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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원수가 되었다-115화 (115/157)
  • 115화. 동상이몽

    1943년 10월 25일.

    소련군의 잇따른 공세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항공 보급을 불사하면서까지도 끝끝내 보구차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보구차르의 24사단이 버티는 동안 돌출부의 동쪽에서는 1기갑군을 필두로 한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이에 상황을 관망하던 남서 전선군 사령부는 뒤늦게 퇴각을 결정했다.

    그러나 코네프 상장의 이런 다급한 퇴각 명령은 일선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던 소련군 부대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그동안 남서 전선군 사령부는 보구차르 방면을 빠르게 정리하고 점진적으로 병력을 빼낼 생각이었기 때문에 퇴각에 대한 계획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이에 갑작스럽게 퇴각 명령을 받은 일선 부대들은 혼란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선군 사령부에서 퇴각 명령을 하달했다고? 그렇다는 것은, 사령부는 이미 이 전선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닌가!”

    “얼마 전, 64사단으로부터 대규모 독일군 기갑사단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왔었습니다. 그 때문에 돌출부의 상황이 많이 악화된 것 아니겠습니까.”

    “···젠장,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참모장 동지, 지금 당장 병력을 최대한 추슬러서 퇴각을 준비하시오. 여기서 지체했다간 전멸을 피할 수 없을 거요.”

    “예, 동지! 지금 당장 조치하겠습니다!”

    이러한 대화가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있는 대부분의 소련군 부대 사령부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렇게 모든 부대가 각자의 퇴각을 서두른 결과, 전선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대장 동지, 4중대로부터의 보고입니다. 현재 메쉬코프스카야 방면이 독일군에 의해 돌파당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483대대 놈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나!”

    “그게··· 이미 퇴각한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한발 늦었나.”

    지휘 체계가 무너지는 바람에 각지에서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수많은 부대가 맥없이 포위당했다.

    가도는 퇴각하는 부대의 차량과 병사들이 뒤섞여 혼란에 빠졌고, 가교를 사수하던 병사들은 제멋대로 다리를 끊고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졸전의 결과가 바로, 지금 주코프의 눈앞에 놓여 있는 이 보고서였다.

    ‘젠장, 어느 정도 피해가 발생하리라고 각오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당해버릴 줄이야···.’

    돈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카잔스카야 돌출부를 형성할 당시만 해도 보병 55만에 다수의 중전차를 포함한 기갑전력이 700여 대에 달하던 남서 전선군이 현재는 보병 17만에 전차 273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역시 6군과 5기갑군이었다.

    퇴각 직전, 보구차르의 24사단과 11군, 루마니아 3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던 6군은 대부분의 부대가 포위망에 갇혀 포로가 되었고, 가장 먼 곳까지 진격했던 5기갑군은 연료 부족 따위의 이유로 다수의 전차를 유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뭐···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겠지.”

    어차피 카잔스카야 돌출부와 남서 전선군의 병력은 영미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 작전에 발맞춰서 반격에 나서기 위해서 온존해야 했던 것.

    그러나 그 반격 작전이 이미 물거품이 되어버린 이상, 얼마나 많은 병력을 잃어버렸는지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으리라.

    “그리고 나도··· 패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테고 말이지.”

    주코프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면 크렘린 궁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창가에 서있는 주코프에게, 내무부 장교 하나가 다가와서 정중하게 경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주코프 동지. 이쪽으로 잠시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알겠소.”

    비록 그가 목적지를 밝히진 않았지만, 주코프는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서기장 동지에게도 저 참담한 보고서가 올라갔을 테니, 그에 대한 용무로 주코프를 부른 것이리라.

    그런 그의 예상대로, 장교는 그를 서기장의 집무실 앞까지 데려간 뒤 조용히 말했다.

    “지금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소.”

    과연 스탈린은 이번 참패에 대해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해서 어떤 처우를 내릴 것인가?

    거대한 문 앞에 선 주코프는 잠시 눈을 감고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곤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주코프가 책상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보고서만을 읽어 내려갔다.

    이에 기다리다 지친 주코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서기장 동지.”

    “그래, 잠시만 기다리시오.”

    스탈린은 언제나와 같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끝까지 마저 읽은 뒤, 그것을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고서는 주코프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번에도 또 졌군.”

    “···그렇습니다.”

