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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원수가 되었다-53화 (53/157)
  • < 53화. Stalingrad Gefallen! (스탈린그라드 함락!) >

    1943년 1월 5일.

    다시 시작된 독일군 중야포 부대의 포격이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강타하는 동안, 정유공장 지하에 위치한 62군 사령부에서는 추이코프 중장이 예료멘코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무튼, 동지에게는 괴로운 임무를 떠맡기게 되었군.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아닙니다.”

    “그럼, 고생하시오.”

    그렇게 예료멘코의 전화가 끊어진 뒤, 추이코프 중장은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예료멘코가 전한 서기장 동지의 뜻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납득할 수 있는 패배라···.’

    서기장 동지의 뜻은 분명했다.

    마치 브레스트 요새 전투 때와 같은, 납득할 수 있는 패배.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납득이란 말인가.

    서기장 동지의 납득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믿어온 소련의 인민들의 납득인가?

    사실, 추이코프도 서기장 동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스탈린그라드의 영웅적 분투’에 대해 그렇게나 떠들어 댔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항복하거나 후퇴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해 온 62군 병사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으란 말인가?

    “후, 빌어먹을···.”

    그러나 결국, 아무리 고민해봐도 지금 추이코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주저앉아서, 그의 병사들이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어가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보는 수밖에는.

    *****

    그리고 1943년 1월 6일.

    독일군의 포격과 공습이 스탈린그라드를 불바다로 만든 바로 다음날.

    지난 몇 달 동안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채 가만히 대치하고 있던 6군이 드디어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공세에 투입된 부대 중에는 한스 마이어 중사의 분대가 소속된 100경보병 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 제기랄···. 저 지옥 같은 곳으로 또 들어가야 하는 건가.’

    작년에 끔찍한 시가전을 몸소 겪었던 한스 마이어 중사는 불타오르는 스탈린그라드를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시가지로 진입한 한스 마이어 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사님, 소련놈들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습니다!”

    분대원의 말에 한스 마이어 중사는 재빨리 창밖을 바라보았다.

    “···sich ergeben(항복)!”

    그곳에는 소련군 병사 한 무리가 총도 없이 무언가를 외치며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이어 중사는 재빨리 분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격중지! 쏘지 마라! 저놈들은 우리에게 투항병이다!”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며 1층으로 내려간 한스 마이어 중사는 정문을 열어놓은 뒤, 길 건너편의 소련군 진영을 경계했다.

    그러자 곧 저쪽 건물에서 푸른 베레모를 쓴 놈들이 나타나 투항하는 소련군 병사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쿠르츠, 파이퍼! 응사해라!”

    “예!”

    그렇게 아군이 사격을 개시하자, 푸른 베레모를 쓴 놈들은 금방 물러났다.

    그리고 투항하러 달려오던 소련군 병사들은 모두 무사히 이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danke(고맙다)! danke(고맙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손은 내리셔도 좋습니다.”

    한스 마이어 중사는 어설픈 독일어로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려는 소련군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더 이상 작년과 같은 끔찍한 시가전은 없었다.

    이미 오랜 시간동안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군과 조우하자마자 대부분 투항하려 들었고, 한스 마이어 중사는 소련군 병사들보다 투항병을 사살하려는 NKVD와 더 많이 싸워야 했다.

    게다가, 가끔씩 일어나는 소련군 병사들의 반격도 작년의 격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우라아아!!”

    “돌격 앞으로!”

    “어머니 러시아를 위하여!”

    벽돌과 잔해로 뒤덮인 골목 저편에서 요란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진다.

    “후, 또 오는 모양이군. 전원 대기!”

    그 소리에 한스 마이어 중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2층 발코니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보자, 한 무리의 소련군 병사들이 대검을 착검한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반 놈들이 온다! 전원 사격 준비! 함부로 갈기지 말고 최대한 끌어들여라!”

    “예!”

    마이어 중사의 지시에 mp40으로 무장한 분대원들이 벽과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잠시 뒤,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그들의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타다다다당!

    “으악!”

    “사, 살려줘···.”

    소련군 병사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버렸고, 그렇게 간단히 적을 처치한 마이어 중사의 분대원들은 그들의 시신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떠냐, 쿠르츠. 뭐 건진 거라도 있나?”

    마이어의 물음에, 소련군 병사의 소지품을 확인하던 쿠르츠 일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놈은 탄알집에 총알도 없는데요.”

    “뭐, 총알이 없으니까 이렇게 무모한 착검 돌격을 감행했던 거겠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스 마이어 중사는 너무나도 초라하게 변해버린 소련군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1943년 1월 20일.

