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동상이몽 (2)
“도착했습니다, 장관님.”
“수고했네. 용무가 끝나면 다시 연락하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게나.”
“예, 알겠습니다.”
1944년 7월 15일.
독일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소련과의 강화 협상을 위해서 근 1년 만에 다시 스웨덴에 와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관님.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고맙소.”
하지만 1년 전의 회담과 오늘의 협상은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우선 소도시의 허름한 호텔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작년과는 다르게 오늘의 회담은 스톡홀름의 근사한 호텔에서 진행되었고, 소련 측의 요원들도 자신의 신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은 채 당당히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영미 연합군 측에서 이번 회담에 대해 알게 되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소련 측의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리라.
‘이 자식들··· 전황이 조금 유리하게 돌아가니까 아주 기세등등하게 구는구만. 이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라는 건가.’
그리고 그런 리벤트로프의 예상대로, 협상장에 먼저 도착해 있던 몰로토프 외무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하하, 리벤트로프 장관. 꽤 오랜만에 얼굴을 뵙는군. 어서 자리에 앉으시구려.”
“···몰로토프 외무상.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하지만 이런 홀대에도 불구하고 리벤트로프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리에 앉았다.
왜냐하면, 며칠 전 파울루스 원수가 말했던 대로 이번 강화 협상은 소련의 입장에서도 제법 중요한 자리일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 회담에서 우리가 조금 불리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소련도 마냥 아쉬울 것이 없는 건 아니다.
파울루스 원수의 말대로 연합군과 전후의 국제 관계를 걸고넘어지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리벤트로프 장관의 머릿속에 순간 파울루스 원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그저 전쟁밖에 모르는 천생 무인이라 생각했건만, 설마 이렇게까지 깊은 국제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사실 영미 연합군과 소련 간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리벤트로프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설마 지금까지 죽도록 싸웠던 우리 독일과의 전쟁을 포기하면서까지 저들을 경계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편견을 버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모두 파울루스 원수의 말대로였다.
이대로 우리와의 전쟁을 계속 지속하면 소련은 전쟁에서 이기든, 아니면 강화를 맺든 간에 결국 크게 쇠퇴한 채로 종전을 맞이해서 오랜 시간동안 국력을 회복하는 데에만 힘을 쏟을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그렇게 약해진 소련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앞세우는 영미가 가만히 놔둘 리 없겠지.’
그렇기에 소련은 영미와 자신들 사이에 우리 독일이라는 중간지대를 유지함으로써 3개의 세력권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할 셈일 터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소련의 입장을 역으로 이용해서 최대한의 이득을 취해야겠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몰로토프와 눈빛을 주고받던 리벤트로프는 싱긋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몰로토프 외무상. 그럼 슬슬 강화 협상을 시작해보실까요?”
“좋소이다. 그동안 제법 많이 대화를 나눴던 만큼, 기탄없이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소. 우리는 귀국과 강화를 맺는 대가로 국경을 오데사-민스크-리가 선으로 되돌릴 것을 원하오. 그리고, 핀란드에 배치된 독일군 부대도 모두 철수해주셔야겠소.”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거만하게 요구하는 몰로토프 외무상의 모습에 리벤트로프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감출 수 없었다.
발트해의 리가부터 흑해의 오데사까지라니.
이 정도면 사실상 독소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국경선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지금 독일이 아무리 급한 입장이라지만, 카프카스의 유전과 우크라이나의 흑토지대를 모두 포기하고 현재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물러나라는 이런 조건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하하··· 외무상님, 아무리 그래도 농이 지나치십니다. 이미 다 진 전쟁을 협상 한 번에 없었던 일로 하려고 하십니까?”
“흥! 그건 모르는 일이지. 지금 서부전선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연합군의 상륙을 막는 데 실패한 모양이던데, 이렇게 큰소리를 치셔도 괜찮겠소?”
역시나 몰로토프 외무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부전선을 지적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리벤트로프가 기다리던 바였다.
“예, 맞습니다. 막상 연합군 부대와 싸워보니 의외로 만만치가 않더군요. 소련군을 완전히 패퇴시켰던 저희 독일군도 물러나야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협상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영미와 먼저 강화를 맺고 전쟁을 끝낸 뒤, 소련과의 전쟁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저놈들이 그렇게 쉽게 전쟁을 포기하리라 생각하시오?”
