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스탈린그라드 (5) - 유료 첫번째 화 >
“자, 드디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할 시간이 왔군.”
내 말에, 회의실에 모인 이들이 웃으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예,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해야 블라우 작전도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지요.”
“하하, 정말 오래도 걸렸습니다.”
자이들리츠 대장의 말대로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여정이었다.
전생의 패배부터 회귀 후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니까.
그러나 결국 나는 이곳까지 왔다.
추이코프의 시가전 전술과 주코프의 천왕성 작전 그리고 로코솝스키의 돈강 도하까지 모두 막아낸 끝에 드디어 스탈린그라드 함락의 순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럼 이제 스탈린그라드로 진입해서 시가지를 점령하는 일만 남았군요.”
“혹시 시가지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도 생각해 두셨습니까?”
6군 참모장, 슈미트 중장과 자이들리츠 대장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들에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 이제 더이상 대단한 기책이나 묘안은 필요 없네. 시가지 점령은 보병을 투입해서 잔당을 소탕하는 정공법으로 갈 것이네.”
전생에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독일군의 무덤이 되었던 것은 바로, 시가지 전투라는 특수성과 아무리 물리쳐도 끊임없이 투입되는 소련군의 증원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대규모 병력을 시가지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발이 묶이는 바람에 천왕성 작전에 꼼짝없이 포위당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현재, 주코프의 천왕성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 버렸고 그로 인해 엄청난 병력을 날려 먹은 소련군은 더이상 증원을 보내지 못하는 상태.
그렇다면 이제 시가지 안에 남아 있는 62군의 잔당들만 소탕하면 스탈린그라드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고개를 들어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선, 내일 아침 마지막으로 항복을 권고한 다음 포격과 폭격을 개시할 것이네. 리히트호펜 장군, 제4항공함대는 폭격기를 얼마나 동원할 수 있겠소?”
“내일 하루만 생각한다면, 최소 1000소티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정도면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드는데 충분할 겁니다.”
“좋소, 그럼 프레터 중장. 중야포 부대는 얼마나 준비가 되었나?”
“언제든지, 얼마든지 발사 가능합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답하는 리히트호펜 대장과 프레터 중장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제4항공함대의 공습이 끝난 직후에 중야포 부대가 포격을 개시하시오. 그리고 그다음에 51군단과 11군단이 시가지로 진입하도록.”
“예!”
그렇게, 작년 10월 이후로 한동안 잠잠했던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다시 한번 폭음과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1943년 1월 6일.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위치한 어느 폐공장 건물 안.
“어이, 포프! 10시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이곳의 741 소총수 소대 소속, 포프코프 이병은 오늘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르게이 상병님? 슬슬 보급받으러 갈 시간입니다.”
“후··· 알았다.”
포대 자루를 챙긴 포프코프는 창가에 앉아 쉬고 있던 그의 맞선임, 세르게이 상병과 함께 공장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장의 정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이 선택한 출구는 바로 무너져 내린 벽의 구멍이었다.
“조심해라. 여기 잔해들 쌓인 모양이 어제랑 좀 다른 거 같다. 어쩌면 독일놈들이 지뢰를 설치한 것일지도 몰라.”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선 포프코프와 세르게이는 늘 걷던 길을 따라 중대 본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걷는 길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길’과는 전혀 달랐다.
반쯤 무너져 내린 벽을 타고 올라가서, 창문 너머 반대편 건물로 뛰어가고, 거기서 또 지하로 내려가 더러운 수로를 기어간다.
포프코프도 처음 전입 왔을 때는 도대체 왜 이렇게 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총에 맞거나 부비트랩을 밟게 된다는 것을.
그렇게, 무려 30분에 걸쳐서 바로 옆 블록의 중대 본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식량을 받기 위해서 보급계로 향했다.
“741소대 소속,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상병입니다. 보급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741소대? ···좋아, 포대 열어.”
“예!”
장부에 무언가를 휘갈겨 쓴 부사관은 포프코프가 내민 포대 자루 안에 물건들을 때려넣기 시작했다.
탄약과 수류탄, 허쉬 초콜렛, 영어로 무언가 적힌 통조림 몇 개, 빵 몇 덩어리, 그리고 약간의 담배까지.
이것이 며칠간 포프코프와 그의 소대원들이 나눠 먹어야 할 식량의 전부였다.
“좋아, 가봐!”
“예! 감사합니다!”
포프코프와 세르게이는 어두운 표정으로 포대 자루를 몸에 묶고는 다시 중대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말소리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포프코프가 입을 열었다.
