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암살 (1)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각하. 돈강 방어선에서 병력을 차출하도록 한 명령은 곧 취소될 겁니다.”
“···총통의 명령이 취소될 거라고?”
“예, 그렇습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수화기 너머에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내, 만슈타인 원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만··· 그건 총통 각하의 뜻이 변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자네가 무언가 조치를 취하겠다는 건가?”
나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만슈타인의 물음에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제 곧 거사를 앞둔 지금, 나는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위험하더라도 후일을 생각해서 솔직하게 대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은 총통의 뜻이라고 둘러댈 것인가?
‘그래. 거사를 치른 다음까지 생각하면, 만슈타인 원수에게는 여기서 언질을 주는 편이 낫겠지.’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총통 각하께서는 여전히 병력을 차출하라고 성화이십니다만··· 그래도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 볼 작정입니다.”
“역시 그랬군. 정말 할 수 있겠나?”
“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네. 그럼 자네만 믿고 기다리겠네.”
내 대답을 들은 만슈타인 원수는 안도한 듯한 기색으로 말을 끝냈다.
그렇게 그가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나는 만슈타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각하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한번 말해보게.”
“만약에 총통께서 각하를 동부전선 총사령관 내지는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면··· 각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1943년 5월 17일.
빈니차에 위치한 베어볼프 총통 본부.
그날 이후, 암살을 위해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참모총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좋네. 그래서, 현재 북아프리카 쪽의 사정은 어떤가?”
“북아프리카 전선은 이전과 그리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현재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기갑군은 튀니지-트리폴리 일대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대치 중인 영미 연합군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 보고에 히틀러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흥, 역시 연합군 놈들의 수준은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거겠지. 어서 롬멜 장군에게 증원을 보내서 저놈들을 대서양까지 밀어버리도록 하게!”
“하지만 아프베어의 첩보에 따르면 연합군이 아프리카에 병력을 더 파견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 돈강 방어선 일대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현재 돈강 인근에서는 소련군의 신형 중전차가 관측되거나 대규모의 병력 이동이 확인되는 등,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공세 징후가 관측되고 있었다.
아마 소련군 측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최대한 은폐하려고 했겠지만, 워낙 작전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던 것이겠지.
그러나, 이런 보고들이 올라올 때마다 히틀러는 언제나 신경질적으로 똑같은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자네, 또 그 소리를 하는 겐가? 내가 전에도 분명히 말했지만, 이런 건 소련놈들이 일부러 흘리는 가짜 정보에 불과하네.
그럼 돈강 방어선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어디까지 진행되었나?”
“···예. 현재 2개 사단이 후방으로 차출되어 철도 수송을 기다리고 있으며, 차후에 1개 사단이 추가로 차출될 예정입니다.”
“그래, 그래도 내 지시대로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니 정말 다행이군. 지금 당장 북아프리카의 연합군 놈들을 밀어버리지 않으면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른단 말일세!”
돈강 방어선에 대한 것을 일축해버린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작전 지도를 이리저리 짚어가며 차출된 사단을 이용한 공세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히틀러가 열흘 뒤에 튀니지에 배치되리라 믿고 있는 저 2개 사단은 지금도 돈강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젠장, 열흘이라···. 점점 더 시간이 촉박해져 가는군.’
아직까지는 어떻게든 내가 가진 인맥과 권한을 이용해서 총통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지만, 이것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열흘이 지나버리면 지금과 같은 기만책도 들통나고 말 테니, 어떻게든 그 전에 거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좀처럼 생기질 않는단 말이지.’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나치당 수뇌부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내가 고민하는 동안, 북아프리카 공세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마친 히틀러는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도 총통 각하의 말씀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좋네. 그럼 다음 브리핑 때는 오늘 내가 말한 것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반격 작전 계획을 세워오게나.”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보고를 마치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히틀러가 입을 열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말해주는 것을 깜빡했네만, 이번 주 금요일에는 브리핑을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네.”
“이번 주 금요일··· 말씀입니까. 혹시 뭔가 다른 일정이 있으신 겁니까?”
“그래, 베를린에서 회의가 하나 있어서 말이지. 자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네.”
히틀러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회의? 총통이 베를린까지 가서 참석할만한 회의라면 분명 나치의 다른 수뇌부들도 모두 모일 터. 그렇다면···.’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히틀러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각하. 꼭 베를린에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총통께서 직접 베를린으로 가는 대신 다른 이들이 이곳으로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최근 전선의 상황이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만큼, 총통 각하께서 총사령부에 머물러주셔야 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내 설득에, 처음에는 헛소리로 넘기려던 히틀러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긴, 듣고 보니 자네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내가 가는 것보다 장관들이 오는 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좋소! 그럼 이번 주 금요일에 총통 본부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 회의 준비는 친위대에서 맡아서 할 테니, 파울루스 장군이 나서서 협조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히틀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금요일.
무장 친위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무수히 많은 차량들이 베어 볼프 총통 본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 지휘관 기를 단 군용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 있을 회의는 군사회의가 아니라 각 행정부처의 수장 회의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장관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원수 각하께서 이렇게 직접 환대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렇기에 사실 참모총장인 나로서는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굳이 앞에 나서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후··· 빌어먹을. 저놈들이랑 웃으며 덕담을 나눠야 하다니, 이것도 참 못 할 짓이군.’
하지만 이 고생도 오늘만 지나면 다 끝이 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지킨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바로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장관이었다.
“슈페어 장관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니, 설마 이제껏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하하, 장관님이 아직 안 오셨는데 먼저 들어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악수를 받는 슈페어 장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장관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건, 저를 도와주겠다는 얘기 말입니까?”
“예. 잠시 뒤, 회의 중에 제가 들어가서 장관님을 따로 부르겠습니다. 그때 저를 따라 나와주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슈페어는 아직도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잠시 나오라는 것뿐이니 속는 셈 치고서라도 한 번쯤은 내 지시에 따라주겠지.
그렇게 슈페어에게 말을 전한 나는 그를 배웅한 뒤, 다시 내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내 캐비넷 가장 아래에 넣어두었던 작은 서류가방을 꺼내 들었다.
‘후··· 제기랄. 드디어 때가 되었군.’
현재 시간은 1시 30분.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2시일 테니, 지연 신관 기폭장치를 최대한으로 돌려놓으면 시간이 딱 맞으리라.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서류가방을 바라보았다.
과연 히틀러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할 수 있다. 회귀 전의 역사에서는 허술한 계획 때문에 실패했을지 몰라도 오늘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폭발력이 부족해서 히틀러에게 경상밖에 입히지 못했던 원래의 역사와는 다르게,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이 서류가방 폭탄은 폭약의 양을 충분히 늘린 것이었다.
게다가 마침 오늘 회의가 진행되는 곳은 사방이 폐쇄된 콘크리트 벙커인 만큼, 폭발의 충격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일도 없으리라.
‘···그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기서 히틀러를 죽이지 않으면, 남은 것은 패전으로 가는 길뿐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가방을 열어서 기폭장치를 가동시켰다.
그리고는 서류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복도를 걸어서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앞에는 처음 보는 친위대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미 내가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유명한 덕분인지 내가 다가갔음에도 그들은 의심하지 않고 나에게 경례를 올렸다.
“하일 히틀러! 무슨 일이십니까?”
“고생들이 많군. 오늘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전달하는 것을 깜빡해서 말일세. 지금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내가 들어 보인 서류가방을 바라보며, 친위대 병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