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1944년
1943년 12월 3일.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파 드 칼레.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는 행인들로 북적이던 이곳은 현재,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요새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서양 해안을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모래사장에는 상륙을 방해하기 위한 장애물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고, 거기서 조금 올라간 언덕 위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벙커와 육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대구경의 해안포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연합군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자원의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역사를 바꾸지 않으려면 설치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내가 벙커 위에 서서 바다 건너편의 영국과 해안가의 방어선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롬멜 장군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대서양 방벽을 직접 시찰해보신 소감이 어떻소? 이 정도면 충분하겠소?”
“예.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라 다행입니다.”
“하하. 이게 다 장군께서 건설 자재와 인력을 충분히 제공해 주신 덕분 아니겠소. 다만, 언제 연합군 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시간을 맞추지 못하게 될까 걱정될 뿐이지.”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날씨가 풀리기 전까지는 상륙을 감행하기 어려울뿐더러, 이곳의 방어구조물은 결국 파 드 칼레에 상륙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내 말에, 롬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긴, 파울루스 장군의 계획은 저놈들이 파 드 칼레를 포기하고 노르망디로 오도록 만드는 것이었지.”
“예, 그러니 노르망디 쪽의 방비도 신경을 써주셔야 합니다.”
“알고 있소. 안 그래도 파 드 칼레에 설치하기로 되어 있던 해안포 중 30% 정도는 노르망디에 설치해놓은 참이오. 그리고 전력배치도 장군의 뜻대로 파 드 칼레의 15군보다 노르망디의 7군 쪽으로 집중시켜 두었소.”
현재 서부전선군은 1군과 7군, 15군, 19군까지 총 4개 야전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서 비스케이 만과 접한 해안선을 담당하는 1군과 지중해와 접한 해안선을 담당하는 19군이 도합 18개 사단을 보유한 것을 제외하면, 서부 전선군의 거의 대부분이 영국과 접한 해안선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
그리고 그중에서도 고작 150여km밖에 되지 않는 노르망디 해안에는 무려 15개 사단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채 연합군의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제가 먼저 노르망디를 방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했었습니다만, 그래도 각하께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병력을 배치하실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내가 서부전선군의 병력 배치에 깜짝 놀라서 묻자, 롬멜 원수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하하, 어차피 모든 경우에 대비할 수 있는 완벽한 방어 태세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이오. 그렇다면 하나의 노림수라도 제대로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만에 하나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새롭게 배치된 항공대를 투입하면 대부분 막아낼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시오.”
사실, 원래 역사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연합군의 상륙보다도 더 골치 아픈 문제는 오히려 제공권의 상실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의 독일군은 동부전선과 지중해 전선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덕분에 루프트바페의 항공전력을 대거 서부전선으로 배치할 수 있었다.
‘하긴,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불상사만 피하면 어떻게든 연합군의 상륙부대를 저지할 수 있겠지.’
사실상 더미나 다름없는 파 드 칼레의 대서양 방벽과 기존의 역사보다 한층 강화된 노르망디의 방어선.
그리고 그 후방에 배치되어 있는 다수의 반격 부대와 루프트바페의 항공대까지.
이 정도면 서부전선의 방비는 충분하리라.
그렇게 판단한 나는 전선 시찰을 끝내기로 하고 자리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뒤, 파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롬멜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동부전선의 상황은 좀 어떻소?”
“동부전선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난번에 모델 장군이 반격작전을 멋지게 성공시켰다는 얘기는 들었소만,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서 말이오.”
동부전선이라.
하긴, 사실상 거의 다 끝난 전쟁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가장 많은 병력이 묶여있는 주요 전장인 만큼 롬멜 원수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뭐, 대략적인 부분은 각하께서 알고 계시는 것과 같을 겁니다.
저희가 레닌그라드에서 발을 뺀 이후로 남부에서 북부까지 대부분의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졌고, 그나마 모스크바 방면에서 간간이 국지전이 벌어지는 정도지요.”
“역시 그렇구려. 그럼, 소련과의 강화협상은 어떻게 되었소? 파울루스 장군의 말씀대로 소련놈들이 전쟁에서 빠져준다면 최소 100만 이상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을 텐데 말이오.”
“안타깝게도 소련놈들은 아직도 강화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성공해서 아군이 궁지에 몰릴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심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다면 더더욱 이번 상륙 작전을 철저히 분쇄해줘야겠구려.”