“상병님. 이건 진짜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또 통조림에 초콜릿뿐이지 않습니까.”
“너 초콜릿 맛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니, 그건 여기로 전입와서 처음 초콜릿 먹어봤을 때지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매일 초콜릿으로 끼니를 떼우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포프코프의 불평에, 문 손잡이를 만지며 조심스럽게 부비트랩을 확인하던 세르게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넌 운 좋은 거야, 임마. 너 전입 오기 전까지는 독일놈들의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며칠 굶으면서 싸우는 게 일상이었어.”
“아니, 또 그 얘기입니까.”
“그나마 이것도 볼가강이 얼어붙으면서 겨우 사정이 나아진 거지. 그러니까 초콜릿이라도 입에 들어가는 걸 감사하게 여기라고.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포프코프는 세르게이 상병의 말에 대충 답하면서 건물 사이를 통과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세르게이가 발을 멈췄다.
에에에에엥--
“······젠장.”
“상병님? 왜 그러십니까?”
세르게이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후, 이건 공습 경보다. 이제 곧 독일놈들의 폭격이 시작될 거다.”
“그, 그럼 저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프코프의 물음에, 세르게이는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던 대로를 가리켰다.
그곳은 지난주에 아군 병사 하나가 저격을 당해 죽었던 곳이었다.
“어쩔 수 없군. 저 길을 달려서 우리 소대 건물로 가자. 일단 건물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괜찮을 거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셋을 세고 같이 달리는 거다.”
포프코프는 건물 뒤에 숨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대로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괜찮겠지.’
그러나 포대 자루를 움켜진 포프코프의 손은 점점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하나, 둘··· 셋!”
“으아아아!!”
세르게이의 구령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내달리는 모습이 무색하게도, 주변에는 그 어떤 소리나 반응도 없었다.
‘그래, 역시 아무도 없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렇게 대로를 통과한 포프코프가 건물 안으로 몸을 던지려 할 때였다.
탕!
“어···.”
한 발의 총성과 함께, 그의 다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균형을 잃은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포프코프!”
포프코프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여전히 대로 한복판. 그의 다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저쪽 건물 안에서는 세르게이가 그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자, 그의 머리 위에서는 수십 대에 달하는 폭격기 편대가 폭탄을 쏟아내며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젠장···.”
*****
그 무렵, 볼가강 건너편에 위치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상장은 불타오르는 스탈린그라드를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젠장···.”
오늘 아침, 독일놈들은 형식적인 항복 권고 방송 후 대대적인 폭격과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는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사실 천왕성 작전이 실패한 시점에서 스탈린그라드가 공격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에 대응해서 예료멘코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몰려오는 독일군을 막기에는 화력도, 병력도 턱없이 부족하고 이를 보충할 증원과 보급은 끊어진 지 오래인 상황.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예료멘코는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참모장에게 물었다.
“참모장, 스타브카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나?”
“예, 아직은 없습니다.”
“그런가···.”
참모장의 대답에, 예료멘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심을 굳혔다.
결국, 지금의 이 상황에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퇴각 명령을 내리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예료멘코는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전화는 몇 번의 신호 연결 끝에, 누군가에게로 연결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예료멘코 상장입니다.”
“그래, 예료멘코 동지.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을 하셨소?”
그가 전화를 건 상대는 바로, 스타브카의 주코프 대장이었다.
“주코프 동지. 이미 보고를 받아서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오늘 아침에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알고 있소.”
주코프의 목소리는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딱딱하고 차가웠다. 그러나 예료멘코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현재 스탈린그라드의 전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알고 있소. 보나 마나 천왕성 작전의 여파 때문에 증원도 보급도 부족한 상황이겠지.”
“예, 맞습니다.”
“그래서, 퇴각을 요청하려고 연락한 거요?”
예료멘코는 갑자기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주코프의 말에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법.
예료멘코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병력을 퇴각시켜야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주코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 맞는 말이오. 사실, 나도 동지와 같은 생각이오.”
“그, 그럼!”
“하지만, 서기장 동지께서는 생각이 조금 다르시더군.”
주코프의 말에 잠시 희망을 품었던 예료멘코 소장은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서기장 동지께서도 지금 이 상황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아니오. 다만, 설령 스탈린그라드를 점령당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패배여야 한다고 하시더군.”
“납득할 수 있는 패배 말입니까?”
“그래, 말하자면 브래스트 요새 전투처럼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께서 브래스트 요새 전투를 언급하셨다면 그건 분명 항복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예료멘코는 힘없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불타오르는 스탈린그라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모장,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추이코프 소장에게 연락하게. 62군은 최후의 1인까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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