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돈강 방어선 (1) >
“그렇다면 차라리, 아직까지 별다른 전투도 치르지 않고 있는 남부집단군에서 병력을 차출해 북아프리카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너무나도 뜬금없는 히틀러의 제안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총통 각하. 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지만,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돈강 방어선에 배치된 남부 집단군은 차출할 수 없습니다.”
1943년 5월 현재, 우리 추축국 진영에게 있어서 카프카스 일대는 이제 빼앗겨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이제 거의 2000km에 달하는 동부전선과 지중해 너머 북아프리카 전선을 동시에 지키기 위해서는 카프카스산 석유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그 순간부터 이미 전역의 규모는 독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독일군이 이렇게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넓은 전선을 커버할 수 있는 기갑전력과 공군력의 우세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앞으로도 계속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사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고작 북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령 식민지 따위를 되찾기 위해서 돈강 방어선의 남부집단군을 차출하자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내 설명에도 그런 것쯤은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꺼냈다.
“하하, 물론 파울루스 원수의 말대로요. 전쟁의 관점에서 보든, 경제, 정치의 관점에서 보든 현재로서는 북아프리카보다 카프카스의 유전이 더 중요한 것이 맞지.”
“···그렇다면 돈강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만큼은 결코 차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말에는 동의하기가 좀 힘들군.
파울루스 장군, 지금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막대한 병력을 소모한 상태요. 그러니 우리가 남쪽에서 병력을 좀 빼내더라도 당장 카프카스를 공격하기는 어렵겠지.
그리고, 놈들이 작전 준비를 모두 마치고 공세에 나설 때쯤에는 내가 지시했던 추가 징집이 모두 완료되어서 돈강 방어선의 전력이 회복된 후일 거요. 그렇지 않소?”
“흠···.”
나는 예상외로 그럴싸한 히틀러의 주장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총통의 주장대로 소련군이 당장 공세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면 돈강 방어선에서 병력을 차출해 북아프리카로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만약 지금 남부 집단군에서 1개 야전군을 차출해 튀니지로 보낼 수만 있다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있는 영미 연합군 정도는 수개월 내로 전부 대서양에 수장시켜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소련군의 전력이 모두 소진되어서 공세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인지 확신할 수 없단 말이지.’
내가 알고 있는 원래의 역사에서는, 1943년에 소련군은 거의 600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었다.
그렇다면 모스크바 전투와 천왕성 작전의 실패로 막대한 병력을 손실한 지금, 소련군의 전력은 대략 500만 정도라고 가정하면 되겠지.
‘후, 빌어먹을···. 줄어든 게 500만이라. 정말 말도 안 되는 숫자로군.’
그렇게 소련군의 규모를 가정한 나는 동부전선 작전 지도 위에 표시된 소련군의 배치 현황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대조해봐도, 현재 전선에서 아군과 대치 중인 소련군의 전력은 기껏해야 430만을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부족한 숫자가 크지 않으면 그냥 우연이나 오차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수십만 규모의 병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숨기는 것이 있을 터.’
그렇다는 것은 역시, 지금 소련놈들은 후방에서 카프카스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 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각하, 역시 남부 집단군에서 전력을 빼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인가?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보시게.”
젠장, 히틀러가 납득할 만한 이유라.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회귀 전의 지식으로 소련군의 작전을 추측해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이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얼마 전에 돈강 일대에서 소련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소련이 카프카스를 공격하리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돈강 방어선은 전력을 유지하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흠, 그런 보고가 있었소? 나는 들은 기억이 없소만.”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 남부집단군에서 올라온 보고인데, 아직 정보가 불확실한지라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히틀러의 시선을 최대한 담담히 마주 보며 답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총통은 내가 말한 보고의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젠장··· 브리핑이 끝나면 위조문서라도 하나 만들어야겠군.’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표정으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카프카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각하, 그럼 대신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말이오?”
반색하며 나를 바라보는 히틀러에게, 나는 작전 지도 위의 한 점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바로 이곳, 레닌그라드에 있는 병력을 철수시켜서 북아프리카로 보내는 겁니다.”
“···레닌그라드를 포기하자고?”
