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카잔스카야 돌출부 (4)
1943년 7월 2일, 오전 5시 30분.
카잔스카야 돌출부에서 남쪽으로 200km 거리에 위치한 노보체르카스크의 남부집단군 사령부.
“···각하, 사령관 각하, 지금 당장 일어나셔야 합니다.”
“흠···.”
아직 단잠을 자고 있던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은 누군가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침상 옆에는 참모부 소속 장교 하나가 모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일어났네. 무슨 일인가?”
“이른 시간에 깨워서 죄송합니다. 현재, 밀레로보 방면에서 소련군이 대대적인 포격에 나섰다는 보고입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아마 곧 놈들의 공세가 시작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런가··· 알겠네. 곧 갈 테니 자네는 먼저 참모부로 돌아가 있게나.”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참모부 장교를 먼저 돌려보낸 뒤, 모델은 자리에서 일어나 군복으로 주섬주섬 갈아입기 시작했다.
‘후··· 밀레로보 방면이라. 그쪽을 담당하던 부대가 아마 루마니아 5군단이었던가?’
게다가 며칠 전에는 소련군 기갑부대가 대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도 있었으니, 지금의 포격은 아마도 공세 징후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모델은 아직 졸린 몸을 이끌고 사령부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상황실의 문 앞에 도착하는 순간, 모델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루마니아 5사단으로부터 보고! 현재 소련군 보병부대와 교전 중! 시급히 지원이 필요하다!”
“6사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의 중전차를 포함한 대규모 기갑부대로부터 공격받고 있다고 합니다!”
“젠장··· 일단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고 해! 그리고 사령관님께서는 아직이신가?”
안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모델은 벌컥 문을 열고 상황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하하, 아무래도 다들 나를 찾고 있었나 보군.”
“아, 오셨습니까? 현재 소련군의 공세가···.”
“보아하니 상황이 꽤나 심각한 것 같군.”
“···예, 그렇습니다.”
참모장의 급박한 표정을 본 모델은 그에게 구구절절 캐묻는 대신, 상황실 한가운데에 놓인 작전 지도를 바라보았다.
현재 소련군은 루마니아 5군단이 맡은 전선을 공격해 모로조브스크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모델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역시 우리의 예상대로 루마니아군이 맡은 전선을 노렸군. 하지만 도대체 왜 6군단이 아닌 5군단을 공격한 거지? 설마 놈들의 목표는 로스토프가 아니었던 건가?’
사실 모델은 진즉부터 소련군이 다시 한번 루마니아군을 공격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이 4군단이 아닌 5군단을 공격한 것은 그로서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델은 소련군이 전선을 돌파한 다음에는 당연히 밀레로보를 지나 로스토프 방향으로 남하하리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 아니, 혹시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모델은 고개를 돌려 참모장에게 물어보았다.
“참모장, 이번 공세에 나선 소련군의 규모는 얼마인가?”
“아직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습니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바를 바탕으로 추론해보자면 최소 10만에 전차 500대 이상입니다.”
“흠···.”
참모장의 보고에 모델은 침음을 삼켰다.
고작 루마니아 5군단을 돌파하는데 10만에 전차 500여 대라.
그렇다는 것은, 후속 병력까지 고려하면 거의 15만 이상이 동원되었다고 봐야겠지.
‘그것도 카잔스카야 돌출부에 있는 소련군의 총원이 아닌, 이번 전선 돌파에 투입된 병력만으로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만한 대병력을 동원한 공세라면 로스토프를 포기할 리가 없을 터.
그런데 저들은 도대체 왜 공세 방향을 로스토프가 아닌 모로조브스크 방면으로 잡았단 말인가?
‘젠장···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군.’
그렇기에 모델은 지금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대응을 지시할 수가 없었다.
현재 밀레로보에는 파울루스가 보내준 3개 사단이 도착해 있는 상황.
이들을 전선에 투입하면 당장 루마니아 5군단은 구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들을 지금 투입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인가?
소련군의 진짜 의도를 알지 못하는 지금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예비대를 아껴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각하,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늦습니다!”
“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모델은 결국 참모장의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차피 지금 당장 전선이 뚫려버린다면 다음도 없을 터. 그렇다면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일단은 막고 봐야겠지.
“···좋네. 현재 밀레로보에서 대기 중인 707, 708, 712사단을 전부 투입하게. 이 자리에서 반드시 소련군을 저지해내도록!”
*****
그렇게 남부집단군 사령부에서 3개 사단의 증원 투입을 결정했을 무렵.
다른 한편, 밀레로보 방면에 위치한 루마니아군 진지에서는 6사단 소속 알렉산드루 일병이 필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병장님, 소련군이 끝도 없이 몰려옵니다!”
“버텨! 조금만 더 버티면 독일군이 온다!”
