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토성 작전 (4)
1943년 6월 13일.
소련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된 지 약 보름이 지나가고 있을 무렵.
루마니아 3군 사령관,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대장은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며 전선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럼 다음으로, 파블롭스크 방면의 2군단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약 2주 전 소련군의 대대적인 증원으로 인해서 전선이 크게 후퇴하긴 했으나, 현재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3차 방어선에서 소련군을 막아 세우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 거만한 독일군 나리들께서 드디어 와주셨나 보군. 제기랄, 어차피 이렇게 도와줄 거면 브카노브스카야 방면처럼 진즉에 와줄 것이지.”
결국, 독일군의 지원 덕분에 2차 공세를 막아냈다는 참모장의 보고에, 두미트레스쿠는 와인잔을 비우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독일군을 원망하는 데에는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두미트레스쿠는 진즉에 증원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남부집단군 사령부에서는 파블롭스크 방면의 공세가 기만 작전일 거라고 말하며 증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판단은 틀렸고, 그로 인해서 루마니아 2군단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서 수십 킬로미터를 퇴각해야 했다.
“망할 놈들··· 말로는 동맹이라고 하면서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네들 마음대로 하지 않나.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우리가 독일놈들의 전쟁에 피를 흘려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 덕분에 카프카스의 석유나 자원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최근에는 무기 지원도 해주고 있고 말입니다.”
“흥, 그깟 석유는 우리 루마니아에서도 나오네. 그리고 무기라 해봤자 결국 저놈들이 쓰다가 버린 4호 전차 나부랭이나 헤처가 아닌가. 결국, 신무기인 티거나 판터는 자기들끼리만 쓰고 말이야.”
“중전차는 독일군들도 수량이 부족해서 난리라고 하더군요. 뭐,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저희에게도 지원해주거나 판매하겠지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런 참모장의 대답에, 두미트레스쿠 대장은 루마니아군의 전력을 생각하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할··· 저 빌어먹을 이반 놈들은 독일제 75mm 주포로도 안 뚫리는 괴물을 끌고 오는데, 우리는 기껏해야 4호 전차나 헤처 따위로 맞서 싸우는 꼴이라니.’
사실, 두미트레스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루마니아군의 기갑전력이나 대전차 화기에 대해서 그리 큰 불만이 없었었다.
그동안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기껏해야 확보한 전선을 유지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주고 간 75mm 대전차포나 최근 도입되기 시작한 판처 파우스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꼭 전차가 필요한 경우에는 독일이 값싸게 넘겨준 헤처 구축전차나 4호 전차 부대를 투입해서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소련군이 T-34/85와 신형 중전차를 투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구경 주포로 화력이 강화된 T-34/85는 4호 전차나 헤처로도 우세를 점할 수 없었고, 병사들이 ‘소련제 티거’라고 부르는 JS-2 신형 중전차는 도무지 상대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JS-2 중전차가 전선에 나타날 때마다 루마니아군은 독일군 중전차 부대가 올 때까지 버티거나, 30m 이내까지 접근해서 판처 파우스트를 명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그래도 저 신형 중전차가 나타났다고 하면 독일놈들이 재깍재깍 와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두미트레스쿠 대장은 결국 독일군의 도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루마니아군의 처지를 생각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옆에서 두미트레스쿠의 기색을 살피던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가지 보고가 더 있습니다만.”
“뭐? 파블롭스크와 브카노브스카야 방면의 전황 보고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남부집단군에서 특별 지시를 하달해서 말입니다.”
“···특별 지시?”
두미트레스쿠는 참모장이 입에 담은 묘한 단어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상황 보고나 명령도 아니고 특별 지시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런 드미트레스쿠의 반응에, 참모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하하, 아무래도 이 명령서는 사령관님께서 직접 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서 이리 줘보게.”
그러나 서류를 받아서 읽어내려가던 드미트레스쿠는 곧, 참모장이 왜 굳이 특별 지시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후,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군.”
- 1943년 6월 12일, 소련군의 3차 공세에 대비하기 위한 특별 지시.
1. 지금까지 소련군의 움직임과 공세 규모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소련군의 3차 공세가 있을 것으로 판단됨.
2. 총참모본부의 판단에 따르면 3차 공세 지점은 높은 확률로 카잔스카야 방면이 될 것이라 추정됨.
3. 이에, 카잔스카야 방면의 전력을 증강하고 정찰을 늘릴 것을 권고함.
남부집단군 사령관,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 상급대장
그 명령서에 적혀있는 것은 바로, 소련군의 3차 공세에 대한 경고였다.
“파블롭스크 방면의 공세는 기만책일 거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소련군이 3차 공세에 나설 거라고? 허, 참···. 어처구니가 없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드미트레스쿠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그것을 책상 서랍에 던져 넣어 버렸다.
“각하, 따로 조치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조치? 저놈들이 말하는 카잔스카야 방면 말인가?”
