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천왕성 작전 (9)
“현재 고루빈스키와 루친스키 일대에서 최소 야전군 규모의 소련군이 돈강을
도하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슈미트 중장의 보고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소련놈들이 돈강을 도하하다니··· 설마 칼라치를 우회해서 스탈린그라드 일
대를 포위할 생각인 건가?’
그러나 작전 지도를 살펴보자, 놈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고루빈스키와 루친스키는 스탈린그라드와 칼라치의 딱 중간에 위치한 지점이다.
놈들이 굳이 저곳에서 도하했다는 것은 우리와 11군의 연결을 끊고 칼라치를
포위하겠다는 의도일 터. 그리고 그다음에는 칼라치를 점령한 뒤 교량을 확보
하려는 거겠지.
즉, 이번 도하의 목표는 우리가 아니라 칼라치의 11군임에 틀림 없었다.
‘제기랄, 소련놈들이 제법 머리를 굴렸군. 만약 칼라치가 포위당해버리면 11
군도 보급이 끊겨서 오래 버틸 수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바로 슈미트 중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마 소련군의 목적은 우리와 11군의 사이를 차단하고 칼라치를 포위하는 것
일걸세. 지금 당장 병력을 투입해서 놈들의 도하를 막아야 하네.”
“하지만 각하, 현재 저희 6군의 전력은 대부분이 전선에 묶여 있는 상황이라
당장 투입할 수 있는 부대가 없습니다.”
그 말에 나는 전력 배치 현황판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현재 51군단은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유지하느라 움직일 수 없었고, 8군단과
14군단은 북쪽 방면을, 11군단은 반쯤 와해된 루마니아 4군을 지원하기 위해
내려가 있었다.
각 군단에서 예비대와 여유 병력을 차출하면 2~3개 사단 정도는 만들 수 있겠
지만, 그 정도 병력으로 소련군의 도하를 막는 것은 어려우리라.
‘역시 지금 당장 투입할 만한 전력은 4기갑군단과 48기갑군단, 그리고 502 중
전차 대대뿐인가.’
하지만 이들은 지금 남쪽에서 칼라치 방면으로 올라오고 있을 터. 과연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4기갑군단과 48기갑군단은 지금 어디까지 도달한 상태인가?”
“제가 다시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내 물음에, 통신 참모 하나가 통신실로 뛰어갔다. 그러나 잠시 뒤에 돌아온
그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가, 각하. 현재 48기갑군단이 대규모 소련군 기갑부대와 교전 중이라고 합니
다!”
*****
1942년 12월 1일.
이 날, 루친스키 남쪽 15km 지점에서 48기갑군단과 5기갑군이 조우한 것은 말
그대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이 무렵 48기갑군단은 파울루스의 명령에 따라 칼라치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
하고 있었고, 이제 막 돈강을 건넌 5기갑군도 그저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각자의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던 두 집단은 불행하게도 드넓은
평야 한복판에서 서로를 발견해버렸고, 이 우연한 만남은 서로에게 엄청난 재
앙이 되었다.
“제기랄.”
“···적군이다.”
사방은 탁 트인 드넓은 평야에 보이는 것은 서로의 전차뿐.
근처에는 은폐할 것도, 엄폐할 곳도 없는 데다가 뒤에서는 아군 전차들이 따
라오고 있어 물러설 수조차 없다.
그 와중에 저 지평선 너머에서는 수백 대의 전차가 일제히 이쪽을 향해서 주
포를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순간, 모두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그건 바로, 내가 당하기 전에 먼저 눈앞에 있는 적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
“돌격! 공격해!”
“전차 전진!”
“대열을 갖춰라! 차례대로 격파하는 거다!”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사된 포성은 칼라치 동쪽의 드넓은 평원 위
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정말 끔찍하군..”
502 중전차 대대 소속 2중대 217호 전차장, 오토 카리우스 소위는 큐폴라 밖
으로 눈만 빼꼼 내민 채 전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던 이 광활한 평원은 불과
1시간 만에 화염과 폭발, 그리고 비명 소리로 가득한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가 처음부터 이런 치열하게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평원에서 마주친 양측은 각자 유효사거리 내에서 포화를 주고받으며 전
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원거리 교전에서 우위를 점했던 것은 바로 독일군 측이었다.
독일군은 뛰어난 명중률과 티거 전차의 방호력을 앞세워서 5기갑군을 서서히
격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대장 동지! 이대로라면 아군 전차가 모두 격파되고 말 겁니다! 퇴각해야
합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네. 이미 돈강을 건넌 이상, 우리는 무조건 칼라치를 포
위하는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공격해!”
“계속 돌격해! 관통이 안 되면 들이박기라도 해라!”
이에 전세가 불리하게 흘러감을 깨달은 소련군은 오히려 과감하게 진격해 들
어갔고, 그렇게 서로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서 이제 전차들은 서로 포신
이 맞부딪힐 정도로 근접해 버렸다.
그리고 이런 난장판 속에서는 오히려 소련군이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충각부터 영거리 사격, 화염병과 수류탄 투척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
지 않았고 이에 독일군 전차들도 점점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카리우스 소위의 217호 티거는 굳건하게 자리
를 지키며 소련군을 격파하고 있었다.
