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돈강 방어선 (2) >
1943년 5월 4일.
히틀러의 고집에 의해서 남부집단군의 병력을 차출하기로 결정된 바로 다음 날.
아침 일찍 총참모본부로 출근한 나는 집무실에 앉아서 어제 히틀러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래, 그러니 남부집단군에서 병력을 좀 차출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요. 지금 당장 병력을 차출해서 북아프리카로 파견하도록 하시오!’
“후··· 빌어먹을. 돈강 방어선에서 병력을 차출하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충수라고밖에는 생각되질 않는군.”
내가 가진 회귀 전의 지식으로 미루어보면, 현재 소련군은 카프카스를 되찾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미 소련군의 공세는 없으리라 확신하고 남부집단군의 병력을 차출하도록 못 박아버린 상황.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총통의 명령대로 병력을 북아프리카로 보낼 것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일단은 병력 차출을 최대한 미루면서 그동안 다른 수를 찾는 수밖에.’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명령을 수행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터.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바로 부관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그래, 일단 돈강 방어선의 구축 현황 보고서와 남부집단군의 편제도, 그리고 북아프리카 전역의 보고서를 모두 찾아서 가져와 주게나.”
“예, 알겠습니다.”
나는 부관이 서류들을 찾아올 동안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참모총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그러나 집무실로 들어온 이는 내가 방금 보냈던 부관이 아니라, 참모차장 호이징거 중장이었다.
“호이징거 중장? 자네가 웬일인가.”
“아무래도 찾으시는 자료가 많은 듯해서 제가 직접 설명드리고자 왔습니다.”
나는 엄청난 양의 서류 더미를 들고 있는 호이징거 중장의 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것을 일일이 다 읽어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지.
“자네는 저걸 다 읽어보았나?”
“꼼꼼히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씩 훑어보기는 했습니다.”
“좋네. 그럼 돈강 방어선 구축 현황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보게나.”
“예! 현재 돈강 방어선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3중 구조로 구축되고 있습니다.”
내 물음에 호이징거 중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서를 하나 책상 위에 올리며 말을 꺼냈다.
“강변에서부터 철조망 지대, 참호와 기관총 진지, 그리고 대전차포 진지 순인 건가.”
“맞습니다. 그렇게 3중으로 이루어진 방어진지가 2~3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는 야포와 공군의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연락체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나는 보고서에 그려진 방어진지의 배치도를 보면서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철조망과 보병 진지에서 적의 발을 묶어두는 동안 대전차포와 야포, 공습으로 적을 격멸하겠다는 건가. 역시 모델, 그 친구에게 맡긴 것이 정답이었군.’
현재 돈강 방어선의 총사령관을 맡은 이는 르제프 방어전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수개월에 걸쳐서 공들여서 방어진지를 구축한 결과, 지금 돈강 방어선은 마치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소련군 진지와 같은 모습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쿠르스크 전투 당시의 소련군 진지와 우리의 돈강 방어선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방어진지는 예상 이상으로 훌륭하군. 그럼 이 돈강 방어선의 종심은 얼마나 되는가?”
“워낙 방어해야 할 전역이 광활하기에 각 지역에 따라서 편차가 있겠습니다만··· 보고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최소 15km에서 최대 20km 정도가 확보된다고 합니다.”
“···최대 20km라. 생각보다 짧군.”
“대신, 적의 공세가 확인되면 후방에서 대기 중인 기갑부대를 투입해서 격퇴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바로, 쿠르스크 전투와는 다르게 지금의 우리가 경계하고 방어해야 할 면적이 너무 넓다는 것이었다.
현재, 돈강 방어선이 구축되고 있는 핵심 방어 지역은 파블롭스크부터 스탈린그라드 일대까지 총 430km에 달하는 상황.
그렇기에 아군의 방어선은 필연적으로 얇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서 모델 장군도 방어선에서 발을 묶어두는 동안 예비대를 투입해서 적을 격퇴하는 기동 방어 전술을 채택한 것일 터였다.
‘젠장, 곤란하게 되었군···.’
발터 모델 상급대장의 돈강 방어선 보고서를 읽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당장 이 보고서만 보더라도 지금 저곳에서 병력을 더 차출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총통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들어 호이징거 중장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북아프리카 전역 쪽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일단은 지난번 트리폴리 전투의 패배 이후로 연합군은 양측 모두 물러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에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군단과 아르님 상급대장의 5기갑군이 합류해서 아프리카 기갑군이라는 이름으로 부대를 재편했습니다.”
