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검은 오케스트라 (1) >
“그럼 이제 북아프리카의 프랑스군을 구원하고, 연합군을 쳐부수기만 하면 되겠군. 한번 작전을 입안해보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난 뒤, 회의실을 빠져나온 나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빌어먹을. 점점 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교착상태에 빠진 2차 레닌그라드 전투부터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그리고 막대한 병력이 발 묶인 카프카스 방어 계획까지.
내 예상과는 다르게, 1943년의 전황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든 소련과의 전쟁을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총통의 대미 선전포고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렸어.’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징병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외국인 노동자 동원이라니.
결국, 이것은 당장의 욕심 때문에 장기적인 불안을 안고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비록 아직까지는 우리 독일이 유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점점 더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무래도 검은 오케스트라와의 연락을 좀 서둘러야 할 것 같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로 나치 독일의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였다.
“안녕하십니까, 참모총장님. 아니, 원수 각하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슈페어의 모습에 경계하면서도,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화답했다.
“하하, 어떻게든 편하게 불러주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군수품의 생산에 대해서 참모총장님의 고견을 여쭤보고 싶어서 말이죠.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겠습니까?”
‘군수품의 생산에 대해서라···.’
이 무렵,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총애를 받아 군비 생산과 전시 경제에 관해서 사실상 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전후에 ‘유럽의 경제 독재자’라고까지 불리는 그가 군수품 생산 문제 때문에 굳이 나를 찾아온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나에게 뭔가 다른 용건이 있는 건가?’
내가 슈페어를 다시 바라보자, 그는 왠지 모르게 초조한 기색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흥미가 동한 나는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장관님과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고 싶었던 참인데 잘 되었군요. 제 집무실로 같이 가시죠.”
“하하, 감사합니다.”
*****
그리고 잠시 뒤,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나와 마주 앉은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각하, 각하께서는 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리라고 전망하십니까?”
“전쟁이라면, 소련과의 전쟁 말입니까?”
“아닙니다. 미국, 영국 등··· 우리가 싸우고 있는 이들 모두와의 전쟁 말입니다.”
이 전쟁의 전망이라.
조금 뜬금없는 슈페어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글쎄요. 뭐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저희가 유리한 상황이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애매모호한 내 대답에, 슈페어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각하께서는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2년 안에 모두 결착이 날 겁니다.”
나는 슈페어의 물음에 곧바로 답했다.
슈페어는 망설임 없이 즉답하는 내 모습에 놀란듯했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2년 뒤면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1945년 7월 전에 끝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2년이라.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제가 판단하기에 2년 내로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면 저희 독일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전시 경제를 담당하는 알베르트 슈페어는 내 말에 동감하는지 홀로 생각에 잠겨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혹시, 군비 생산에 뭔가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최근에 고민이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고민이라면, 어떤 겁니까?”
슈페어는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후···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최근 들어 전선이 급격하게 확산되는 바람에 군비 생산이 소요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당 내부에서도 저를 방해하려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갑작스러운 슈페어의 고백에 일단 말을 아꼈다.
‘당 내부의 적이라면···. 혹시 나치 고위층끼리의 권력 투쟁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건가.’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문제라면 내가 도와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페어는 생각이 달랐는지,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그래서 군수품의 원활한 생산을 위해서라도 각하께서 좀 도와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물론 저도 도와드리고는 싶습니다만, 군인인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총통께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파울루스 각하 아니십니까.”
“아니···.”
나는 그의 말에 거절하려다, 알베르트 슈페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슈페어라···.’
1943년 현재, 군수부 장관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슈페어는 나치당 내부에서도 괴링이나 힘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입지가 높아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전후에 나치 활동을 반성하고 참회한 만큼, 나치즘과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아니, 잘만 하면 이 친구를 이용해 볼 수도 있겠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웃으며 슈페어에게 답했다.
“좋습니다.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장관님을 도와드려야지요.”
“···정말입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총통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나눴다.
*****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오랜만에 베를린으로 출장을 온 나는 업무를 마친 뒤 잠시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잠시 거리를 걷고 있자, 곧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나에게 다가와서 멈춰섰다.
“혹시, 파울루스 각하가 맞으십니까?”
“맞소만.”
“뒷자리에 타시면 됩니다.”
내가 뒷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 옆자리에는 먼저 타고 있던 손님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그래, 정말 오랜만이군.”
그곳에 앉아있는 것은 바로, 사복 차림의 프란츠 할더 전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원수 계급장을 단 내 모습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요즘 참모본부는 좀 어떤가?”
“뭐, 참모본부가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예전과 똑같습니다.”
“그런가. 그래, 자네라면 뭐 잘 해내겠지. 총통을 상대하는 것도 말이야.”
나는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뒤, 차는 베를린 외곽의 어느 저택 앞에 멈춰섰다.
“내리게. 여기일세.”
“예.”
먼저 내려서 문 앞으로 다가간 할더는 문고리를 두드리기 전에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았다.
“후우···. 자네를 여기로 데리고 오는 것이 정말 잘 하는 짓일지 모르겠군.”
“여기까지 와놓고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쯧, 들어오게.”
그렇게 할더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현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하게. 이분이 내 전임 참모총장이셨던 루드비히 베크 상급대장이시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현재 육군 참모총장직을 수행 중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입니다.”
베크는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경례를 받아주었다.
“오래 살다 보니 원수 각하의 경례도 다 받아보는군. 일단 앉아서 얘기하세.”
베크는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러나 자리에 앉은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베크는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는 찰나 베크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할더 상급대장을 신뢰하는 만큼, 그의 소개를 받아 온 자네도 신뢰하네.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군. 자네는 진심으로 우리와 함께할 생각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각하. 저는 히틀러가 살아있는 한 저희 독일은 이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나는 자네가 히틀러와 상당히 가까운 인물이라고 들었네만.”
나는 고개를 들어 베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모호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사실 그로서는 아무리 할더의 소개를 받았다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나를 신뢰하기는 어려울 테지.
아니, 애당초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만으로도 저쪽으로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후, 신뢰라···. 곤란하군.’
사실, 장기적으로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뢰를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 신뢰를 얻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었다.
1943년 현재, 전황은 점점 더 꼬여가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1945년 7월까지는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언제 이들의 마음을 얻고 히틀러를 제거한단 말인가?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뭐, 각하께서 저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쩌면 히틀러가 참모총장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보내서 당신네 검은 오케스트라의 구성원들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
“하지만 만약 제가 스파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네들의 계획과 구성원을 이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프베어의 카나리스 제독부터 트레스코프 원수, 비츨레벤 원수, 그리고 보충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상급대장까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자, 자네···!”
갑작스러운 내 말에 나를 바라보던 베크 상급대장과 할더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등 뒤에서는 철컥거리는 권총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말씀드리자면, 지금 당신들이 계획한 발키리 작전은··· 아마 실패할 겁니다.”
< 66화. 검은 오케스트라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