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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원수가 되었다-55화 (55/157)
  • < 55화. 스탈린, 그리고 루즈벨트 (2) >

    루즈벨트는 휠체어를 끌고서 천천히 대통령 집무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보좌관이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화는 이미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바로 받으시면 됩니다.”

    “고맙네. 다들 이제 그만 나가보게.”

    “예.”

    그렇게 모두가 나간 뒤,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루즈벨트는 책상 위에 놓인 검은색 전화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오시프 스탈린라···.’

    세계 유일의 공산주의 국가이자 나치 독일을 상대로 무려 2년이나 버틴 강대국, 소비에트 연방.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금 이 수화기 너머에서 루즈벨트를 기다리고 있다.

    강철의 대원수는 과연 그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후···.”

    루즈벨트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뒤,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반갑소. 미합중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요.”

    그렇게 입을 뗀 루즈벨트는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전화기 너머에서는 마치 원어민처럼 유창한 발음의 영어로 대답이 돌아왔다.

    “소비에트 연방의 중앙위원회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오.”

    생각보다 젊은 것처럼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던 루즈벨트는 곧, 이것이 스탈린이 아니라 통역사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스탈린 씨. 아니면 서기장 동지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어쨌든, 무슨 일로 이렇게 연락하셨습니까?”

    약간의 농담이 섞인 루즈벨트의 말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였다.

    “루즈벨트 동지. 그쪽에서도 이미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만, 이쪽의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소.”

    “예, 카프카스가 독일 놈들의 손에 떨어진 것은 우리 미합중국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건 단순히 유감으로 끝낼만한 일이 아니오. 이제껏 우리 소비에트 연방과 인민들은 이렇게나 많은 피를 흘렸는데, 당신네 미국인들이 하는 일이라곤 고작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뿐이란 말이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물자를 보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예상했던 대로, 대놓고 미국의 참전을 요구하고 나서는 스탈린의 말에 루즈벨트는 랜드리스를 언급하며 슬쩍 말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스탈린은 이 정도로 간단히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었지. 하지만 이젠 아니오. 이제 우리들은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도, 당신네들의 랜드리스도 없이 홀로 독일에 맞서 싸우는 처지가 되었소.

    솔직하게 말해서, 과연 이런 싸움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군.”

    “홀로라니요, 지금도 북아프리카에서 싸우고 있는 영국을 잊으시면 처칠 수상이 섭섭해할 겁니다.”

    “흥! 북아프리카에 있는 독일놈들을 다 합쳐봐야 몇만 명이나 된다고 그러시오.

    그리고, 당신들 미국은 정말 독일과 싸울 마음이 있기는 한 거요? 전쟁이 시작된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아직 선전포고조차도 안 하고 있지 않소!”

    “···당신네 공산주의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국가에는 ‘의회’라는 게 있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외교적인 수사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점점 더 격해져 가다가,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후··· 이대로는 답이 안 보이는군.’

    루즈벨트는 생각보다 완고한 스탈린의 태도에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래도 방금 전의 대화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스탈린이 무엇을 바라고 연락을 한 것인지는 얼추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련은 아직 독일과의 전쟁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다만, 우리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끌어내려고 앓는 소리를 하고 있을 뿐.

    그럼 결국, 어떤 지원을 얼마나 해줄 것인가의 문제인가.’

    그렇게 상황을 판단한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

    “스탈린 씨. 우리 이제 그만 서로에게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당신들, 정말 독일이랑 강화하실 생각입니까?”

    갑자기 직구를 던지는 루즈벨트의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 잠시 뒤, 상대방은 러시아 억양이 짙게 묻어나는 투박한 영어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루즈벨트는 직감했다.

    이건 이오시프 스탈린, 본인의 말이라고.

    “당신네들 미국이 계속 이런 식으로 방조하기만 한다면, 우리로서는 독일과 강화를 하는 수밖에 없소.”

    “글쎄요. 지금까지 그렇게 죽일 듯이 싸워놓고서, 이제 와서 갑자기 화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게다가, 지금과 같이 독일군에게 대부분의 땅을 빼앗긴 상황에서 강화한다면 카프카스의 유전지대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를 영영 빼앗길 텐데요.”

    “글세. 우리가 밀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정이 급한 건 우리만이 아니지.

    독일놈들은 당신네 미국, 영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을 텐데, 그럼 강화 협상에서 제법 양보를 하지 않겠소?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우리의 협상이 정말로 체결된다면 그때는 지금까지 우리 소련 인민들이 흘렸던 피를 당신네 미국 시민들이 흘리게 될 거요.”

    “후······.”