“그럼 최고 지휘관은 롬멜 원수가 맡고 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현재, 아프리카 기갑군은 서쪽으로는 튀니지 국경까지, 동쪽으로는 트리폴리와 벵가지의 중간지점까지 연합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연합군을 밀어내고 튀니스와 트리폴리 일대를 확보했다고 해서 우리 추축군이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이번 승리는 미군의 허접함과 중전차 대대의 활약이 맞물린 결과였을 뿐, 지금 아프리카 기갑군의 전력으로는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는 병력을 얼마나 증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연합군이라면··· 몽고메리의 영국군 말입니까? 아니면 서쪽의 영미 연합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영미 연합군 쪽 말일세.”
호이징거 중장은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려면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만, 당장 말씀드리자면 못해도 최소 3개 사단 정도는 증원되어야 아군의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개 사단이라···.”
나는 그의 대답에 북아프리카 일대의 작전 지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의 전력 차와 연합군의 증원 속도를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병력을 일거에 투입해야 유의미한 반격 작전을 실행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도 병력이 부족한 돈강 방어선에서 그만한 병력을 차출해버린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전력 공백이 생길 터였다.
“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돈강 방어선 일대와 북아프리카 전선의 작전 지도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하자, 호이징거 중장이 무언의 눈빛을 보내며 물어왔다.
아마 그가 보기에도 지금 돈강 방어선에서 병력을 빼내는 것은 악수라는 것이겠지.
그러나 나로서는 일단은 차출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보기에, 소련군이 돈강 방어선을 공격한다면 어디를 공격할 것 같은가?”
“제 생각에는 아마 루마니아 3군이 맡은 중앙 방어선을 돌파해서 아조프해까지 진격할 것 같습니다.”
“카프카스 일대에 있는 남부집단군을 모두 차단할 거라는 거로군.”
“예, 그게 아니라면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는 것도 가능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한번 실패했던 작전을 다시 시도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병력을 차출해야 가장 문제가 없을 것인가.
‘11군? 아니,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을 이어주는 중간지대가 약해지면 곤란하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고 있는 6군도 빼내기는 어렵지.’
그럼 남은 것은 돈강 만곡부의 4기갑군과 전략 예비대인 1기갑군 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우선 4기갑군과 1기갑군에서 1개 사단씩을 차출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내 말에 호이징거 중장은 살짝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내 명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만··· 병력을 선별하여 차출하고 이송하는 과정은 최대한 천천히 진행하도록 하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물론입니다. 각하의 뜻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호이징거 중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적어도 한 달 정도는 이걸로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그 한 달 동안에 소련군이 돈강 일대에서 뭔가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최선이겠지만, 아마 놈들도 그렇게 기민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울 터.
그렇다면 그 전에 이쪽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렇게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책상에 놓여있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 별일이군.”
이렇게 예정에도 없이 걸려온 전화라면 필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이거나, 반대로 정말 긴박한 사건일 터.
나는 살짝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육군 참모총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일세. 무슨 용무인가?”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의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파울루스 원수 각하. 저는 아프베어의 총장을 맡고 있는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아프베어에서 저에게 무슨 용무로 연락하셨습니까?”
나는 갑작스러운 카나리스 제독의 전화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서 언젠가 연락이 올 것이라는 것은 나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카나리스 제독은 검은 오케스트라의 보안은 담당하고 있는 이인 만큼,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설마, 이렇게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전화로 나에게 접촉해올 줄이야.
‘아니, 이런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대놓고 연락한 만큼 오히려 의심받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내가 내심 감탄하는 동안, 카나리스 제독이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저희가 영국 쪽의 첩보원을 통해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북아프리카 일대에 병력이 증파될 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이에 대해서 참모총장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혹시 시간이 괜찮으십니까?”
북아프리카 일대에 연합군이 증원된다라.
이런 건 그저 구실에 불과할 뿐, 그가 나를 만나고자 하는 진짜 이유는 아마도 검은 오케스트라에 관한 것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나도 피할 이유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언제 보시겠습니까?”
< 76화. 돈강 방어선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