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돈강 방어선 (3)
그 무렵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 위치한 최고 중앙 지휘 사령부, 스타브카에서는 주코프 대장과 바실렙스키가 한창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좋소. 그럼, 현재 전선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예. 국지적인 전투야 늘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작전적 수준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역시, 독일놈들도 마냥 좋은 상황인 것은 아닌 모양이군.”
주코프 대장은 바실렙스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작전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미 5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동부전선의 형세는 올해 초에 2차 레닌그라드 전투가 시작될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일선의 상황은 천왕성 작전이 실패하고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었던 5개월 전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영국과 미국 놈들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것이 우리의 예상보다 더 효과가 있었던 것 같군.”
“예. 솔직히 저로서는 기껏해야 10만밖에 안되는 병력을 유럽도 아닌 아프리카에 보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생각했습니다만, 의외로 독일놈들에게는 제법 부담이 된 모양입니다.”
“하긴, 아직까지 레닌그라드 포위망도 못 뚫고 있는 것만 봐도 저놈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은 확실하지.”
이 무렵 소련군은 대규모 병력과 자원을 잃고 공세 주도권을 빼앗겼던 올해 초와는 다르게 이미 양적인 측면에서 병력 우위를 회복한 상태였다.
게다가 북해를 통한 랜드리스 루트가 회복되면서 당장 시급한 문제였던 석유 문제도 어느 정도는 숨통이 트인 상황.
물론 북해 항로는 계속해서 크릭스 마리네의 견제를 받고 있는 만큼 전적으로 의지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비축한 물자만 해도 올해까지는 큰 문제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로 돈강 방어선을 공격하실 겁니까?”
“···흠.”
하지만 이렇게 나아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코프는 카프카스를 공격하겠노라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군에게는 이번 공세가 정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바실렙스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언제까지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긴, 바실렙스키의 말이 옳았다.
아무리 늦더라도 올해 안에는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할 터. 그렇다면 이제는 슬슬 카프카스 공세를 시작해야겠지.
‘···그래,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번 기회를 잡는 수밖에.’
결국 결단을 내린 주코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실렙스키에게 말했다.
“좋소. 그럼 한번 해봅시다.”
“예, 알겠습니다.”
주코프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리고 바실렙스키는 그런 주코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바로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 동지의 집무실이었다.
“최고 사령관 대리, 주코프 대장이네. 서기장 동지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뒤, 방으로 들어갔던 NKVD 요원이 다시 나와서 주코프에게 말했다.
“들어가 보셔도 좋습니다.”
“고맙네.”
그렇게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서기장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스탈린은 갑자기 찾아온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두 동지가 함께 찾아온 것을 보니, 아무래도 드디어 결론을 내리신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좋소, 그럼 한번 들어보도록 하지.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언제나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스탈린의 물음에, 주코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희 스타브카에서 여러 정보들과 가능성을 취합해서 고심한 결과, 이제 카프카스를 수복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꺼낸 주코프는 슬쩍 서기장 동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답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정말로 확실한 거요?”
“···예, 그렇습니다.”
“좋소. 그럼 그렇게 판단하신 근거를 들어보고 싶군. 한번 말씀해보시오.”
그가 연달아 패배한 탓일까. 아니면 이번 공세가 소련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스탈린 동지는 평소와는 다르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코프를 바라보며 캐물었다.
그러나 주코프는 그런 스탈린의 눈빛을 애써 담담하게 받아넘기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 우선 아군의 정찰결과, 현재 돈강 일대의 독일군은 그리 많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소? 내가 듣기로는 무려 6개 야전군이 카프카스를 철통 방어 중이라고 들었소만.”
“맞습니다. 6개 야전군이 카프카스를 방어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방어하고 있는 돈강 유역이 워낙 긴데다가, 이들 중 2개 부대는 허약한 동맹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근 돈강 일대에 배치된 병력이 차출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호오, 그게 정말이오?”
주코프는 드디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스탈린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아무래도 북아프리카로 간 영미 연합군 놈들이 우리의 예상보다 잘 해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쯧, 그동안 바다 건너 불구경만 하더니 이제야 겨우 밥값을 하는군.”
“하하, 이게 다 서기장 동지께서 직접 나서서 압박하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괜한 말은 할 필요 없소. 그럼 이번 공세에는 병력을 얼마나 동원할 예정이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탈린의 표정은 약간 풀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코프는 자신감을 얻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우선, 현재 돈강 일대에서 대치 중인 남서 전선군, 돈 전선군,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80만에 추가로 예비대 50만을 더해서 총합 130만을 동원할 예정입니다.
