실 미국이 알아낸 것은 독일과 소련의 외무장관들이 스톡홀름에서 회담을 가졌다는 뻔한 정보뿐이었지만, 루즈벨트는 내색하지 않고 당당하게 답했다.
그러나 영국 측은 뭔가 더 깊은 첩보를 알아낸 모양인지, 처칠은 평소의 호전적인 태도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 그럼 얘기가 빠르겠구려. 아무래도, 독일과 소련의 강화 협상이 제법 잘 풀리고 있는 모양이오. 어쩌면 소련놈들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발을 뺄지도 모르겠구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이건 모스크바에서 바로 흘러나온 첩보이니 믿어도 좋소.”
확신에 가득 찬 처칠의 말에, 루즈벨트는 방금 돌아간 리트비노프 대사의 말을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소련놈들이 발을 뺄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기는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협상이 진행되어 있었을 줄이야. 그럼 오늘 대사가 했던 그 대답은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일부러 대답을 피한 거라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미국 측도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만약 연합군이 어영부영하고 있는 틈에 소련이 전쟁을 끝내버린다면, 지금 동부전선에서 저들이 상대하고 있는 300만의 독일군 정예부대가 모두 노르망디의 연합군을 향해서 달려올 테니까.
그럼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가장 좋은 건 역시 소련이 전쟁을 계속하도록 설득하는 거지만··· 스톡홀름에서 보란 듯이 당당하게 협상하는 꼴만 보더라도 저놈들은 이미 발을 뺄 작정인 게 틀림없다. 유럽을 석권한 독일을 견제하는 역할은 우리 연합군에게 떠넘겨버리고 말이야.’
그렇다면 이제 미국에게 남은 선택지는 소련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강화하느냐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기다리는 것은 결국 가시밭길뿐이었다.
만약 전쟁을 지속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독일과 국운을 건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이고, 전쟁을 포기한다면 유럽 대륙을 집어삼킨 초유의 패권국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봐야 할 테니까.
‘젠장할··· 어렵군. 도대체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그러나 고민에 빠진 루즈벨트와는 달리, 처칠의 대답은 확고했다.
“이보시오, 대통령 각하. 무엇을 그리 고민하시오? 소련놈들이 빠지든 말든 우리는 결국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지 않소이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총리님께서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독일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뭐, 원래의 계획대로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건 어려울지도 모르지. 하지만 유럽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줄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요. 독일에게 항복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유럽이 완전히 독일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막아보자는 거지.”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타협책을 제시하는 처칠의 주장에, 루즈벨트는 솔깃하며 귀를 기울였다.
“현재 우리 연합군은 15개 사단, 총합 30만의 병력을 상륙시킨 상태요. 여기서 브르타뉴 반도의 다른 항구까지 점령하면 최대 40개 사단 정도는 배치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독소 전쟁이 종결되면 동부전선에서 최소 100만 이상의 독일군이 서부전선으로 몰려올 겁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동부전선에서 코탕탱 반도까지의 거리는 무려 2300km요.
그러니 100만 대군이 그 먼 거리를 이동해서 서부전선에 재배치되려면 최소 수개월에서 최대 반년까지도 걸릴 거요.
그리고 그 말인즉슨, 그 사이에는 우리 연합군이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거지.”
최소 수개월에서 최대 반년이라.
그런 처칠의 말에 루즈벨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그 기간에도 독일군 병력은 계속해서 차례대로 전선에 도착할 테니 연합군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어쨌든 연합군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기회를 살려서 서부전선의 독일군을 몰아내고 파리를 해방하는 거지! 현재 코탕탱 반도에서 파리까지는 200km고, 파리에서 독일과의 국경까지는 대략 300km이니 파리를 탈환하면 독일 놈들도 우리를 만만히 보지 못할 거요.”
“그러면··· 프랑스의 친독 정권을 몰아내거나, 프랑스를 분할해서 반독 정부를 새로 수립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 그러면 유럽에서 독일의 영향력도 크게 감소하지 않겠소? 그리고 한 가지 더. 이건 일종의 보험 같은 거지만, 설령 파리를 해방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그 프로젝트만 성공한다면 독일놈들을 단번에 항복시킬 수도 있을 거요.”
