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스탈린, 그리고 루즈벨트 (1) >
“후, 춥구만···.”
“슈문트 씨, 오늘도 고생하셨소.”
“예, 수고하쇼!”
상트 발렌틴의 전차공장에서 근무하는 용접공, 한스 슈문트 씨는 오늘도 3대의 전차를 용접하고서 해질녘이 다 된 시간에 퇴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퇴근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던 슈문트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서 술판을 벌이며 웃고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슈문트는 중앙역 앞에서 신문을 팔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호외요! 호외!”
“꼬마야,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다들 이렇게 난리니?”
“이것 보세요! 우리 군인 아저씨들이 또 무슨 도시를 점령했대요! 한 부 드릴까요?”
“그래, 한 부 줘보렴.”
슈문트는 주머니를 뒤져서 소년에게 동전 몇 푼을 쥐여주고는 신문을 한 부 받았다.
신문을 펼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필기체로 크게 쓰여진 이라는 헤드 라인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에 독일 국기가 휘날리는 흑백 사진과 함께 우리가 ‘스탈린의 도시’를 점령해냈다는 기사가 적혀 있었다.
“하하! 소련놈들이 완전 박살 났나 보군. 그나저나, 벌써 독일 국경에서 2000km나 진격했다고? 게다가 이제 곧 카프카스 산 석유가 들어온다라···.”
너무나도 놀랍고 기쁜 소식에, 슈문트는 추위도 잊고 거리 한복판에 서서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 신문을 보고 있을 때, 슈문트와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동료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어이, 슈문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자네는 왜 또 그러고 있나.”
“아, 자네인가. 이것 좀 보게! 어제 드디어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었다는군.”
“뭐? 그게 정말인가? 하하! 매일 고생하면서 용접한 보람이 있구만. 아니, 이럴 게 아니지. 우리도 한잔 마시러 가자고!”
“좋지! 어서 가세!”
1943년 1월 22일, 마치 새해를 축하하듯이 때마침 도착한 스탈린그라드의 승전보에 독일 시민들은 기꺼이 축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독일 시민들이 대승리의 기쁨에 취해가고 있을 동안,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모스크바, 런던, 워싱턴 D.C.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도쿄까지 전 세계로 전달되었다.
*****
그 무렵,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는 핵심 각료들이 한자리에 모여 비상 대책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단 한마디도 없이 그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후······.”
그리고 그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 남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지들, 내가 동지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었나? 아니면 저 독일놈들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적의 군대였던 것인가.”
“······.”
스탈린의 목소리는 침중하고 고요했다.
그러나 고개 숙인 장군들은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분노인지 절망인지 구분할 도리가 없었다.
“주코프, 바실렙스키.”
“···예, 서기장 동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보게.”
“···송구스럽습니다.”
주코프는 마치 마지막 선고와도 같은 스탈린의 말에, 구차한 변명을 늘여놓는 대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사실, 그로서도 이번 천왕성 작전의 실패와 스탈린그라드 함락에 대해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그의 작전이 실패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그런 주코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코프 대장. 카프카스를 빼앗긴 지금, 우리가 얼마나 더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소?”
“···당장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최소 6개월에서 최대 1년이라 생각합니다.”
“6개월에서 1년이라···.”
너무나도 현실적인 주코프의 평가에 조용하던 회의실 안에는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코프 동지,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아무리 석유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반년 뒤부터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가는군.”
“동지, 저희 소비에트 연방에게 있어서 카프카스는 단순한 유전지대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강철부터 망간, 몰리브덴까지 전쟁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인 각종 희귀 자원들이 묻혀 있습니다.”
이미 생산라인을 모두 우랄산맥 너머로 옮겨놓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원자재가 없으면 공장도 돌릴 수 없는 법.
그렇기에, 카프카스의 상실이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전차나 항공기용 엔진 등 각종 군수품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유전이나 자원의 상실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문제요?”
“그건 바로, 미국 놈들이 우리에게 식량과 물자를 보내주고 있는 랜드리스 루트가 차단되었다는 점입니다.”
“······.”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적성국이 된 지금, 미국이 소련에게 랜드리스를 보낼 수 있는 길은 크게 세 가지.
그 중 첫 번째 루트는 영국을 경유하고 북해를 지나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가장 북해 항로였다.