거기에, 이번 2차 레닌그라드 전투를 통해서 성능이 입증된 T-34/85도 대거 투입할 예정입니다.”
“2차 레닌그라드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소만, 벌써 그만큼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단 말이오?”
“예, 충분히 가능합니다.”
사실, 주코프로서는 완전히 계산 밖의 일이었던 이번 레닌그라드 전투는 의외로 소련군에게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재 소련에게 부족한 자원인 기갑부대가 소모된 것은 처음의 진격 때뿐이었고, 그 후로는 계속 보병들만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외로 이번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서는 로코솝스키 중장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모르겠군.’
주코프는 내심 로코솝스키에 대한 평가를 살짝 상향 조정하며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다수의 보병들이 희생되긴 했지만, 그 대신 석유를 얻었으니 레닌그라드 전투는 사실 아군의 승리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적어도 이번 작전 동안에는 석유의 걱정 없이 자유롭게 기동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석유 문제는 좋소만, 독일군의 신형 전차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장군은 이번 전투에서 T-34/85의 성능이 입증되었다고 말했지만, 결국 독일놈들의 중전차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 않소?”
예상외로 서기장 동지는 붉은 군대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코프도 자신이 있었다.
“바실렙스키 동지, 그 자료를 좀 꺼내주시겠소?”
“예, 여기 있습니다.”
바실렙스키는 마치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스탈린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 보고서에는 어떤 전차의 설계도와 제원표, 그리고 실물 사진이 하나 꽂혀 있었다.
“···이게 무엇이오?”
“전에 보고드렸던 신형 중전차, JS(이오시프 스탈린)-1의 사진입니다. 오늘 아침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초도 생산량 100여 대가 드디어 출하되었다고 합니다.”
“오오··· 이것이 신형 중전차인가. 설계도로만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르군.”
서기장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보고서에 꽂혀 있는 흑백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코프는 그런 그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진 속의 그 전차들은 이미 기차에 실려서 돈강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중전차들을 투입한다면, 서기장 동지께서 걱정하시는 독일놈들의 호랑이와 표범도 박살낼 수 있을 겁니다.”
잠시 뒤,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스탈린은 고개를 들어 주코프에게 말했다.
“좋소. 그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카프카스를 탈환해내시오!”
“예, 물론입니다!”
*****
그 무렵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 위치한 소도시, 일로프리야.
이곳의 철도역에서 근무하는 알렉세이 상병은 오늘도 경계 근무를 서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제기랄. 언제까지 이런 보병 짓을 해야 하는 건지, 원.”
“알렉세이 상병님, 원래 보병이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래, 임마. 나 전차병이라고 전에도 얘기하지 않았었냐?”
“죄송합니다,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알렉세이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병을 잠시 노려보았다.
“후, 그래. 네가 아니라 다른 놈한테 말해줬었나 보지.”
“그런데 전차병이신데 왜 이렇게 경계 근무를 서고 계십니까?”
“···그야 전차가 격파당했기 때문이지.”
사실 알렉세이는 천왕성 전투 당시 투입되었던 T-34 부대의 전차 운전병이었다.
그런데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도중 적 기갑부대와 조우하는 바람에 격파되었고, 그곳에서 간신히 탈출한 뒤로 지금까지 새로운 전차를 배정받지 못한 것이었다.
‘젠장, 우리한테도 그런 중전차만 있었더라면···.’
알렉세이는 자신을 격파한 그 거대한 중전차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서 있던 신병이 알렉세이에게 말했다.
“어? 알렉세이 상병님, 저기 기차가 들어옵니다.”
“기차야 뭐 매일 들어오는 거잖냐.”
“그런데 저기 실려있는 거 전차 아닙니까?”
“···뭐?”
드디어 이 보병 신세를 탈출할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알렉세이는 고개를 돌려 기차를 바라보았다.
“어?”
확실히 신병의 말대로, 지금 들어오는 기차에 실려있는 화물은 전차임에 틀림 없었다.
대충 보더라도 궤도가 달린 차체에 포탑과 주포가 달려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에 실려있는 전차는 알렉세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T-34 전차가 아니었다.
딱 봐도 엄청나게 거대한 차체에 마치 KV-1의 것처럼 생긴 넓적한 궤도. 그리고 납작하고 둥그런 포탑에 달린 압도적인 크기의 주포까지.
“설마 이거··· 신형 중전차인가?”
알렉세이가 그토록 바라던, 티거에도 맞설 수 있는 중전차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