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협상 (2)
1943년 8월 15일.
스웨덴의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소도시, 노르텔리에.
이곳의 아텔렛 호텔 앞에서 검은색 관용차량 한 대가 멈춰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차에서 내리는 이는 스웨덴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말하고 있었다.
“여기가 정말로 협상 장소인가? 그런 것치고는 호텔 건물이 너무 허름하네만···.”
“죄송합니다. 외부의 눈을 피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곳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안만큼은 확실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쯧, 어쩔 수 없군. 독일놈들은 먼저 와 있겠지?”
“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호텔로 들어가는 그는 바로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인민위원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였다.
몰로토프는 안내를 따라서 회담장으로 향하는 동안 잠시 스탈린에게 받았던 지시를 떠올렸다.
‘몰로토프 동지. 사실 이번 회담에서는 강화 조건이나 독일놈들의 사정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네.’
‘···그럼 이번 회담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저놈들에게 우리는 강화를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세.’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그 말인즉슨, 독일놈들이 먼저 강화를 제안해온 이번 기회에 협상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으라는 의미겠지.
하지만 모스크바 코앞까지 전선이 밀려버린 데다가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카프카스까지 모두 독일놈들에게 넘어가 버린 지금, 그런 엄포가 정말로 가능하겠는가.
‘후···. 아무래도 오늘 협상은 꽤나 힘들어질 것 같군.’
몰로토프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회담장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먼저 도착해서 앉아 있던 독일 측 사절단의 대표,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몰로토프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몰로토프 외무상님.”
“리벤트로프 장관··· 이렇게 직접 뵙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구려.”
“하하, 정말 그렇습니다.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 이후로 처음 뵙는 것이니, 벌써 4년 만이군요.”
독소 불가침조약이라···.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저자와 몇 차례에 걸친 길고 지루한 협의를 거친 끝에 간신히 조약을 체결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과연, 그때처럼 상호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몰로토프는 거만하게 웃는 리벤트로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좋소. 그럼··· 무슨 말씀을 하실지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강화협상은 양측의 제안을 확인하는 첫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네들의 주장은 지금의 전선을 그대로 국경으로 삼자는 말이오?”
“예. 아무래도 그게 가장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뭐··· 정 원하신다면 국경선을 조금 조정해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그 경우 그만큼 다른 지역을 양보해주셔야 합니다.”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들은 몰로토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순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과 같이 알짜배기 땅을 모조리 점령한 상태에서 현재 전선을 그대로 새로운 국경선으로 삼자니.
현재 소련이 불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후··· 정말 양심이 없군. 이럴 거면 차라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지 그러시오?”
“하하, 하지만 양심이 없는 것은 그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기서 1941년의 국경선으로 돌아가자니··· 그건 결국 1000km 뒤로 물러나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독일 측은 현재의 전선을, 소련 측은 전쟁 이전의 전선을 국경선으로 삼아서 전쟁을 끝내자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
이렇게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리벤트로프 장관이 먼저 공세를 퍼부었다.
“몰로토프 외무상. 우리 이제 그만 솔직해집시다. 사실 이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네들의 진격은 멈춘 지 오래고, 우리의 붉은 군대는 지금도 진격을 계속하고 있소만.”
“하하, 그래서 이대로 계속 싸우면 당신들이 이길 것 같습니까? 석유가 부족해서 기갑부대도 못 굴리는 주제에?”
“리벤트로프 장관!”
“자, 자. 두 분 모두 조금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만. 잠시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시지요.”
그렇게 둘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중재를 맡은 스웨덴 장관이 끼어들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진정시켰다.
“이런,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조금 심했던 것 같군요.”
“···아니오. 나도 말이 과했소.”
몰로토프는 화를 진정시키는 척하면서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내쉬었다.
‘후우··· 위험했군. 방금 전에 화라도 내지 않았으면 표정을 완전히 들킬 뻔했어.’
그러나 사실,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며, 몰로토프는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는 리벤트로프의 얼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설마 우리의 자원 사정까지도 완전히 꿰고 있을 줄이야. 잘 속여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손바닥 위였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소련의 전쟁 수행 역량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들켜버린 이상, 괜한 허세를 부려봤자 양보를 얻어내기는 어려울 터.
게다가, 시간을 끌어봤자 상황은 점점 더 소련에게 불리하게만 흘러갈 터.
