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반격 (8)
1943년 10월 17일.
보구차르 방면의 동쪽, 돈강 건너편에 위치한 작은 언덕의 꼭대기.
보구차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붉은 별이 그려진 지프 차 한 대가 멈춰섰다.
“사령관 동지, 도착했습니다. 저기 저쪽에 보이는 도시가 바로 보구차르입니다.”
“알겠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제1근위군 사령관, 레류센코 중장은 부관에게 망원경을 건네받으며 지프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가 군홧발로 땅을 내딛는 순간, 무른 진흙 바닥이 푹 하고 꺼져 들어갔다.
그 모습에 레류센코는 혀를 끌끌 차면서 군화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제기랄, 벌써 이런 계절인 건가. 아무래도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려고 하는 모양이군.’
어서 빨리 저곳에 있는 독일군을 정리하지 않으면 돌출부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리라.
그런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레류센코는 망원경 너머로 보구차르 방면의 전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현재 전황은 어떤가.”
“지난주에 독일군을 밀어내고 보구차르를 포위한 이래로 지금까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포위망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지난주에 3만 명에 달하던 포위망 내부의 독일군이 현재는 1만 명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건 정말 다행이로군.”
부관이 자랑스럽게 보고하는 것처럼, 레류센코가 지켜보는 와중에도 저 동쪽에서는 수백 발의 다연장 로켓이 날아와서 보구차르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 기세라면 분명 빠른 시일 내에 포위망 내부의 독일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벨키니 다리로 이어지는 통로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
‘제기랄··· 늦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런 유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레류센코는 상황을 낙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 아침 독일의 제1기갑군이 카잔스카야 돌출부의 동쪽 방면에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는 보고가 사령부로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가 보구차르 포위망을 집어삼키는 것이 먼저인지, 독일 놈들이 카잔스카야 돌출부를 집어삼키는 것이 먼저인지의 레이스가 되겠군.’
그러나 이미 전력을 다해서 보구차르 포위망을 공격하고 있는 지금, 레류센코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일선의 병사들이 열심히 싸워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레류센코 중장은 언덕 위에 서서 보구차르 포위망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차에 시동을 걸어두게. 슬슬 사령부로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사령관 동지.”
그렇게 언덕을 내려가는 로마넨코의 뒤로, 저 멀리서 독일군 수송기 한 대가 보구차르 포위망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
“빌어먹을, 또 오는구만.”
“분대장 동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독일군 비행기 말이야.”
“설마 고, 공습입니까?”
수풀에 숨어서 독일군 수송기를 노려보던 차바예프 하사는 신병의 멍청한 물음에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동무, 동무가 보기에는 저게 폭격기로 보이나?”
“죄,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후··· 모르면 닥치고 보고 있으라고.”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측면에 커다란 철십자가 그려진 독일군 수송기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면서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저 멀리 떨어진 독일군 진지 위로 날아간 수송기는 화물 상자를 하나씩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 동무··· 저게 대체···.”
“보고도 모르겠나? 수송기로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꾸하는 차바예프 하사의 말에, 스테판 이병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다면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보급이 지속되면 적을 포위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스테판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깽이 농민 출신이긴 했지만, 그래도 먹지 못하면 저 잘난 독일군도 싸울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분대장 동무가 저놈들을 포위했다고 했을 때는 이제 다 이겼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비행기로 실어나르다니. 그럼 큰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차바예프 하사는 여전히 태평한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저놈들을 떨어뜨리잔 말인가? 아군 공군 놈들은 진즉에 박살나서 다 도망친 지 오래고, 대공포 부대 놈들도 뭐 하나 맞추질 못하는데.”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면 저놈들을 물리칠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쩌긴 뭘 어쩌겠나. 직접 가서 쳐부수는 수밖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라. 이번에는 아군이 유리한 상황이니까.”
“예!”
담담하게 대답하는 분대장의 모습에, 스테판 이병은 내심 안도하며 큰 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사실 차바예프는 알고 있었다.
저 지독한 독일놈들이 공수보급까지 받기 시작했다는 것은 결코 쉽게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인 1943년 10월 24일.
랴보브스키에 위치한 남서 전선군 사령부로 제1근위군의 보고가 도착했다.
“사령관 동지, 보구차르 포위망의 제1근위군으로부터 보고입니다. 금일 오후 3시를 기점으로 벨키니 다리로 통하는 통로를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거 정말 다행이군. 그럼 포위망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것이··· 포위망 내부의 독일군도 대부분 섬멸하긴 했습니다만, 아직 5천 정도가 보구차르 시가지에 틀어박혀서 최후의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코네프 상장은 고개를 돌려 작전 지도를 바라보았다.
현재 보구차르 포위망 내부의 독일군은 몇 개의 연대 수준으로 줄어들어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비록 가장 중요한 가도가 여전히 독일군의 영향 하에 점거되어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약간의 거리만 우회하면 병력을 빼내기엔 충분했다.
‘다만 문제는··· 독일군의 압박이 예상 이상으로 거세단 말이지.’
