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마레트 방어선 (3)
“회의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 현재 파울루스 참모총장님께서 전화로 각하를 찾고 계십니다.”
“파울루스 장군이?”
“예, 지금도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겠네. 지금 바로 가겠네.”
과연 파울루스 장군은 무슨 용무로 자신에게 전화를 한 것일까.
어쩌면 이 전화가 자신의 고민에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롬멜은 부관을 따라 통신실로 향했다.
“전화 바꿨소. 나 롬멜이오.”
“아, 롬멜 장군님. 이렇게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오. 전선의 상황이 급박하니 어쩔 수 있겠소.”
그렇게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연합군의 공세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제가 보고받기로는 미군이 엘 게타르 방면에서 공세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소. 공세의 규모로 보나 방향으로 보나, 미국놈들의 주공은 이쪽인 게 확실하오. 그런데 웬일인지 영국놈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단 말이지.”
“예, 저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려서 연락을 드린 겁니다. 그래서, 각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저 몽고메리 놈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확실하오. 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거기까지 말한 롬멜은 ‘우선 엘 게타르 방면을 먼저 막으려 한다’는 말은 속으로 삼킨 채 파울루스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해서 적의 의도를 간파해낸 파울루스 장군이라면 이번에도 필시 무언가 답을 주리라.
하지만 그런 롬멜의 기대와는 다르게, 파울루스 원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약간 뜻밖의 말이었다.
“영국군의 노림수라···.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정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보? 그게 무엇이오?”
“예. 저희 총참모본부에서는 아무래도 지금 북아프리카 연합군 안에서 내분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내분?”
그 말을 듣자, 롬멜도 뭔가 짚이는 구석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미군과 영국군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 보인다는 보고가 종종 올라오기는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동맹국과 협동 작전을 펼치면 으레 벌어지기 마련이기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내분이라니.
설마 그런 갈등이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지휘관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예. 저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미 2군단을 지휘하는 패튼 장군과 영 8군을 지휘하는 몽고메리 장군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다고 합니다.”
“흠··· 마침 딱 지금 튀니지 남부에서 작전 중인 양군 부대의 지휘관들이구려.”
“그렇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기만책일 수도 있지만,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현재 미군이 단독으로 공세에 나선 것은 아마도 영국군과 손발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호오··· 그렇게 생각하면 저들의 움직임도 이해가 되는구려.”
파울루스 원수의 말대로, 확실히 지금의 미군과 영국군은 공통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 협조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저 지휘 체계상의 착오와 작전 수행 능력의 부족 때문에 손발이 어긋난 것인가?
그게 아니면···.
‘아니면, 정말로 양군 부대의 지휘관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롬멜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정말 고맙소. 파울루스 장군의 말씀이 큰 도움이 되었소.”
“그렇습니까? 별 것 아닌 정보입니다만.”
“아니오. 덕분에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는군. 그럼 이만 끊겠소.”
파울루스와의 전화를 끊은 롬멜은 회의실로 달려가 작전 지도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현재 공격받고 있는 것은 엘 게타르의 이탈리아 17보병사단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저곳으로 15기갑사단을 투입해서 미군의 공세를 조기에 잘라버리는 것이 타당하리라.
‘하지만, 정말로 미국놈들과 영국놈들이 서로 다른 수를 꾸미고 있는 거라면··· 몽고메리는 아군의 예비대가 전부 미군 쪽으로 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
그렇다면 15기갑사단을 아껴뒀다가 몽고메리가 본색을 드러냈을 때 투입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탈리아 17사단이 그때까지 미군의 공세를 막아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보게, 아르님 상급대장.”
“예, 각하.”
“현재 엘 게타르 방어선의 상황은 어떤가? 이탈리아 17사단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런 롬멜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아르님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엘 게타르의 지형이 워낙 방어에 유리한지라 그리 쉽게 뚫리지는 않을 겁니다만, 그래도 이탈리아 17사단만으로 막는 것은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역시 그런가.”
“예. 다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이탈리아군의 대전차 화력이 워낙 약한지라, 미군의 기갑부대가 다수 몰려가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흠···.”
이에 지도를 곰곰이 들여다보던 롬멜은 이내 결단을 내렸다.
“좋네. 그럼, 15기갑사단에서 제33 대전차 대대를 차출해 엘 게타르 방어선에 배치하도록 하게.
그리고, 이탈리아 17사단에게는 적당히 교전을 피하면서 협곡 깊숙한 곳까지 미군을 끌어들이도록 전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미군을 끌어들인 뒤에 대전차 대대로 기습을 하실 생각입니까?”
“하하, 그것도 재미있는 작전이군. 하지만 그 정도 기습으로는 2개 사단을 막기에는 조금 부족할 걸세.”
“그렇다면 혹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아르님 상급대장에게, 롬멜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요즘 놀고 있는 람케 낙하산 여단을 써먹을걸세.”
*****
1943년 8월 24일.
엘 게타르 인근에 위치한 이탈리아군의 방어진지.
