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카잔스카야 돌출부 (5)
“내가 듣자 하니, 지금 고작 3개 사단만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자네들 지금 제정신인가?”
수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룬트슈테트의 질책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두말할 것도 없네. 지금 당장 스탈린그라드에 배치된 6군을 빼내서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투입하게.”
“하지만, 각하! 지금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한다면 전세가 뒤집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돈강 방어선을 저대로 놔두자는 말인가? 그러다 전선을 돌파당하면 말짱 도루묵이지 않나!”
‘···젠장. 귀찮게 됐군.’
만슈타인 원수의 허락을 받았으니 다 끝난 문제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육군 최고사령부에서 태클을 걸고 들어올 줄이야.
게다가 상대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의 국방군 최고 원로, 룬트슈테트 원수였다.
그런 그가 과연 가용전력만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겠다는 우리의 작전을 인정해줄 것인가?
‘···아마 어렵겠지.’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그를 설득하는 대신, 일단 공을 돌리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각하, 이번 작전은 동부전선 총사령관이신 만슈타인 원수께서 이미 승인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동부전선 사령부와 먼저 말씀을 나누셔야 할 것 같습니다.”
“흠···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나의 노골적인 면피성 발언에, 룬트슈테트 원수는 괘씸하다는 듯이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잠시 뒤,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연 룬트슈테트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좋네. 그럼 차라리 내가 직접 남부집단군을 방문해서 전선을 시찰하는 게 낫겠군. 며칠 안에 내가 노보체르카스크로 갈 테니, 자네도 그때 한번 보세나.”
*****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인 1943년 7월 9일.
우리는 노보체르카스크에 위치한 남부집단군 총사령부에서 다시 만났다.
“하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각하. 사실 이번 일은 총사령관님께서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크흠, 아무래도 내가 직접 와야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아서 말일세.”
현재 회의실에 모인 이는 나와 룬트슈테트 원수, 만슈타인, 그리고 발터 모델까지 단 네 사람뿐이었지만, 회의실 안에는 왠지 모를 답답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룬트슈테트 원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좋네. 어디 한번 자네들의 작전에 대해 들어보기로 하지.”
“예, 그럼 우선 현재의 전황에 대해서 먼저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모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봉으로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카잔스카야 방면에서 돈강을 도하해 거대한 교두보를 형성한 상태이며, 이 돌출부를 더욱 확대해 아군 전선을 돌파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현재는··· 얼마 전에 도착한 707, 708, 712 사단으로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으며, 곧 도착할 2개 사단도 도착하는 즉시 투입할 예정입니다.”
“3개 사단을 투입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또 병력을 투입한다고? 그렇게나 피해가 심각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소련군의 공세가 재개된 지 일주일이 지난 현재, 카잔스카야 돌출부의 전황은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이번에 전선을 돌파해내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남서 전선군은 끝없이 병력을 밀어 넣었고, 그에 반해 이번 한 번만 막아내면 이긴다고 판단한 남부집단군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현재 위치를 사수했다.
그리고 그렇게 양측 모두 한치의 물러남도 없이 치열하게 싸운 결과, 고작 70km밖에 안 되는 이 전선에서는 끔찍한 소모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제기랄, 자네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스탈린그라드를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말인가? 지금 당장 6군을 빼내서 이곳을 틀어막아야 하네!”
“걱정 마십시오, 각하. 이제 곧 서부 전선에서 차출한 증원 병력이 차례대로 도착할 테니, 그들을 투입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병력을 축차 투입하는 꼴이 아닌가! 그랬다간 방어에 성공하더라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걸세!”
사실 룬트슈테트 원수의 말은 정론이었다.
기왕 병력을 투입할 거라면, 한 번에 다수의 병력을 투입해서 적을 일거에 섬멸하는 것이 정답이겠지.
“그리고 자네들도 알겠지만, 이렇게 서로 병력을 갈아 넣는 소모전은 우리 독일군에게 더 손해일세.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기 어려운 마음은 이해하네만, 지금은 한걸음 물러서야 하네.”
게다가 지금 룬트슈테트가 하고 있는 말은, 과거에 내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각하. 오히려 지금은 병력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현재 위치를 사수해야만 합니다.”
