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협상 (4)
“후··· 우리더러 서유럽에 상륙해서 제2 전선을 열어달라고 하더군.”
“···그 말인즉슨, 독일의 전력을 우리가 좀 더 부담해달라는 것이군요.”
“그렇소. 아무래도 동부전선의 상황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안 좋게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오.”
그동안 몇 번이고 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언급된 서유럽 상륙 작전 얘기에, 조지 C. 마셜 장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무렵 영미 연합군은 독일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결국 서유럽에 상륙해야만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의 실행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와 검토를 거친 결과 서유럽 상륙 작전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그 대신에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북아프리카 전역조차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지금 이 상황에서 서유럽에 상륙해서 제2 전선까지 구축하라니···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마셜은 루즈벨트의 질문에 대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그래서, 마셜 장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서유럽 상륙이 가능하겠소?”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각하. 현재로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서유럽에 상륙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재차 마셜에게 되물었다.
“그래, 지금 아군이 그런 큰 작전을 벌이기는 어렵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소련 놈들이 이 전쟁에서 발을 빼버린다면 그게 더 큰 문제 아니겠소?”
“···그건 그렇습니다만, 섣불리 상륙 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해버린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흠···.”
그러나 대통령의 말에 그렇게 반박하는 마셜도 소련이 전쟁에서 빠져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내심 동의하고 있었다.
‘젠장할··· 이번에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다면 프랑스 남부나 이탈리아에서 상륙을 시도해봤을 텐데. 여러모로 곤란하게 되었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로 서유럽에서 무모한 상륙 작전을 감행해볼 것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마셜은, 한 가지를 떠올리고 루즈벨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각하, 그럼 영국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저 영국놈들 말이오?”
“예, 애당초에 저희 연합군이 서유럽 상륙을 포기하고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선을 우선으로 삼았던 것도 다 영국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저 친구들은 이번 소련의 요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글쎄. 자세한 얘기는 직접 나눠봐야 알겠지만, 그동안은 우리가 저 친구들의 장단에 맞춰줬으니 저들도 이제는 마냥 반대하진 못할 거요.”
영국도 반대를 하지는 못한다라.
그 말에, 마셜은 제법 진지하게 상륙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프랑스에 상륙을 한다면··· 현재 서유럽에 주둔 중인 독일군 병력이 많아 봐야 10만이니, 대충 15만 정도만 투입하면 되겠지.’
그럼 영국군이 상륙군의 40~50% 정도의 전력을 담당해준다고 가정했을 때, 미군은 7~8만 정도의 병력만 투입해도 충분할 터.
물론 그 후에도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유지하고 독일군의 반격을 방어하려면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겠지만, 그래도 상륙 작전 자체는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리라.
‘그래, 이 정도 조건이면 지금의 상황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마셜은 루즈벨트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영국에 제대로 협조해주기만 한다면, 서유럽에 상륙하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예. 제 계산으로는 영국군이 7개 사단과 대서양 함대를 지원해준다면, 우리 미군은 8개 사단 정도만 투입해도 충분할 겁니다.”
비록 현재 미군은 태평양 전선에 대부분의 전력을 투입해둔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북아프리카 일대의 병력과 본국의 신규 부대들을 차출한다면 8개 사단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럼 언제쯤 작전을 실행할 수 있겠소?”
“일단··· 북아프리카 전선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 이곳의 베테랑 부대들을 차출하고, 상륙 작전을 준비해야 하는 데다가, 날씨와 계절까지 고려한다면 아무리 빨라도 44년 봄은 되어야 할 겁니다.”
“44년 봄이라···.”
오늘이 1943년 9월 3일이니,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앞으로 6개월.
과연 그 반년의 시간 동안 소련놈들이 강화를 맺지 않고 버텨 줄 것인가?
하지만, 마셜의 말대로 괜히 서두르다가 상륙 작전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큰일이 될 터.
그렇기에 루즈벨트는 마셜을 닦달하는 대신, 조용히 축객령을 내리며 말했다.
“좋소, 그럼 장군께서는 일단 6개월 뒤에 서유럽 상륙을 실행한다고 생각하고 작전을 준비해주시오. 나는··· 서기장과 한번 얘기해보리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셜이 물러난 뒤, 집무실에 홀로 남은 루즈벨트는 책상 위에 놓인 검은색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현재 워싱턴 D.C의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그렇다면 지금쯤 모스크바는··· 저녁 6시 반 정도인가.