‘하지만 그렇다고 저 빌어먹을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제기랄.’
역시 여기서는 괜한 엄포라도 부려서 협상을 파토낸 다음, 뭔가 다른 수를 찾는 게 최선이겠지.
그러나 리벤트로프의 빙글거리는 미소를 본 몰로토프는,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 다음 회담은 훨씬 더 힘들어질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젠장··· 뭔가 허세라도 좋으니, 저 독일놈들에게 한 방 먹이고 일어나야 할 텐데···.’
그렇게 고민하던 몰로토프의 머릿속에, 갑자기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몰로토프가 며칠 전에 스탈린에게 직접 말했던 영국과 미국이었다.
“후··· 좋소. 그럼 솔직하게 말하리다. 당신들의 추측대로 우리의 사정이 조금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오.”
“호오··· 그렇습니까?”
방금 전과는 완전히 돌변한 몰로토프의 태도에, 리벤트로프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리벤트로프에게, 몰로토프는 담담하지만 당당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전쟁이 끝나리라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오.
우리 소비에트 연방에게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방이 함께하고 있고, 그들이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도 끝까지 당신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오.”
“······.”
그것은 엄포라기보다는 결의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리벤트로프는 그 말을 쉬이 흘려넘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설령 공멸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몰로토프의 저 말이야말로 사실 리벤트로프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리벤트로프는 지금까지의 오만한 태도와는 달리,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후, 당신들의 각오는 잘 알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오늘보다 진전된 협상을 할 수 있기를 기대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리벤트로프의 반응에 만족한 몰로토프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소. 그럼 다음번에는 좀 더 그럴싸한 타협안을 준비해오시길 바라겠소.”
*****
그렇게 독일과 소련의 사절단이 스웨덴에서 비밀리에 회동하고 있을 바로 그 무렵.
다른 한편, 워싱턴 D.C.의 백악관과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에서는 이들의 강화협상에 대해서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정확하게 파악된 내용은 무엇이오? 소련이 정말로 이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고 있다는 말이오?”
“아직까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적어도 소련과 독일이 강화협상을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후, 소련이 협상을 시작했다라···.”
코델 헐 국무부 장관의 암울한 보고에, 루즈벨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셜을 바라보았다.
“마셜 장군. 만약 독일과 소련이 정말로 강화협정을 맺는다면··· 우리와 영국의 힘만으로 독일을 패퇴시키는 것이 가능하겠소?”
그러나 루즈벨트의 예상대로, 마셜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기대를 단칼에 잘라버렸다.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 불가능을 입에 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어렵습니다.”
“···그래도, 정말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오?”
“대통령 각하. 소련 측이 제공한 정보와 저희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현재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의 수는 적게 잡아도 최소 300만이 넘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련이 전쟁에서 빠져버리면, 저희가 저들을 모두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젠장, 300만이라니. 역시 전쟁 기계라 불리던 프로이센답구만.”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지 5개월이 지난 지금, 군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던 루즈벨트도 이제는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지금의 미 육군은 독일군에 비해서 한 수, 아니 두 수 아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독일군이 무려 300만이나 몰려온다니, 과연 그 상황을 지금의 미군이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어제까지는 적국이었던 만큼, 전쟁이 끝나더라도 당장 300만을 빼내지는 못하겠지만···. 그중 절반인 150만만 빼낸다고 해도 상대하기 어렵지.’
그렇기에 루즈벨트로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소련이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발을 빼는 사태를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소련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어렵고, 군사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을 지속하도록 구슬릴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루즈벨트는 결국, 원론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헐 장관.”
“예, 대통령 각하.”
“장관이 소련 대사를 직접 찾아가서 한번 물어보시오. 혹시 우리 미국에게 원하는 게 없느냐고 말이지.”
“가, 각하,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체면이나 손익을 따질 때가 아니지 않소.”
너무나도 파격적인 루즈벨트의 명령에, 헐 장관은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소련 대사관으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고맙소. 수고해주시오.”
그렇게 헐이 자리에서 일어난 뒤, 루즈벨트는 마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셜 장군.”
“예, 각하.”
마셜은 대통령의 담담한 눈빛을 받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루즈벨트는 과연 그에게 어떤 지시를 내릴 것인가?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이젠하워 정군에게 전해주시오. 적어도 올해 안에는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을 완전히 몰아내라고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