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반격 (2)
“죄송하지만 총사령관 각하, 저는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대한 반격작전을 감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내 말에, 다 끝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회의실의 분위기는 다시 한번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파울루스 장군,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이 임박한 지금 동부전선을 더 우선시하겠다는 건가?”
“예, 제가 보기에 저들의 상륙 작전은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군. 이렇게 예후가 명확한데, 이게 다 기만책이란 말인가?”
룬트슈테트 원수의 말대로,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과 사실들만 놓고 보면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 작전이 임박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저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
나는 답답한 표정의 룬트슈테트 원수와 그런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비켜보는 만슈타인 원수를 마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가장 의심스러운 점은 연합군의 준비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이번 첩보의 내용대로 서유럽에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하려면 못해도 3개월 이상의 준비 기간이 필요할 텐데, 불과 한 달 전까지 튀니지를 함락시키기 위해 싸우던 저들이 갑자기 서유럽 상륙을 개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물론 우리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선과는 별개로 상륙 작전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는가?”
마치 그 정도는 다 예상했다는 듯이 반박하는 룬트슈테트 원수의 대답에,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각하, 금일은 9월 20일입니다. 당장 다음 달에 상륙한다고 가정해도 곧 겨울바람이 불어닥칠 텐데, 연합군이 굳이 이런 계절에 상륙 작전을 준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론 겨울에 상륙 작전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긴 하네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겨울이라도 못할 것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10월과 11월의 서부전선은 그렇게 춥지도 않네.”
“그렇다면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룬트슈테트 원수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 아마도 소련 측의 요구가 있지 않았겠는가.”
현재 소련군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현재 위치만을 사수하고 있는 데다가 강화협상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상황.
그렇기에 누가 보더라도 이번 서유럽 상륙 작전과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예, 맞습니다. 확실히 지금의 소련군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모양새지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소련군이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던 것은 7월 말이었고 강화협상에 나선 것은 8월 중순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연합군의 서유럽 상륙 작전이 수개월 전부터 준비되고 있던 것이라면, 소련 측도 그에 맞춰서 공세를 감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내 말에, 지금껏 침묵을 지키며 우리의 대화를 관망하기만 하던 만슈타인 원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렇군. 지금까지 소련이 보여준 움직임과 북아프리카의 전세, 그리고 이번 상륙 작전을 모두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서유럽 상륙 작전은 미리 준비되고 있었다기보다는 동부전선의 상황에 맞춰서 급하게 준비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겠어.”
“예, 맞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저들이 상륙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회의실의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어 있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는군요.”
“게다가 연합군 측이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정황 증거였지 않나.”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가 내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고, 가장 앞장서서 대서양 방벽을 주장하던 룬트슈테트 원수도 자료들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고개를 든 룬트슈테트 원수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이 모든 것이 다 기만책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아마 연합군 측이 서유럽 상륙을 준비하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다만, 그 시점은 지금이 아니라 빨라도 내년 이후일 것입니다.”
“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영미 연합군이 우리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 유럽 대륙에 상륙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런 만큼 이번의 기만책도 완전한 거짓이 아니라 진실에 거짓을 한 스푼 섞어서 만든 것이리라.
“그렇기에 저희는 더더욱 이번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대한 반격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합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내년에 저희는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양면전쟁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독일군의 역린과도 같은 양면전쟁을 언급하자, 회의실의 분위기는 한층 더 암울해졌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룬트슈테트 원수는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현재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대한 반격작전은 어디까지 준비되어 있는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모델은 당황하면서도 당당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룬트슈테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 카잔스카야 돌출부 반격작전은 예정대로 시행하도록 하게.”
*****
1943년 9월 27일.
카잔스카야 돌출부 북서쪽, 벨키니 다리와 인접한 보구차르 방면.
“차바예프 동무! 병사들 데리고 가서 보급 좀 받아오시오.”
“소대장 동지, 또 제가 가야 합니까?”
“후, 동무도 알지 않소. 병사들만 보내면 보급대 놈들이 장난질 치는 거. 매번 보내서 미안하지만, 하사 동무가 가서 확실하게 받아오시오.”
“···알겠습니다.”
이곳에 배치된 6군 예하의 제47 소총연대 소속, 예프게니 차바예프 하사는 소대장의 지시에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라바! 스테판! 따라와라!”