    루즈벨트는 끝까지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반박해대는 스탈린의 고집에 결국 두 손을 들어버렸다.

    스탈린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어쨌든 지금 소련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빠져버리면 미국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긴. 처음부터 어지간한 요구는 다 들어줄 생각이었으니, 이쯤에서 우리가 물러나는 게 좋겠지.’

    루즈벨트는 목소리를 누그러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소련 측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루즈벨트의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다 다시, 젊은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의 요구는 다음과 같소. 최소 6개월 이내에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최소 1년 이내에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

    그리고, 카프카스를 되찾을 때까지 카스피 해를 통해서라도 랜드리스를 보내 주시오.”

    ‘젠장, 무슨 날강도나 다름 없구만.’

    루즈벨트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스탈린의 요청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랜드리스는 뭐 그렇다 치고, 6개월 이내에 선전포고와 1년 이내에 참전이라.

    사실,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어차피 독일을 쓰러트릴 생각이라면 더 늦기 전에 미국도 나서야 할 테니까.

    “···좋습니다. 다만, 의도치 않게 조금 늦어지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만 하는지라.”

    “좋소, 그럼 당신네들이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언제든지 강화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점, 양해해주시오.”

    “하하하!”

    “하하!”

    그렇게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 뒤, 루즈벨트는 휠체어에 털썩 주저앉아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빌어먹을, 이제 저 망할 의원 나리들을 설득하러 가야겠구만.”

    1943년 1월 23일.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이 사실상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그렇게 지구 반대편에서는 두 거인이 역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바로 그 무렵, 나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스탈린그라드를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가 정말 스탈린그라드인가?”

    “예. 여기 보이는 이 벽이 중앙역 청사고, 저쪽 끝에 보이는 저 커다란 건물이 유니버마그 백화점입니다.”

    “···그렇군.”

    작년 8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4개월에 걸쳐서 격전을 치른 이 도시의 모습은 옛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해 있었다.

    거리의 건물들은 모조리 무너져 내려서 지붕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4차선의 대로조차도 건물의 잔해로 뒤덮여 차가 지나가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스탈린그라드라···.”

    나는 잔해밖에 남지 않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16년 전의 그 날을 떠올렸다.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는 장병들, 광장에 가득 쌓인 시체 떼, 그리고 포로가 되어 무기력하게 끌려가던 병사들의 뒷모습까지.

    그러나 이곳에 더 이상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은 없었다.

    다시 돌아온 나는 그 날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아냈고, 이제 승리자가 되어 이 빌어먹을 도시를 정복했으니까.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렇게, 나는 폐허가 된 도시 위에서 펄럭이는 독일군의 깃발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파울루스 장군, 자네도 이쪽으로 와서 서게나. 이 역사적인 순간에 스탈린그라드를 함락시킨 자네가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나를 부른 이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왔는지, 박살난 스탈린의 동상 앞에 서서 측근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괴벨스, 사진은 잘 찍혔나?”

    “물론입니다, 각하. 당장 내일 조간신문에 이 사진을 실어서 독일군의 위대한 승리와 히틀러부르크(Hitlerburg)의 탄생을 전 세계에 알리겠습니다!”

    “하하하! 스탈린이 이 사진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정말로 아쉽습니다. 그 표정을 볼 수만 있다면 100만 라이히마르크라도 기꺼이 지불할 텐데 말입니다.”

    히틀러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나는 히틀러부르크와 동방정책에 대해 열성적으로 떠드는 히틀러를 묵묵히 따라다녔다.

    그렇게 한나절 뒤, 스탈린그라드를 모두 순방한 그는 카르포프카에 위치한 6군 사령부에서 나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파울루스 장군, 이번에도 정말 잘해주었네. 역시나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 괜히 하는 말이 아닐세. 지금 참모본부에 앉아 있는 놈들은 패배주의에 찌든 얼간이들뿐이야.

    그리고 할더, 그놈은 이번에도 소련놈들이 반격에 나서자마자 병력을 회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더군. 그때 그놈의 말을 들었으면 오늘의 이 영광스러운 승리도 물거품이 되었겠지.”

    “···그렇습니까.”

    나는 할더를 언급하며 분노를 터트리는 히틀러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흐렸다.

    총통은 전생에도 블라우 작전 중에 할더를 퇴임시켰던 것처럼, 대승을 거둔 이번에도 할더를 쫓아낼 모양이었다.

    ‘···안타깝군.’

    나는 이제껏 히틀러와 맞서 싸운 할더에게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하며, 그의 후임이 과연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바로 그때, 히틀러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이네만, 나는 자네가 차기 참모총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네.”

    < 55화. 스탈린, 그리고 루즈벨트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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