그러나 이 루트는 크릭스 마리네의 방해를 받는 데다가, 북부집단군과 핀란드군에 의해 무르만스크도 위협받는 바람에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943년 1월 현재, 연합군은 희망봉과 인도양을 지나 이란에서 카프카스로 올라가는 두 번째 루트로 대부분의 물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카프카스와 스탈린그라드가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는 바람에, 이 두 번째 루트마저도 차단되어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그럼 이제 랜드리스를 받을 방법이 없단 말이오?”
“사실, 세 번째 루트도 있습니다만···.”
“그게 어디요.”
“태평양과 일본군 점령지를 지나서, 극동으로 들어오는 루트입니다. 하지만 이쪽으로는 군수물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제기랄···.”
사실, 이 세 번째 루트도 의외로 대전 기간 내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끝까지 소련과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일본이 독일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군수물자를 제외한 식량과 피복, 의료품 등은 통과시켜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수물자 없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는 없는 법.
“제기랄··· 6개월, 6개월이라···.”
카프카스의 자원 줄도 끊어졌고, 미국의 랜드리스도 받을 길이 없다.
그리고 소련에게 남은 기회는 단 6개월뿐.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스탈린은 이례적인 결단을 내렸다.
“주코프 장군.”
“예, 서기장 동지.”
“동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소. 이것은··· 동지에게 뿐만이 아니라, 우리 소련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나 마찬가지요.”
“예.”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6개월 이내에 이 사태를 해결하시오. 할 수 있겠소?”
“···이번만큼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좋소, 동지를 믿고 맡기겠소.”
스탈린은 의지에 불타는 주코프의 강렬한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지금껏 말없이 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다음으로, 몰로토프 외무 장관.”
“예, 동지.”
“주코프 동지가 힘쓰는 동안 우리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미국 놈들에게 첩보를 하나 흘리시오.”
“어떤 정보를 흘리면 되겠습니까?”
몰로토프의 물음에, 스탈린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우리가 독일 놈들과 강화를 맺을지도 모른다는 정보 말이요.”
*****
그 무렵, 워싱턴 D.C.의 백악관.
루즈벨트와 그의 참모들은 오늘 아침, 갑자기 날아온 한 장의 보고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한 장짜리 보고서는 고작 몇 개의 짤막한 문장밖에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곳에 담겨있는 정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소련이 독일과의 강화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첩보였기 때문이다.
“후···. 마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현재로서는 감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사실 스탈린그라드와 카프카스가 함락당한 이상 소련이 전쟁을 포기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젠장, 역시 그렇겠지.”
육군 참모총장, 마셜 대장의 말에 루즈벨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1942년에 독일군의 블라우 작전이 대승을 거두었을 때부터 이미 미국과 영국에서는 소련의 패배를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소련이 전쟁에서 빠져버리면 나치 독일을 물리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점이었다.
‘빌어먹을, 망할 때 망하더라도 최소한 1년은 더 버텨주면 좋으련만···.’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지금 당장 소련이 전쟁에서 빠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소련의 강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사실 그 답을 알면서도, 루즈벨트는 한숨을 내쉬며 마셜에게 물었다.
“마셜 장군, 소련이 전쟁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 방법은 없겠소?”
“각하. 결국 소련이 전쟁을 포기하려는 것은 승리에 대한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세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다면 소련도 전쟁을 계속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이라···.”
비록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마셜 장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참전이었다.
‘제기랄, 결국 돌고 돌아서 이 문제인가.’
사실, 루즈벨트도 독일을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미국이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국회의 동의였다.
아직 독일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진주만 공습에 분노한 미국 시민들은 일본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유럽의 해방을 외치면서 독일에게 선전포고한다면 과연 시민들이 지지를 보내줄 것인가?
그렇게 루즈벨트가 고민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보좌관이 회의실로 뛰어들어와 루즈벨트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각하, 크렘린으로부터의 전화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 서기장이 대통령 각하와 직접 대화를 나누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루즈벨트는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 보좌관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당장 통화할 수 있겠나? 가서 한번 알아보게.”
“···바로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스탈린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연락을 해왔다는 것은 아직 우리와도 협력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일 터.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간에, 소련이 독일과 강화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판단한 루즈벨트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급히 뛰어나갔던 보좌관이 다시 회의실로 돌아와서 말했다.
“각하, 서기장이 지금 당장 통화를 해도 좋다고 합니다.”
“좋네, 그럼 바로 가세.”
루즈벨트는 휠체어를 끌고서 그의 집무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 54화. 스탈린, 그리고 루즈벨트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