다른 곳도 아닌 레닌그라드를 포기하자는 말에 히틀러는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 현재 레닌그라드에는 팔슈름예거 부대를 포함해 2개 군단이 투입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빼내서 북아프리카로 보낸다면 돈강 방어선을 위태롭게 만들지 않고도 북아프리카를 되찾을 수 있으며, 바다를 통해 레닌그라드로 보급을 유지하는 고생을 덜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신에 레닌그라드를 잃어버리겠지. 다른 곳도 아닌 레닌그라드를 말이야.”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각하, 현재 카프카스와 북아프리카, 레닌그라드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저는 당연히 레닌그라드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1943년 현재, 우리 독일군의 입장에서 실리를 따져보자면 레닌그라드는 그다지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다.
개전 초기에는 소련과의 철도 호환성 문제 때문에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 레닌그라드를 통한 해운 보급이 중요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소련의 주요 노선을 독일식 표준궤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레닌그라드는 사실상 정치적인 상징성을 제외하면 없어도 그만인 도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카프카스는 석유와 여러 희귀 광물 등, 추축국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자원의 산지였고, 북아프리카는 남유럽과 이탈리아를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었다.
아무리 히틀러가 땅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는 해도, 그는 천상 정치인인 만큼 북아프리카나 카프카스를 잃었을 때 얼마나 큰 타격을 입을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레닌그라드를 포기하자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작전 지도를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긴 총통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뒤, 히틀러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레닌그라드를 포기할 수는 없네. 도대체 어떻게 얻은 도시인데 그곳을 이렇게 홀라당 넘겨준단 말인가?”
“가, 각하···!”
“그리고 방금 전에 자네가 말했던 그 보고. 그것도 아직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힘없는 내 대답에, 히틀러는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련군의 기만책이지 않겠나? 아니, 생각해보면 뻔한 일이지. 아무리 저 소련놈들의 병력 동원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레닌그라드에서 입은 피해를 벌써 복구했을 리가 없네!”
“······.”
나는 광기에 가득찬 히틀러의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레닌그라드와 카프카스, 북아프리카를 동시에 손에 넣는 단꿈에 젖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된 것인가.’
“그래, 그러니 남부집단군에서 병력을 차출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요. 그러니 지금 당장 병력을 차출해서 북아프리카로 파견하도록 하시오!”
이미 욕망에 홀려버린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구태여 반박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직접 남부집단군에서 적절한 부대를 선별해 파견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하하, 역시 파울루스 장군은 말이 통하는구려. 아주 좋소. 일이 진행되는 대로 나에게 직접 보고하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그것으로 총통 회의는 끝났다.
그러나 나는 회의가 끝난 뒤에도 가만히 서서 흡족한 표정으로 걸어 나가는 히틀러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
1943년 5월 7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의 스타브카.
이곳에서 최고 사령관 대리, 주코프 대장은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후··· 그래, 그래서 레닌그라드 공략은 어떻게 되시었소? 좀 진전이 있소?”
“그, 그게···.”
그 전화기 너머에 있는 상대는 바로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 로코솝스키 중장이었다.
“죄송합니다, 주코프 동지.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과 병력을 주시면···.”
주코프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간절한 목소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로서는 로코솝스키 중장의 행동을 도무지 탐탁게 볼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지연전을 펼치며 시간을 끌었어야 할 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는 바람에 불필요한 병력을 대거 투입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가 로코솝스키의 작전을 저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서기장 동지께서 이 공세를 지지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어제 도착한 이 한 장의 보고서 분에, 서기장 동지께서도 드디어 레닌그라드 공략을 포기하는 것에 동의하신 것이다.
“아니, 됐소. 아무리 생각해봐도 병력을 더 투입한다고 해서 레닌그라드를 점령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되지가 않는군.
볼호트 전선군은 더 이상의 모든 공세를 중단하고 현재의 위치만 사수하시오. 이는 스타브카의 공식 명령이오. 알겠소?”
“···알겠습니다.”
주코프는 전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은 뒤,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왠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기회가 왔구만.”
그 보고서에 적혀있는 것은 바로, 돈강 일대의 독일군 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 75화. 돈강 방어선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