잠시 지도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코네프 상장은 다시 고개를 들어 부관에게 물었다.
“그럼 돌출부 남동쪽의 상황은 어떠한가?”
“얼마 전, 칼리놉스키 방면에서 시작된 독일군 기갑부대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격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 근방을 방어하던 21군 소속 63, 76, 277 소총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으며, 현재는 카잔스카야 바로 앞까지 밀려난 상황입니다.”
“후··· 이들을 피해없이 빼낼 수 있겠나?”
“저 3개 사단은 카잔스카야에 설치된 가교를 이용해서 충분히 도하시킬 수 있습니다만, 나머지 부대들이 문제입니다.”
현재 벨키니 다리를 제외하면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설치된 가교는 총 다섯.
이 중 하나는 이미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져서 파괴되었고, 카잔스카야 인근에 설치된 가교도 저 3개 사단을 도하시킨 후 파괴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군의 수중에 남은 다리는 벨키니 다리를 포함해서 총 넷인가. 현재 돌출부에 남아있는 병력은 모두 얼마나 되나.”
“저 3개 사단을 제외하고 계산하면 총합 21개 사단에 4개 기갑군단, 그리고 3개 독립 연대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도하한 녀석들을 계산하더라도 많이 줄었군.”
현재 남서 전선군의 예하에 남은 병력은 도합 28만 정도. 이는 처음 공세를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고작 절반에 불과한 숫자였다.
코네프가 스타브카로부터 받은 명령이 병력을 온존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번 퇴각 작전은 이미 실패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젠장, 빌어먹을 공중 보급 때문에 보구차르 포위망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버렸군. 이제 남은 이 25만 명만이라도 반드시 살려서 빼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이 병력을 최대한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코네프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후··· 일단, 다리와 가까운 부대부터 차례대로 돈강을 도하하도록 하게. 그리고 4개 기갑군단을 전선에서 빼낸 뒤 먼저 다리를 건너도록 조치하게.”
그런 코네프의 지시에, 부관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하, 하지만 사령관 동지! 현재 기갑부대들은 가장 격전지에 배치되어 전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빼낸다면 전선이 급속도로 붕괴할 겁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미 질서정연한 퇴각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네. 그렇다면 설령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전력을 살려내는 수밖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리고 약한 보병사단보다는 빠르고 값비싼 전차군단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코네프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나도 고민해봤네만, 1기갑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는 이상 이게 최선의 방책일세. 게다가 제1근위군과 21군은 돈강과 그리 멀지 않고, 5기갑군은 빠르게 기동할 수 있으니 큰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을 거네.”
“그 말씀은···.”
사실상 6군은 버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코네프 상장의 표정을 본 부관은 그 말을 입에 담는 대신 조용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명령을 하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겠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카잔스카야 돌출부의 소련군 병력이 차례차례 퇴각하기 시작했다.
1943년 5월 말부터 시작되어 6개월간 남부집단군을 괴롭히던 소련군의 카프카스 공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
“이반! 데도브카의 가교도 무너졌다고 한다! 왼쪽으로 꺾어!”
“그럼 이제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동지!”
“나도 몰라! 빌어먹을···.”
112번 T-34/85 전차장, 시모노프 소위는 연신 해치 밖을 살피며 고민에 빠졌다.
‘젠장··· 어제까지만 해도 데도브카는 무사하다고 했는데, 설마 독일군 기갑부대가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런 그가 받은 명령은 어떻게든지 간에 소대를 이끌고 돈강을 건너 퇴각하라는 것.
그러나 군단 사령부는 먼저 돈강을 건너가는 바람에 돌출부 내의 지휘 체계는 마비된 지 오래였고, 덕분에 시모노프 소위는 아무런 지시나 정보 없이 혼자서 소대를 이끌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고민하는 동안에도 독일군은 시시각각 밀려오고 있고, 전차의 연료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상황.
‘젠장할··· 최악의 경우에는 운을 믿고서 전차로 돈강을 도하하는 수밖에 없나.’
시모노프 소위가 그런 생각마저 하고 있을 때, 앞자리에 앉아 있던 포수가 입을 열었다.
“전차장 동지, 그럼 차라리 보구차르의 가교로 가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보구차르 가교?”
“예, 얼마 전에 보구차르의 독일군이 모두 소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아직 가교도 남아있을 겁니다.”
“···좋아! 일단 가보자고!”
그리고 잠시 뒤, 약 30분을 달린 끝에 시모노프 소위의 소대는 아직 폭파되지 않은 채 멀쩡히 서 있는 보구차르의 가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봐, 건너가도 되는 거지?”
“동무, 운이 좋구만. 지금 다리 밑에서 폭탄을 설치 중이니 어서 건너가쇼.”
그렇게 시모노프 소위의 T-34 소대가 모두 가교를 건너자, 다리를 지키고 있던 보병들이 발파장치를 눌렀다.
콰앙!
“···끝났군.”
시모노프는 한동안 먼지가 피어오르는 다리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1943년 10월 28일, 카잔스카야 돌출부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