“휠젠자크, 다음은 고폭탄이다.”
“알겠습니다!”
“홀츠, 정면에 보이는 T-34의 측면 장갑에 한발 넣어줘라. 고폭탄이니까 정확
하게 조준하도록.”
“예!”
투콰앙!
티거에게 측면을 보여준 그 T-34는 솟구치는 불기둥에 휩싸여서 마치 폭죽처
럼 터져버렸다.
“하하, 장관이군요.”
“이걸로 벌써 15대입니다.”
승무원들의 목소리를 헤드셋으로 들으면서도, 카리우스 소위는 총알이 빗발치
는 큐폴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이반 놈이 또 접근하는군. 구스타프, 차체를 왼쪽으로 후진시키도록. 홀츠,
11시 방향이다. 이번엔 정면으로 8.8cm를 먹여줘라.”
“예!”
카리우스는 지시를 내린 뒤에도 매섭게 달려오는 T-34를 끝까지 노려보았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충각을 노리는 걸 보면 아마 주포 구동부가 파괴되거나
포탄이 다 떨어졌나 보군. 뭐, 포를 쏠 수 있었어도 이 각도에서는 못 뚫겠지
만.’
그리고 잠시 뒤, 철갑탄이 장전되는 것을 확인한 카리우스는 지시를 내렸다.
“정지! 슐츠, 지금이다!”
“발사!”
콰앙!
강철을 찢어발기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217호를 향해서 달려오던 T-34는 전
면 장갑이 통째로 뜯겨 나가버렸다.
‘···끝났나.’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금 전 파괴된 그 전차에서 기어 나온 전차장은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마
지막까지 217호 티거를 향해서 뭔가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그 물체는 217호 전차에 닿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요란한 소
리와 함께 박살나 버린 그것은 화르륵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전차가 격파되고서도 화염병까지 던지는 건가. 비록 적이지만 정말로 대단하
군.’
카리우스는 그 전차병의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마치 영원히 울려 퍼질 것만 같던 포성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대부분의 소련
군 전차들은 파괴되거나 항복한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겼군.”
카리우스는 저 멀리 노을을 바라보다 문득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시침이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6시 30분.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가 어느새 저녁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그때, 차내 무전기에서 중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움17, 여기는 바움1. 그쪽의 피해 상황은 어떤가?”
“여기는 바움17. 차량의 피해는 없다. 다만, 포탄이 너무 많이 소진되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방금 전에 야전군 사령부로부터 지침에 내려왔다. 지금
바로 이동도록.”
“목적지는 어디인가. 칼라치?”
“아니, 루친스키다.”
*****
그 무렵, 클레츠카야의 남서 전선군 사령부에서는 로코솝스키가 5기갑군의 전
과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새벽에 돈강을 도하 했으니, 그때부터 진격했다면 분명 지금쯤 포위망을
완성했다는 보고가 올라올 터.
그리고 때마침, 부관이 보고서를 들고 로코솝스키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사령관 동지, 5기갑군의 보고입니다.”
“말해보게.”
로코솝스키는 느긋하게 보드카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부관의 입에서 나올 승
전보를 기다렸다.
그러나 부관의 보고는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게··· 루친스키에서 남하하던 중 독일군 기갑부대와 맞닥뜨리는 바람에 교
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
예상치 못한 보고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로코솝스키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어보았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적 전차 약 50여 대, 아군
전차는 약 150대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5기갑군은 루친스키 일대로 물
러난 상태입니다.”
“퇴각이라···. 빌어먹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로코솝스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쪽을 향해서 진격하고 있던 5기갑군의 표식은
어느새 루친스키까지 돌아와 있었다.
‘젠장,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이번 작전은 다른 무엇보다도 독일군이 미처 대응하기 전에 포위망을 완성하
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기에 로코솝스키는 5기갑군이 모두 도하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일부 부
대만을 빠르게 진격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독일 놈들은 이걸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바로 그
순간에 기갑부대를 투입해서 아군의 진격을 좌절시켜버렸다.
5기갑군의 보고에 따르면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하지만, 세상에 그럴 리
가 없지 않은가.
‘···설마 스파이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 작전마저도 미리 읽혀버린 건가.’
마음속으로 온갖 가능성을 떠올리던 로코솝스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만약에 독일놈들이 이 작전을 미리 알았다면 5기갑군과 제1근위군이 도
하할 때부터 막았을 터.
그렇다면 정말로 운 좋게 근처에 부대가 있어서 빠르게 대응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겠지.
그리고 오늘의 진격이 좌절했다고 해서 로코솝스키의 작전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일단은 제1근위군과 5기갑군을 무사히 도하시킨 것만 해도 충분하다.
이제 2개 야전군을 한 번에 동원해서 남하하기 시작하면 독일놈들도 막아내기
어려울 터.’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로코솝스키는 잔에 남아 있던 보드카를 전부 입에 털어
넣은 뒤, 명령을 내렸다.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즉시 다시 한번 공세를 시작하게. 이번에야말로 반드
시 칼라치를 포위해내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