“···어째서인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스탈린그라드가 그만큼 가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소련군의 이번 공세는 저들이 가진 모든 자원을 긁어모은 최후의 반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번 전투에서 스탈린그라드와 돈강 방어선을 동시에 지켜내기만 한다면, 이 전쟁은 아군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승리라.”
승리. 이 전쟁을 끝내고 소련의 항복을 받아낼 진정한 승리.
최근 들어 국방군의 그 누구도 입에 담지 않던 그 말을 내가 꺼내자, 룬트슈테트 원수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말 6군을 차출하지 않고도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가.”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 또한 승리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래도 충분히 해볼 만한 승부라고 생각합니다.”
내 담담한 대답에, 그는 만슈타인과 발터 모델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럼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들도 파울루스 장군과 같은 생각인가?”
“예,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은 맞서 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후··· 빌어먹을.”
두 사람의 대답에, 룬트슈테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는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예전에 프랑스를 침공할 때가 생각하는군. 그때 나와 참모부는 슐리펜 계획을 다시 한번 실행하려고 했었는데, 만슈타인 자네는 낫질 작전을 입안해서 가지고 왔지.”
“···예, 그랬었지요.”
“그때 자네의 낫질 작전이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는 프랑스를 정복하지 못했을 걸세. 그러니 이번에도 자네의 판단을 믿어보겠네.”
그 말을 끝으로 룬트슈테트는 돌아서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그의 등을 향해서, 나는 경례를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이번 작전은 반드시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그 무렵, 랴보브스키에 위치한 남서 전선군 사령부.
“젠장, 참모장! 전선 돌파는 아직인가? 벌써 이만큼이나 병력을 투입했는데, 도대체 왜 아직도 이 모양이냔 말일세!”
“···죄송합니다, 동지. 아무래도 독일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거센 바람에 아군 병사들이 고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기랄···.”
참모장의 보고에, 이반 코네프 상장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 그래서, 현재까지 아군의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현재 전투에 투입된 제1근위군과 5기갑군, 21군 예하 부대는 대부분 증원과 재편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다만, 아직 6군과 68군이 돈강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이들을 투입하면 반드시 전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젠장. 6군과 68군은 알보병들뿐이지 않나. 결국, 지금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면 승산이 없단 말일세!”
현재 남서 전선군은 사실상 주력부대를 전부 투입한 상태였다.
사실 코네프의 작전대로라면 지금쯤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해서 후방을 휩쓸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스탈린그라드의 6군을 철수시켰어야 할 터.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현재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고, 6군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후··· 그럼 기갑부대는 사정이 어떤가? 계속 공세 작전을 속행할 수 있겠나?”
“예. 아군의 공세가 막히는 바람에, 사실상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연료는 다행히도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참모장의 보고에 코네프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민에 잠겼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와 같이 계속해서 독일군에게 소모전을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선회해서 대책을 찾아볼 것인가.
‘확실히, 참모장의 말대로 지금쯤 독일놈들도 병력 소모가 만만치 않을 터. 보통 이 정도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면 물러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버티는 거지?’
이렇게 되면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었다.
원래부터 저놈들에게는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예비대가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독일군도 가용전력을 모두 쏟아부으면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거나.
사실 어느 쪽도 모두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지만, 코네프는 전자일 경우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만약 저놈들에게 충분한 예비대가 있는 상황이라면 어차피 이 싸움은 우리가 진 거나 다름없다. 그럼 후자의 경우라고 가정하고 대응하는 편이 맞겠지.’
만약 저놈들도 병력을 긁어모아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딱 한 번만 전선을 돌파하면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을 터.
하지만 문제는, 지금 남서 전선군에게는 그렇게 전선을 돌파해낼 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보병들을 끊임없이 투입하는 제파식 전술을 사용할까? 아니, 기관총과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저놈들 앞에다가 보병을 밀어 넣어봤자 개죽음만 당하겠지.’
그렇다고 기갑부대를 앞세우자니, 이들도 계속되는 격전으로 인해 전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하긴, 지금까지 몇 번이고 시도해도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던 놈들을 다시 한번 투입해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코네프는 결국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바로, 소련군 최고사령관 대리인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이었다.
“코네프 동지? 무슨 일이오.”
“주코프 동지. 청할 것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청이라. 일단 말해보시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주코프의 기색을 살피며, 코네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혹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에서 부대를 좀 차출할 수는 없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