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마레트 방어선 (5)
1943년 8월 27일.
미군이 엘 게타르 협곡에 갇혀서 고통받고 있을 바로 그 무렵, 다른 한편에서는 드디어 공세에 나선 영국 8군단도 마찬가지로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뭐? 15기갑사단이 반격에 나섰다고?”
“···예. 저희가 공세에 나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기갑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몽고메리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뎀프시 소장의 대답에 고성을 내질렀다.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될 일인가! 젠장할! 자네 말만 듣고서 급하게 공세에 나섰는데,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텐가!”
“하, 하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30군단이 마레트 방어선에서 독일군을 잠시 붙잡아주기만 한다면, 저희 8군단이 15기갑사단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이런 멍청한···! 그렇게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돌파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애초에 이번 작전의 핵심은 기습적으로 측면을 공략하는 것이었단 말일세!”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역성을 내던 몽고메리는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작전 지도를 다시 바라보았다.
‘젠장··· 이제 정말로 다른 수가 없는 건가?’
방금 전에 들어온 연합군 사령부의 보고에 따르면, 그동안 기세등등하게 진격하던 미군 놈들도 협곡에서 포위당해버렸다고 했던가.
그렇다는 것은, 저 패튼 녀석은 한동안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해야겠지.
거기에 더해 현재 독일군은 방어자의 입장인 데다가 아군의 의도를 모두 파악한 상황.
즉, 이대로 시간이 지체된다면 독일군의 방어선과 대처능력은 점점 더 강화될 터였다.
그렇기에 몽고메리는, 자충수인 것을 알면서도 뎀프시 소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네, 정말로 15기갑사단을 격파할 수 있겠나? 물자와 보급이 부족할 텐데.”
“사실 어려운 상황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수적 우세를 앞세워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후··· 어쩔 수 없군. 알겠네. 보급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한번 해보시게.”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뎀프시 소장의 힘찬 대답에, 몽고메리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달래며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
그리하여 1943년 8월 30일.
북아프리카 연합군이 마레트 방어선 공략 작전을 시작한 지 약 보름이 지났을 무렵.
각자 공세에 나섰던 패튼의 미 2군단과 몽고메리의 8군은 서로 손발이 전혀 맞지 않은 탓에 양측 모두 졸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에 보다 못한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중장이 다시 한번 지휘관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지만, 전황은 이미 깊은 수렁에 빠진 뒤였다.
“좋습니다. 그럼 우선, 두 분께서 상황 보고부터 먼저 해주십시오.”
“알겠네. 일단 우리 미 2군단은 자네도 알다시피 독일군 낙하산 부대에 후미가 잡혀서 엘 게타르 협곡에 갇힌 형상일세.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미 엘 게타르 협곡은 거의 다 통과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낙하산 부대만 격퇴하면 되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이미 34보병사단 소속 133연대를 차출해서 엘 게타르로 보내놨네. 이번에는 우리가 독일놈들을 좌우에서 포위하는 거지!”
지휘봉으로 지도를 짚어가며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는 패튼의 모습에,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 중장 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영국 8군 쪽은 어떻습니까? 제가 마지막으로 보고받기로는 8군단이 마트마타 언덕을 넘어서 후방으로 침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소. 거기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지. 다만, 저 여우 같은 놈이 15기갑사단을 꽁꽁 숨겨 두고 있었더군.”
“···그렇습니까.”
“그래. 그래서 측면을 순식간에 돌파해 마레트 방어선을 앞뒤에서 공략한다는 기존의 작전은 조금 틀어졌소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마트마타 언덕 너머에는 제대로 된 방어진지도 없는 데다가, 아군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니, 금방 돌파할 수 있을 거요.”
몽고메리의 그런 당당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전 지도를 들여다보던 아이젠하워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론은 결국 두 분 모두 추축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
사실, 두 사람의 말이 완전히 거짓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현재 엘 게타르 협곡에 갇혀서 보급 부족과 루프트바페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는 미 2군단도, 그리고 15기갑사단의 예기치 못한 반격에 막혀버린 영 8군단도.
양쪽 모두 추축군에 비하면 압도적인 병력 우세의 상황이니만큼, 결국에는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리라.
다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리라는 점과 이 방어선을 돌파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 패튼과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의 눈초리를 피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후··· 사실 이 자리에서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소만, 솔직하게 말해서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패튼 장군의 탓이 크오.”
“···뭐요? 당신네가 독일군의 예비대를 예측하지 못하고 반격당한 것이 왜 내 탓이란 말이오!”