“예. 그래도 총참모본부에서 저렇게 판단했다면 나름의 근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총참모본부라···.”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드미트레스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소련놈들이 원체 많다고는 하지만, 이만큼 병력을 투입한 마당에 설마 또 공세를 감행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3차 공세는 말도 안 되네.”
“···알겠습니다.”
그래, 소련군은 이미 거의 70만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시 공세에 나선다니, 그럴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두미트레스쿠는 남부집단군의 특별 지시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뒤, 두미트레스쿠에게 짤막한 보고서가 한 장 올라왔다.
“가, 각하···. 현재 소련군이 카잔스카야 방면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건 바로, 소련군의 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
1943년 6월 15일.
카잔스카야 방면의 1차 방어선에 위치한 Pak 40 대전차포 진지.
이곳에서 루마니아 13보병사단 소속, 로네스쿠 상병은 대전차포의 조준경 너머로 몰려오는 T-34 부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스카! 장전은 아직이냐! 벌써 소련군 전차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고!”
“죄, 죄송합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로네스쿠의 호통에, 얼마 전에 전입 온 신병이 75mm 철갑탄을 들고서 대전차포를 향해 뛰어왔다.
그리곤 포미의 약실에 포탄을 밀어 넣고서, 재빨리 폐쇄기 레버를 잡아당겼다.
철컥!
“철갑탄 장전 완료했습니다!”
“좋아! 기다리지 말고 바로 차탄 장전 준비해! 탄종은 무조건 철갑탄이다.”
“예! 알겠습니다!”
로네스쿠 상병은 조준을 정확히 맞춘 채 다리를 건너는 T-34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가리가 작고 포신이 짧은 걸 보니, 제일 선두에 선 놈은 아마도 구형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다리를 건너는 도중이니 신형이든 구형이든 간에 제일 앞에 있는 놈을 먼저 쏴야겠지.
그렇게 판단한 로네스쿠는 타이밍에 맞춰서 정확하게 발사 레버를 잡아당겼다.
투쾅!
사방에서 흙먼지가 피어나면서 거대한 대전차포가 발사의 반동으로 들썩거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리 위에서 선두를 달리던 T-34가 연기를 내뿜으며 멈춰 섰다.
“상병님, 격파입니다! 소련놈들의 전차가 멈췄습니다!”
“호들갑 떨기는. 차탄 장전해!”
그러나 로네스쿠는 흥분하지 않았다.
애초에 은폐한 상태로 기습하는 데다가 심지어 적들은 다리를 건너고 있으니, 못 맞추는 것이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뒤에 있는 놈들은 우리가 발포하는 순간을 놓친 모양이군. 그럼 차탄도 차분하게 조준해서 쏘면 되겠어.’
그럼 이번에는 대가리가 큰 신형 전차를 먼저 파괴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조준 레버를 돌리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로네스쿠는 뭔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T-34에서 전차병들이 기어 나왔던가?’
분명 전차에서 연기가 나는 것은 확인했으니, 명중해서 관통한 것은 분명할 터.
그렇다면 내부에 차오르는 연기 때문에라도 전차병들이 서둘러 탈출해야 정상인데, 아직까지도 T-34의 해치는 굳게 닫힌 상태였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로네스쿠가 다시 조준경을 돌려서 T-34를 바라보자, 그 전차의 포신은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그가 다급하게 발사 레버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조준경 너머의 T-34도 불을 뿜었다.
콰앙!!
로네스쿠의 눈앞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온갖 파편들이 포방패를 때리며 날아올랐다.
‘···빗나간 건가.’
“상병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그냥 근처에 포탄이 떨어진 것뿐이니까.”
로네스쿠는 군복과 철모 위에 떨어진 파편을 털어내며 피해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진지가 조금 무너졌을 뿐, 대전차포나 인명 피해는 전무한 상황.
그에 반해 로네스쿠에게 두 발을 연이어 관통당한 T-34는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라스카, 빨리 차단을 장전해라! 방금 전의 포격으로 우리의 위치가 노출됐을 거다!”
“예, 예!”
그렇게 T-34를 어렵사리 격파한 로네스쿠는 다음 목표를 찾아서 서둘러 레버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뒤, 두 대의 T-34를 추가로 격파한 로네스쿠의 눈에 무언가 이상하게 생긴 전차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저게 그 신형 T-34라는 건가?”
그 전차는 로네스쿠가 간부들에게 들었던 설명대로 둥글고 커다란 포탑에 길쭉한 포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 녀석의 차체는 아무리 봐도 T-34의 것은 아니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T-34랑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저게 신형 T-34든 아니든 간에 일단 한번 맞춰보자고.”
사실 이 정도 거리에서 측면을 노리는 이상, 어지간한 전차는 모두 관통되리라.
그렇게 생각한 로네스쿠는 적의 측면 장갑을 조준한 채 고민하지 않고 발사 레버를 잡아당겼다.
투쾅!
“···어?”
그러나 잠시 뒤, 조준경 너머에 보이는 광경은 그가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곳에 서 있던 그 전차는 흠집 하나조차 나지 않은 채 멀쩡한 모습으로 로네스쿠를 향해서 거대한 주포를 조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