    한스 마이어 중사의 분대가 시가지에 돌입한 지 약 2주가 지났을 무렵,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은 고작 10제곱 킬로미터의 작은 구획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

    남자는 매서운 눈빛으로 스코프의 좁은 구멍 너머를 노려보았다.

    둥근 원으로 된 좁은 세계.

    그 한가운데에서는 젊은 남자 하나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어깨의 견장을 보아하니 아마도 장교임에 틀림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노린다.’

    심장의 두근거림, 호흡으로 약동하는 근육, 손끝에 느껴지는 방아쇠의 차가운 감촉까지.

    자신의 육신을 천천히 가다듬던 남자는 순간적으로 마치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이다.’

    탕!

    짧은 총성과 함께 젊은 장교는 스코프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는 흩뿌려진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명중입니다, 동지!”

    “그래. 방금 저 사람 대령이었지 않나? 어깨에 노란 반짝이가 두 개던데.”

    “아뇨. 대위였습니다.”

    “쳇, 좋다 말았군. 독일놈들 계급장은 너무 복잡하다니까.”

    남자는 거칠게 노리쇠를 꺾어 잡아당겼다. 찰칵거리는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탄피가 튀어나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마지막 한 발이었나?”

    “네. 탄알이 더 필요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주워오겠습니다.”

    “아니, 됐어. 우리는 이미 졌다.”

    남자는 위장천으로 둘둘 감은 모신나강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남자와 함께 싸웠던 전우는 폐허더미 속 쓰레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눈길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털며 말했다.

    “동무, 내가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였지?”

    “글쎄요. 3주 전부터 제대로 못 셌으니, 다 합치면 거진 300명은 죽였지 않겠습니까?”

    “참 많이도 죽였군.”

    그러나 얼마나 죽였든지 간에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랴. 결국, 이 전투는 독일의 승리로 끝나버렸는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마지막 한 발까지 독일군을 쐈다.

    그것이 그 나름의 끝맺음이었다.

    “가자. 가서 항복하고 다 끝내자.”

    “동지, 정말 이대로 항복하실 생각입니까?”

    “그럼? 자네는 정말로 죽을 때까지 싸우길 원하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말없이 독일군 진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결국 그런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인지 저격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무, 독일 놈들이 내 이름을 알까?”

    “적어도 이곳 스탈린그라드에서 바실리 자이체프라는 이름을 모르는 독일군은 없을 겁니다.”

    그 남자, 바실리 자이체프는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 놓았던 ID 캡슐을 꺼내서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것을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이걸 버리면 나중에 연금이나 참전수당 따위를 받지 못하게 될 테지만, 당장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잠시 뒤, 독일군을 만난 바실리는 본명 대신 흔해 빠진 가명으로 항복했다.

    2차대전에서 가장 유명했던 저격수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그렇게 62군 병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하고 있을 바로 그때.

    스탈린그라드의 동쪽, 볼가강 강변에 위치한 선착장에서는 증기선 한 척이 부빙을 밀어내며 조용히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기선이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배 안에서 한 남자가 갑판으로 올라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바로 마지막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지휘했던 62군 사령관, 추이코프 중장이었다.

    “후···. 빌어먹을.”

    배의 후미에 선 추이코프는 담배를 피우며 폭음이 울려 퍼지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를 따라 나온 62군 참모장, 키릴로프 소장이 말했다.

    “동지, 혹시 독일놈들의 공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러나 그의 말에도 추이코프는 계속해서 스탈린그라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키릴로프 동지, 현재 스탈린그라드에 남은 62군 병사들은 얼마나 되나?”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아마 4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4만이라···. 그럼 오늘 저 전투가 끝나면, 4만 명의 병사들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

    깊은 회한이 묻어나는 추이코프의 말에, 키릴로프 소장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심한 끝에, 키릴로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추이코프 동지. 감히 말씀드리자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결과는 동지의 책임이 아닙니다. 동지께서는 사령관으로서 본분을 다하셨습니다.”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사실 카프카스가 점령당하고 천왕성 작전이 실패한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키릴로프 소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 분명 승리와 패배의 문제로만 따진다면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는 그의 잘못이 아니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이코프는 강 건너편에서 최후의 1인까지 맞서 싸우는 62군의 모습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납득할 수 있는 패배라···.”

    그렇게 1943년 1월 21일.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하고 끔찍한 전투,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은 독일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일간지는 모두 똑같은 제목으로 1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Stalingrad Gefallen!

    (스탈린그라드 함락!)

    < 53화. Stalingrad Gefallen! (스탈린그라드 함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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