사실 몰로토프 외무상의 말대로였다.
영미의 입장에서는 유럽 대륙 전체가 독일이라는 잠재적 적성국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본디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어찌 돌아갈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리벤트로프 장관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맞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영미와 우리가 손을 잡는 일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전시 상황인 만큼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신들이 영미를 배신하고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들이 배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영미 연합군이 먼저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인지, 계속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던 몰로토프의 인상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몰로토프의 변화를 지켜보던 리벤트로프는 내심 쾌감을 느끼며 쐐기를 박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외무상님. 우리 한번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사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연합군과 계속 싸워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런 조건이라면 저희도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흐음.”
몰로토프는 믿기 어렵다는 듯이 그를 쏘아보았지만, 리벤트로프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 리벤트로프의 말에 말려든 탓인지, 아니면 정곡을 찔린 탓인지 한참을 고민하던 몰로토프 외무상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 좋소, 그럼 당신네들 말이나 한번 들어보기로 하지. 그럼 독일 측이 원하는 새로운 국경선은 어디요?”
“연합군과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의 절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카프카스의 유전은··· 저희가 일정 기간동안 조차하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그 위쪽의 국경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남쪽에서 양보를 많이 한 만큼, 발트 3국 정도는 저희에게 주셨으면 좋겠군요.”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의 절반, 그리고 유전지대의 조차라.
생각보다 유한 리벤트로프의 제안에 몰로토프의 표정도 살짝 부드러워졌다.
비록 유전지대의 조차라는 부분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는 연합군과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필수적이니 서기장께서도 이해하실 것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카프카스와 크림반도를 확보했지 않은가.
물론 그 반대급부로 북쪽의 영토를 많이 양보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모스크바의 안전을 확보하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내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물이겠지. 이 다음은 내가 결정할 영역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한 몰로토프는 표정을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귀국의 입장과 제안하신 바는 잘 알겠소. 우선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고 검토한 뒤 다시 연락 드리겠소.”
“예, 잘 부탁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난 리벤트로프는 악수한 뒤 돌아서는 몰로토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빨리 강화 협상이 채결될 지도 모르겠군.’
*****
한편, 그 무렵 워싱턴 D.C.의 백악관에서는 한 남자가 루즈벨트 대통령과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주미 소련 대사, 리트비노프였다.
“이보시오, 리트비노프 대사.”
“예, 대통령 각하. 말씀하십시오.”
“내가 듣기로는 지난날 스톡홀름에서 독일과 소련의 외무상이 회담을 나누었다고 알고있소만, 이게 정말 사실이오?”
“죄송하지만, 각하.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이 없습니다.”
“만약 그 일이 사실이라면 이는 양국 간의 신뢰를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요. 확실하게 답해주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소이까. 그럼 이만 돌아가시오.”
“예, 실례했습니다.”
마치 고장난 라디오처럼 되돌아오는 무의미한 답변에, 루즈벨트는 손을 휘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렇게 대사가 물러난 뒤, 홀로 남겨진 루즈벨트는 방금 전 리트비노프 대사와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대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내색을 숨기기는 했지만, 그 반응만으로도 루즈벨트는 소련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로 대사가 아무것도 몰라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내 말에 무언가 외교적 수사로라도 대처를 보였을 터.
하지만 그런 대응마저도 전혀 없었다는 것은 역시 소련이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겠지.’
그리고 그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우리 연합군이 독일과 피 흘리며 싸우는 동안, 자신들만 발을 빼겠다는 생각일 터였다.
만약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면 우리 병사들이 생 말로 항구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선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굳이 독일과 협상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소련이 저런 식으로 나온다고 해도 미국이 당장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과 영국도 독일이 유럽 대륙을 장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전쟁을 시작한 만큼, 소련이 발을 빼더라도 냉큼 전쟁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유럽 대륙에는 미군 15개 사단이 상륙한 상태인 만큼, 전쟁을 포기한다면 저들도 다시 빼 와야 할 텐데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겠는가?
‘젠장할, 아마 영국놈들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싸우자고 할 텐데··· 우리 입장만 곤란하게 되었군.’
그렇게 루즈벨트가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