그 프로젝트라···.
처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현재 미국, 영국, 캐나다가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원자 폭탄 개발 계획, 즉 맨해튼 프로젝트 얘기겠지.
사실 루즈벨트는 아직까지도 그 원자 폭탄이라는 것이 단 한발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믿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그만큼 강력한 폭탄을 개발해내면 전쟁이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아니면 정말로··· 과학자들의 말대로 단 한발로 국가 하나를 끝장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처칠의 파리 해방 계획이든, 아니면 맨해튼 프로젝트든 간에 어쨌든 소련이 발을 빼더라도 연합군에게 승산이 남아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포기하는 것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는 것이 미국의, 그리고 세계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리라.
그렇게 결심한 루즈벨트는 각오를 다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소. 우리 미국은 설령 소련이 발을 빼더라도 마지막까지 독일과 싸우겠소.”
*****
1944년 8월 15일.
리벤트로프 장관과 몰로토프 외무상이 스웨덴의 노르텔리에에서 처음으로 회담을 가진지 딱 1년이 지난 바로 이 날.
나와 룬트슈테트 원수는 동부전선의 최고 격전지 중 하나인 뱌지마의 한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참모총장님, 이쪽입니다.”
“고맙네. 각하, 먼저 들어가시지요. 곧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최고위직이라 할 수 있는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전선 시찰 따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독소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강화 협정 체결식에 참여해 서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협상을 주도한 것은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 그리고 그 뒤에 선 슈페어 총리와 스탈린이었기에 우리가 설 자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전쟁은 전쟁인지라 체결식에는 우리 군인들이 얼굴을 내비치게 된 것이었다.
나는 행사장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코니에 서서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번 협정을 위해서 양군 모두 병력을 철수 시킨 탓에 뱌지마 시내는 덩그러니 비어있었지만, 그래도 격전의 흔적마저 지우지는 못했는지 이 호텔을 제외하면 시내에 멀쩡한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강화 협정이라···. 이 빌어먹을 전쟁도 결국 끝이 나긴 나는군.’
강화 협상은 모두 외교부의 소관이었기에 어떤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인지는 나도 아직 듣지 못했지만, 이런 문제에 한해서는 나보다 저들이 더 잘 알 테니 손해를 보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독소 전쟁이 끝나면 남은 것은 서부전선의 연합군뿐이다.
비록 서부전선은 원래 역사와 너무 많이 달라진지라 내가 가진 지식을 활용할 수는 없겠지만, 동부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재배치하기만 해도 압도적인 물량으로 단숨에 몰아낼 수 있으리라.
‘뭐, 그 전에 일단 오늘 협정부터 잘 마무리 지어야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발코니에서 복도로 돌아와 다시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는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혹시, 독일군 참모총장이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 각하가 맞으십니까?”
“···그렇소만, 무슨 용무이시오?”
“죄송하지만 지금 저희 측에서 각하를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혹시 잠시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를 붙잡은 그 남자는 유창한 독일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소련 측 정부 관계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다 끝난 강화 협상에 마지막으로 서명만 하러 온 나에게 소련 측 인사가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좋게 거절하고 지나가려던 나는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각하를 찾으시는 분은 지금 당장이라도 강화 협상을 중단시킬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협박일까, 아니면 허세일까.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그런 결정권을 가진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후··· 좋소. 그럼 한번 안내해주시오.”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남자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행사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이런 곳에 정말 그가 있단 말인가.
내가 반신반의하며 문을 열어보자, 먼저 앉아 있던 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는군. 당신이 파울루스 원수요?”
차분하지만 선이 굵은 얼굴.
멋지게 끝이 말려 올라간 콧수염.
그리고 그런 평범한 인상과는 정반대로 안광이 흘러나오는듯한 강렬한 눈빛까지.
그는 바로 소비에트 연방의 대원수,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