“뭐하고 있나, 로버트! 계속 진격해! 아군이 맞고 있잖아!”
“하, 하지만 중사님! 적군 진지가 너무 가깝습니다!”
“그딴 건 상관없어! 어차피 이탈리아 놈들의 37mm 대전차포로는 우리 셔먼에 흠집조차도 못 낸다고!”
이곳에서 미국 제1기갑사단 소속의 M4셔먼 전차장, 헤럴드 중사는 조종수에게 윽박질러가며 최선두에서 공세를 이끌고 있었다.
“로이! 약해빠진 대전차포는 냅두고 저기 기관총 진지에 먼저 한발 꽂아줘라. 아군 보병들 다 죽겠다!”
“예! 고폭탄 발사!”
투콰앙!
전차포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웅장한 포성과 함께 묵직한 105mm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기관총 진지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신 총알을 쏟아붓던 이탈리아군 참호에서 어마어마한 흙 기둥이 솟아올랐다.
“명중! 기관총 침묵!”
“하하하, 역시 105mm야. 화력 하나는 확실하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전차전도 75mm보다 105mm 야포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야 이탈리아놈들 전차가 워낙 약해빠져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헤럴드 중사는 포수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근처에서 총탄을 쏟아붓던 기관총 진지들은 모두 불타고 있었고, 저 멀리서 달려오던 M11/39 전차도 고폭탄에 맞아 뒤집어진 상태.
“뭐, 이 정도면 여기도 다 끝났군.”
그런 헤럴드의 감상대로, 간헐적으로 고개를 내밀고 응사하던 이탈리아군 병사들도 모두 교전을 포기한 채 항복하거나 저 멀리 도주하고 있었다.
“좋아. 잠깐 휴식이다! 새로운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도록. 교대로 소변을 보고와도 좋다.”
“예!”
그렇게 전차병들을 풀어준 뒤, 헤럴드 중사는 큐폴라 위에 걸터앉아서 전장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는 항복하려는 이탈리아군 몇몇이 두 손을 든 채 참호에서 걸어 나와 아군 병사들과 무언가 말을 나누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병사들이 이탈리아군이 버리고 간 참호를 수색하며 전리품을 챙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며칠 전 엘 게타르에서 공세를 시작할 때부터 몇 번이고 보아왔던 풍경이었다.
우리 셔먼 전차들이 앞장서서 적당히 진지를 두들기면 이탈리아군은 저항을 하다가 도주하거나 항복한다.
그렇게 이탈리아군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싸우다 물러나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마치,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하. 나도 참, 괜한 걱정만 많아졌군. 저 약해빠진 이탈리아군이 그런 영악한 짓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러나 헤럴드는 담배꽁초를 전차 밑으로 던져 버리며 잡념을 떨쳐냈다.
어차피 일개 전차장에 불과한 그가 그런 복잡한 것을 고민해봐야 무엇하겠는가? 그는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싸울 뿐이었다.
그렇게 그가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전차 안으로 들어오자, 때마침 헤드셋 너머에서 중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 여기는 마운틴 탑. 마운틴 1, 마운틴 2 응답하라.”
“마운틴 1. 수신 확인. 무슨 일인지?”
“땅개들의 지원 요청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더 진격할 모양이야.”
그런 중대장의 말에, 헤럴드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현재 손목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가리키는 시각은 오후 3시 30분.
이런 시간에 한 번 더 공세에 나선다면 아무리 빨라도 저녁 시간에 도착할 터였다.
“여기는 마운틴 1.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었지 않나? 다음 방어선에 도착하면 벌써 해가 지고 있을 텐데.”
“글쎄, 높으신 분들께는 퇴각하는 놈들을 밀어붙여서 이참에 협공을 통과하자는 생각이신 모양이야. 어쨌든 잡소리 말고 기동 준비하도록.”
“···마운틴 1, 확인.”
통신을 마친 헤럴드는 한숨을 내쉬며 헤드셋을 벗었다.
“젠장, 패튼 장군께서 애가 타신 모양이군.”
“···왜 그러십니까, 중사님?”
“하하, 설마 이 시간에 또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요?”
그런 헤럴드의 말에 각자 쉬고있던 중대원들은 불안한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다들 잘 아는군. 로버트, 다시 시동 걸어라. 진격 명령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헤럴드의 M4셔먼은 다시 협곡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
전방을 주시하던 헤럴드는 저 멀리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적군의 대전차포 진지를 발견했다.
“전차장님, 대전차포 진지입니다!”
“나도 봤다. 로버트, 전차 전진! 빨리 해치우고 오늘은 여기서 쉬자고!”
“예, 알겠습니다!”
현재 시각은 약 4시 30분.
게다가 눈앞에 보이는 적군의 수도 그리 많지 않으니, 빨리 끝낸다면 오늘은 여기서 쉴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며 헤럴드가 대전차 진지를 향해 접근하려는 순간.
콰앙!!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충격이 M4 셔먼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