*****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드디어 1944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치 이제 상륙 작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듯이, 연합군의 전투기와 전폭기들도 더더욱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각하, 서부전선군 사령부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지난 1월과 2월간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서 프랑스 철도 체계의 약 15%가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15%라. 그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군. 그것보다 반격에 나선 루프트바페의 전력 손실은 어느 정도인가?”
“그게··· 제법 피해가 크긴 하지만 전력비 자체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 당장은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프랑스 철도 운송량의 15%가 끊어지고, 루프트바페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으며 연합군의 공습을 격퇴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이렇게 일견 암울해 보이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이는 디데이 당일 철도 수송의 40%가 마비되고 서부전선의 루프트바페 전력이 사실상 소멸해버렸던 이전의 역사에 비하면 놀라운 선방이었기 때문이다.
‘연합군 놈들에게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아군이 배치한 공군 전력이 늘어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제공권을 상실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겠군.’
그리고 그것보다도 고무적인 것은, 연합군이 원래의 역사와 같은 대응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음 보고입니다만, 해외방첩국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연합군이 4월에 파 드 칼레에서 상륙 작전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지 S. 패튼 중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1 집단군이 주공이라고 하던가?”
“···예, 맞습니다. 혹시 이미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아니, 아닐세. 어디 한번 줘보게.”
나는 작전 과장이 건넨 아프베어의 보고서를 조금 읽다가 내려놓았다.
‘이건··· 그냥 날짜만 바뀐 포티튜드 작전이로군.’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일부러 거짓 정보를 흘려서 혼란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1944년 7월에 파 드 칼레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흘렸었는데, 그것이 이번에는 5월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5월보다 한 달 빠른 4월에 노르망디에서 상륙 작전을 벌일 셈인 모양이로군.’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소련의 재촉 때문에 연합군이 상륙 작전을 서두르리라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4월은 너무 빠르다.
비록 계절상 봄이긴 해도, 바닷물에 뛰어들기에는 제법 추운 날씨일 텐데, 정말로 4월에 상륙 작전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연합군과 소련 사이의 입장 차이가 벌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젠장, 어느 쪽이 정답인지 모르겠군.’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연합군이 파 드 칼레에 상륙할 지 아니면 노르망디 해안으로 올 것인지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부전선군 사령부는 자신의 주장대로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으로 올 것이라 믿고 거기에 맞춰 모든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만에 하나라도 역사가 바뀌어서 놈들이 파 드 칼레에 상륙한다면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할 터였다.
‘후··· 제기랄, 상황이 애매하게 되었군.’
그렇게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책상 위에 놓인 서류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방금 전에 내가 던졌던 연합군의 포티튜드 작전에 대한 보고서였다.
‘···기만책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바로 수화기를 집어 들고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해외방첩국장, 카나리스 제독입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는군요, 파울루스 각하.”
“정말 오랜만입니다, 제독님. 오늘 올라온 보고서를 보고 연락 드렸습니다.”
“보고서라면··· 아, 상륙 작전에 관한 것 말씀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그 첩보,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 정보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깜짝 놀라서 되묻는 카나리스 제독에게, 나는 더더욱 놀랄만한 제안을 던졌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저희 쪽에서도 혹시 저놈들에게 역정보를 흘릴 수 있겠습니까?”
*****
그 무렵,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연합군 원정군 최고사령부.
“총사령관 각하, MI-6로부터의 보고입니다. 독일군의 무선통신을 감청해 부대 배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의외로군. 작년에 독일군이 에니그마를 폐기한 이후로 소식이 없더니, 다른 감청 방법을 찾아낸 건가?”
“그게, 이번에는 루프트바페의 무선 통신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였습니다.”
공군의 무선 통신을 감청해서 부대의 배치를 알아냈다니. 조금 뜻밖의 루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 무렵 독일군은 아직도 공군을 육군의 지원역할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이번 정보는 운이 좋아서 얻은 거라고 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젠하워는 MI-6의 보고서를 펼쳐보았다.
“노르망디 해안에는 총 8개 사단이, 파 드 칼레의 방어선에는 17개 사단이 배치되었다라. 하하, 아무래도 우리의 기만 작전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군.”
그 보고서에 적혀있는 서부전선군의 전력은 다 합쳐서 고작 45개 사단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