“그야, 당신네 병사들이 워낙 졸전을 치른 탓에 독일군의 예비대가 남아돌았던 것 아니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엘 게타르를 공격한 거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세네드 방면으로 갔어야지!”
몽고메리가 그의 실책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들어오자, 패튼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큰 소리로 반박에 나섰다.
“흥!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공세에 나선 뒤에도 홍차나 홀짝거리면서 사태를 관망했잖아! 당신네들이 제때 움직여 줬으면 우리가 이렇게 포위당하지도 않았을 거요!”
“뭐요? 허, 참나···.”
“후···. 두 분 다 그만들 하시지요.”
결국, 패튼과 몽고메리의 말다툼은 아이젠하워의 중재로 일단 끝이 났지만,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젠하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 무렵,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 위치한 스타브카 최고 중앙 지휘사령부.
이곳에서는 답보상태에 빠져버린 카잔스카야 돌출부의 상황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독소 전쟁 강화협상에 대해서 한창 논의가 펼쳐지고 있었다.
“좋소, 그럼 일단은 카잔스카야 돌출부의 상황부터 들어보기로 하지. 주코프 동지, 한번 말해보시오.”
“말씀드리기도 송구스럽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기존의 돌출부를 두고서 아군과 독일군이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소? 그럼 지난번에 말했던··· 6군을 퇴각시켜서 스탈린그라드를 되찾겠다는 것은 어떻게 되었소?”
“···독일군이 생각보다도 잘 버텨주고 있는 터라,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6군의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다수의 보병부대를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투입해서 도시를 되찾는다는 작전도 일단은 검토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주코프는 슬쩍 눈알을 굴려 서기장 동지의 심기를 살펴보았다.
“그렇구려. 뭐, 좋소. 계속해서 다각도로 작전을 검토해보시오. 언제 어떤 상황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지.”
“···알겠습니다, 동지!”
그러나 스탈린은 애당초에 별다른 기대조차 안 했다는 듯이 주코프의 제안을 대충 흘려넘겨버렸다.
그러고는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주코프의 옆에 서 있던 몰로토프 외무상을 바라보았다.
“좋소. 그럼 다음으로··· 몰로토프 외무상.”
“예, 서기장 동지!”
“현재 독일놈들과의 강화협상이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들어보고 싶군. 말해보시오.”
그런 스탈린의 지적에, 몰로토프는 다년간의 외교 경험으로 단련된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동지. 현재 강화협상에서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전후 배상문제와 영토 문제입니다.”
“···영토 문제는 그렇다 쳐도, 전후 배상문제라고? 이 빌어먹을 놈들이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온 주제에 양심이 없군.”
“정말 그렇습니다. 다만, 배상에 관해서는 저쪽도 그리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블러핑이라 생각됩니다.”
“그럼··· 본론은 결국 영토로구만.”
“예, 그렇습니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일단 저는 카프카스와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크림반도, 그리고 모스크바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거리는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서기장 동지의 말씀대로 드네프르강부터 프리퍄티 습지대, 발트 3국을 경계로 삼자고 제안했습니다.”
“호오. 그래서, 저놈들이 받아들이던가?”
“아닙니다. 저들로서는 가장 경제적 가치가 높은 카프카스의 유전과 우크라이나 흑토지대를 모두 포기하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고 하더군요.”
“흥! 도둑놈들이 훔친 물건을 두고 수지타산을 따지는 꼴이군. 그래서, 그놈들이 제안한 국경선은 어디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몰로토프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연필을 집어서 지도 위에 검은색 선을 하나 그어버렸다.
그 선은 흑해의 하리코프부터 시작해서 하리코프, 스몰렌스크, 그리고 발트해의 레닌그라드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몰로토프는 카프카스에 위치한 두 유전지대, 마이코프와 그로즈니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건 또 무슨 의미인가?”
“후··· 저 날강도 놈들이 이 정도로 양보하는 대신에 향후 10년간 마이코프와 그로즈니 유전에서 나오는 산유량의 50%를 내놓으라더군요.”
그런 몰로토프의 말에, 회의실 여기저기에서 격분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동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맞습니다! 레닌그라드부터 로스토프까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인데, 거기다 석유까지 내놓으라니요!”
“저 자식들은 그냥 협상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동지들의 반응에 스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독일놈은 앞으로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조건을 한번 후려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굽히고 들어가면
레닌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같은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될 터.
그렇기에 스탈린은 여기서 한번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몰로토프 동지. 금일 부로 내가 지시할 때까지 무기한 놈들의 강화협상 요구에 일체 응하지 말게.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스탈린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워싱턴에서 제법 재미있는 소식이 날아왔던데. 미국놈들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보라고 했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