    “겨우 되찾은 카잔스카야 돌출부도 잃어버리고, 살아남은 병력은 고작 21만. 이걸로 정말 내년 초 연합군과 발맞춰 반격에 나설 수 있겠소?”

    “···죄송합니다, 어렵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이건 군사에 무지한 내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참패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야.”

    마치 다 체념해 버린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스탈린의 모습에, 주코프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런 주코프에게 스탈린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코프 동지. 현 시간부로 동지의 총사령관 대리직을 박탈하고 근신에 처하겠소. 이후 처분을 정할 테니, 물러나서 기다리시오.”

    *****

    “근신···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이제부터는 바실렙스키 중장이 동지의 후임을 맡을 것이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으시오?”

    “······없습니다.”

    “좋소, 그럼 물러나시오.”

    스탈린은 말없이 고개를 떨군 채 돌아서는 주코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곰같이 듬직한 풍채를 지닌 그의 등이 오늘만큼은 작고 초라하게 보였다.

    ‘게오르기 주코프···라.’

    사실, 스탈린은 지금도 주코프를 크게 원망하거나 불신임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모스크바 전투부터 천왕성 작전, 2차 레닌그라드 전투, 그리고 이번 돈강 방어선 공세까지 그가 그리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버티는 것조차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우리 소련군은 언제나 독일군보다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해서 싸웠다. 그러나 언제나 결과는 패배였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주코프는 독일군이 계속 공세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야심만만하게 반격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렇게 개시했던 천왕성 작전도 결국 접전 끝에 실패.

    이에, 패배의 원인은 독일군 중전차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소련군은 티거와 판터를 격파할 수 있는 JS-2 신형 중전차와 SU-152 중구축전차를 개발해냈다.

    그리고 이들을 다수 투입해 돈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나, 결국은 또다시 이렇게 격퇴된 상황.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전쟁을 소련의 승리로 끝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스탈린이 내린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독소전쟁이 시작된 지 약 2년 4개월이 지난 지금, 1943년 11월 1일.

    현재의 소비에트 연방은 개전 초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상태였다.

    매년 수백만을 징집하며 최악의 피해를 입었을 때조차도 400만 이상을 유지하던 소련군은 이제 350만까지 줄어들었고,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석유 자원은 공급이 모두 차단되어 기갑부대조차도 멈춰버렸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최후의 도박으로 나섰던 돈강 방어선 돌파도 실패해버렸고, 내년 초에 영미 연합군이 서유럽에 상륙하더라도 반격에 나설 수조차 없는 상황.

    그렇기에 이제, 소련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군사적 승리가 아닌 외교적 승리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이제는 독일놈들이 바라는 대로 강화협상에 응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꼬리를 말고 백기를 흔들 수는 없는 법.

    비록 불리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선다지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이상은 최대한 몸값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스탈린은 주코프 대신 바실렙스키를 중용한 것이었다.

    “이보게, 바실렙스키 중장을 불러주게나.”

    “알겠습니다.”

    *****

    잠시 뒤, 바실렙스키 중장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집무실로 들어왔다.

    평소에 비해서 잔뜩 긴장한 저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주코프가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이미 전해들은 모양이리라.

    “···서, 서기장 동지.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서 오시오, 바실렙스키 동지. 이제 겨울인데도 꽤나 더워 보이는군.”

    “하하··· 죄송합니다.”

    그런 바실렙스키에게 스탈린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래도 주코프 동지가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벌써 들으신 모양이구려?”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이제부터 바실렙스키 동지는 상장으로 진급하고, 주코프 동지가 맡고 있던 총사령관 대리직을 맡아 주셔야겠소.”

    갑작스러운 스탈린의 진급 명령에, 바실렙스키는 기쁨보다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힘껏 경례하며 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소임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런 바실렙스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이제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가 된 동지에게 묻고 싶군. 이제 아군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역시, 우선은 내년에 있을 영미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까지 최대한 전력을 회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그것도 맞는 말이군.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저놈들에게 맞춰서 같이 반격에 나설 수 있겠소?”

    “그렇다면, 영국과 미국 측에 사정을 설명하고 서유럽 상륙을 늦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년 여름이라면 아마 때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바실렙스키의 대답에, 스탈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저놈들에게 아군이 병력을 상실했다는 얘기는 전하지 마시오. 저놈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내년 초에 서유럽에 상륙해줘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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