‘젠장··· 6개월이라. 저 인간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밀지 모르겠군.’
그렇게 내심 혀를 차면서도, 루즈벨트는 각오를 다지며 핫라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그 무렵, 한창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스탈린은 워싱턴 D.C에서 전화가 왔다는 몰로토프의 말에 웃으며 스푼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전쟁을 그만둔다는 말에 미국놈들이 제법 안달 난 모양이군.”
“하하,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저희 소비에트 연방의 도움 없이는 독일을 상대할 자신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소, 그럼 오늘 저녁 식사는 이 정도로만 하기로 하지. 루즈벨트가 도대체 무슨 소식을 가지고 왔을지 기대되는군.”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스탈린은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에 앉아, 비서가 들고 있던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전화 바꿨소. 나, 스탈린이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는군요, 서기장님.”
“정말 그렇구려, 미합중국 대통령 동지. 그나저나··· 그쪽에서 먼저 연락하시다니, 별일이구려?”
스탈린이 마치 왜 전화를 한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말하자, 루즈벨트는 작게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저희도 나름대로 듣는 귀가 있어서 말입니다. 최근 독일과의 강화협상이 지지부진하시다지요?”
“아아, 무슨 일인가 했더니 겨우 그 일이었소이까. 뭐, 협상이란 것이 원래 밀고 당기는 것 아니오? 잘 풀릴 때가 있으면, 막힐 때도 있는 법이지.”
소련이 벌써 몇 주째 독일과의 강화협상을 중단하고 나섰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저렇게 뻔뻔하게 대답할 줄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루즈벨트로서는 이 부분을 강하게 지적하고 나설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소련이 불리한 조건을 모두 감수하고 덜컥 독일과 강화를 맺어버린다면 가장 곤란한 것은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크흠··· 뭐, 어쨌든. 그래서, 저희가 서유럽에 상륙해서 제2 전선을 구축하기를 요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 그런데 당신네들은 북아프리카에 꼴랑 몇만 명 파견한 것을 가지고 생색만 내고 있으니···.”
“그쪽의 불만은 이해하지만, 저희는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과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라서 말입니다.”
“그렇소? 그런데 우리는 일본과는 딱히 나쁜 사이도 아니라서 말이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이 아니라 독일이란 말이오!”
양자 간에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잠시 뒤, 생각을 정리한 루즈벨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태평양 전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하지요. 그럼, 서유럽 상륙작전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호오, 드디어 결심을 한 모양이구려.”
“예. 소련의 입장을 고려해서, 지중해 쪽을 뒤로 미루더라도 서유럽 상륙을 우선시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라. 얼마나?”
“아마 내년 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말에, 스탈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년 초면 앞으로 반년.
과연 그때까지 소련이 이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때까지 버틴다고 해도, 저 약해빠진 영미 연합군 놈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고민하던 스탈린은 이전보다는 좀 더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년 초에 상륙 작전을 실행한다라···. 루즈벨트 동지, 그때까지 버티는 건 좀 힘들 것 같구려.”
“···그만큼이나 상황이 어렵습니까?”
“그래.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네들이 싸운 모습을 보면, 내년 초에 연합군이 상륙한다 한들 정말 독일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들지 않소만.”
그렇게 의심 가득한 스탈린의 대답에, 루즈벨트는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저희로서는 이 이상 상륙 작전을 앞당길 수는 없습니다만, 기만책 정도는 시도해볼 수 있겠지요.”
“기만책? 어떻게 말이오?”
“북아프리카에서 아군 부대들을 차출한 뒤, 독일놈들에게 고의로 정보를 흘려서 마치 올해 말에 상륙 작전을 실행할 것처럼 속이는 겁니다.
그럼 독일놈들도 아군의 상륙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회심의 제안을 던진 루즈벨트는 조용히 스탈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스탈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소. 다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우리도 언제든지 강화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늘 잊지 마시오.”
*****
그리고 그로부터 몇 주 뒤.
우크라이나, 빈니차에 위치한 총참모본부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육군 참모총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아, 자네인가. 바로 연결되서 다행이군.”
이곳에서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대한 반격 작전을 검토하고 있던 나는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룬트슈테트 원수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되물었다.
“예, 각하. 혹시 무슨 문제로 전화하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해외 방첩국을 통해서 첩보가 들어왔네만, 아무래도 연합군 놈들이 서유럽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네. 그러니 동부전선의 병력을 차출해서 대서양 방어를 강화하도록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