“젠장, 그놈의 독일군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알렉산드루는 분대장과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주고받으며 체코제 Vz.24 소총의 장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탄피가 튕겨 날아가고, 다시 탄알이 장전되었다.
그렇게 장전을 마친 알렉산드루는 다시 총을 견착하고는 다음 목표를 조준했다.
‘젠장맞을··· 다행히도 조준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우글우글 몰려와 주시는군.’
그러나 이런 속도로 한 발 한 발 쏴서 어떻게 소련군을 막아내겠는가?
사실 지금 이 참호 안에 있는 루마니아군 병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만약 독일군이 도우러 와주지 않는다면 이 참호가 그들의 무덤이 될 거라는 것을.
“버텨라! 독일군이 온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정말인지 아니면 단순한 바램인지 모를 말을 외치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병사들의 간절한 바람이 정말로 통한 것일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이 절망적인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바로, 참호 저편에서 들려오는 루마니아군 병사들의 외침이었다.
“와아아!!”
“독일군이 왔다!!”
‘뭐? 독일군이 왔다고?’
정말로 일어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그 말에,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던 알렉산드루도 손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저쪽 참호에 회녹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투의 양상은 완전히 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타당탕탕!!
투두두두두!
“···병장님, 저게 뭡니까?”
“글쎄. 독일놈들은 워낙 기관총을 좋아하니까, 저것도 기관총의 일종 아니겠냐.”
사실 알렉산드루는 독일군 병사들이 투입된 모습을 보면서도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도와주러 와준 것은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몰려오는 소련군에 비해 그 숫자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군 병사들이 바나나같이 생긴 탄창을 단 소총을 쏘기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한번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총알이 서너 발씩 날아가는 저 이름 모를 소총은 끝없이 밀려오는 소련군을 말 그대로 깨끗하게 지워버렸던 것이다.
그리나 독일군의 진정한 힘은 저따위 소총이 아니었다.
“···병장님, 소련군 전차가 접근 중입니다!”
“젠장, 제대로 보고해!”
“예! T-34/85가··· 7대에 JS-2 두 대, 총합 9대입니다!”
“빌어먹을···.”
독일군이 전선에 투입된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에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소련놈들도 보병만으로는 전선을 돌파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기갑부대를 투입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쩌긴. 9대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냐. 참호 밖으로 대가리 내밀지 말고, 판처 파우스트나 준비해놔라.”
“예.”
분대장의 지시에, 알렉산드루는 참호 안에 쌓아두었던 판처 파우스트 박스를 끌고 와 개봉했다.
현재 알렉산드루의 분대가 보유한 판처 파우스트는 총 4개.
전 탄을 명중시켜도 9대를 격파하기엔 부족한 숫자였지만, 그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차피 전부 발사해보기도 전에 죽을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판처 파우스트의 유효 사거리는 30m.
이를 맞추려면 우리가 이 거리까지 접근하거나, 저놈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이 중 몇 발이나 제대로 쏴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포기할 수도 없는 법. 알렉산드루는 판처 파우스트를 하나 꼬나쥐고는 수풀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알렉산드루, 조준할 때 저 중전차 말고 뒤에 있는 T-34를 노려라. 기왕이면 한 대라도 잡아야지.”
“···예, 알겠습니다.”
과연 맞출 수 있을까.
그렇게 알렉산드루가 떨리는 손으로 적 전차를 조준하고 있을 때였다.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알렉산드루의 조준기 위에 놓여 있던 T-34/85가 불타오르며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전차를 격파한 것은 알렉산드루가 아니었다.
“···뭐, 뭐지?”
“알렉산드루! 빨리 참호로 들어와라!”
“아, 알겠습니다!”
잠시 동안 멍청하게 그 전차를 바라보던 알렉산드루는 자신의 발을 잡아당기는 병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참호로 기어 돌아갔다.
“병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글쎄다. 네 눈으로 직접 봐라.”
알렉산드루는 병장의 말에 조심스럽게 참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들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독일군 중전차들이 버티고 서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소련군 전차들과 포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게 무슨···.”
쾅! 콰광!
달리고, 정지하고, 포탄을 튕겨내고, 또 발사한다. 그렇게 거대한 포성이 울려 퍼질 때마다 양측의 전차들이 하나둘씩 터져나간다.
그리고 참호 안에서 그 치열한 전차전을 바라보던 알렉산드루는 깨달았다.
이 싸움에서 그는, 아니 루마니아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
1943년 7월 5일.
소련군의 공세가 재개된 지 약 3일이 지났을 무렵.
빈니차의 총참모본부에서 남부집단군의 보고서를 읽던 나에게 갑작스레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육군 참모총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입니다.”
“그래, 나 룬트슈테트일세.”
“···예, 각하.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그 전화를 건 이는 바로, 국방군 총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였다.
“내가 듣자 하니, 지금 고작 3개 사단만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