“예, 동지!”
차바예프 하사는 두 명의 병사를 인솔해서 보급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자, 이런 침묵을 못 견딘 탓인지 그의 눈치를 보던 신병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분대장 동지, 동지께서 보시기에는 이번 전투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차바예프는 신병들의 당돌한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지으면서도,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
“글쎄.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그야 당연히 저희가 이기지 않겠습니까! 비록 지금까지는 저 간악무도한 나치 놈들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밀렸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은 도대체 누구에게 들은 것일까.
아마도 소대를 돌아다니며 쫑알거리는 정치장교에게 들은 것이겠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차바예프는 혀를 끌끌 찼다.
최근 아군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전과를 세운 덕분인지, 비록 지금은 진격이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병사들은 이번에는 이길 수 있다는 낙관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차바에프를 따라오는 슬라바와 스테판 이병과 같이 배치된 지 얼마 안 된 신병일수록 많이 보였다.
그러나 독소 전쟁 초기부터 전쟁에 참전해 우크라이나에서부터 이곳까지 밀려오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차바예프로서는 이런 모습이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병사들에게 패배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법. 그렇기에 차바예프는 이렇게 에둘러서 충고를 건넸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독일군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진 마라. 알겠나?”
“예! 분대장 동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그들은 벨키니 다리를 건너서 보급대에 도착했다.
그러나 바쁘게 움직이는 트럭으로 가득해야 할 이곳에는 트럭 대신 마차와 달구지만이 가득했다.
아마 기름이 부족해서 트럭 운전병들이 수송대에서 놀고먹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이리라.
‘하긴, 예전 같았으면 우리 중대도 이렇게 걸어서 보급받으러 오는 게 아니라 직접 실어다 보내줬었을 테지.’
차바예프 하사는 한숨을 내쉬며 보급관에게 다가가 말했다.
“177대대, 4중대 소속 예프게니 차바예프 하사요. 이번 주 보급품을 받으러 왔소.”
“177대대··· 4중대라. 알겠소.”
중사 계급장을 단 보급관은 서류를 들고 돌아다니며 창고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식량과 탄약통 몇 개, 그리고 연료를 조금 가져와 건네주었다.
“여기 있소. 이게 이번 주 보급이오.”
“···이게 전부요?”
“쯧, 이번 달에는 전체적으로 배급량이 적게 책정되었소. 사정을 보면 알지 않소?”
그 말에 차바예프가 주변을 둘러보니, 확실히 이전 달에 비해서 창고에 물건이 적게 쌓여있었다.
게다가 주변의 다른 이들도 그들만큼밖에 받지 못하는 모습을 확인한 차바예프는 이내 포기하고 보급대를 나섰다.
“쯧, 이래서야 소대장 동지에게 또 한 소리 듣겠구만.”
하지만 어쩌겠는가.
보급대 창고에조차도 물건이 없는 것을.
다른 때 같았으면 보급관에게 담배나 뇌물을 좀 찔러주면서 협상이라도 해봤겠지만, 보급대의 분위기와 창고를 지키는 장교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렇게 양손 가득 짐을 든 채 터덜터덜 돌아가는 차바예프 하사의 귀에 저 멀리 벨키니 다리 너머에서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쾅- 콰광-
“부, 분대장 동지 이건···.”
“···그래, 포격 소리다.”
착탄음이 다리 바로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이는 필시 아군의 진지 위로 떨어지는 것일 터.
그리고 다리에서 가장 가까운 진지는 바로 차바예프 하사가 속한 177대대 4중대의 참호였다.
‘젠장··· 설마 독일군이 다시 공세에 나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싸우고 있을지, 전멸했을지 모를 아군 진지로 돌아가야 하는가? 그게 아니면 어딘가 다른 부대로 가서 몸을 의탁할 것인가.
사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저런 격전지로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차바예프를 따라온 두 명의 신병들이 그를 잡아끌었다.
“분대장 동지! 어서 아군 중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독일놈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 가야지.”
하긴, 이대로 자대의 상황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다른 부대로 향하면 당연히 탈영 죄가 적용될 터.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벨키니 다리로 향한 차바예프는 뜻밖의 광경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젠장! 독일군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증원이 필요하다!”
“어이, 거기 너! 닥치고 총이나 쏴!”
벨키니 다리 건너편은 이미, 독일군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