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천왕성 작전 (6)
제90기갑여단 소속 T-34 전차장 안드레이 마르코프 중위는 페리스코프를 들여
다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거야?”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청회색의 중전차 한 대가 서서 유일한 진격로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돌격해! 어떻게든 길을 뚫어야 한다!”
“정면이 안되면 측면을 노려라!”
아군 전차들은 어떻게든 길을 뚫기 위해 사방에서 포를 쏘며 달려들었지만,
저놈은 모든 포화를 맞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쾅!
“타, 탈출해!”
“으악!”
그에 반해 저놈의 주포가 불을 뿜으면 그때마다 아군 전차가 하나씩 차례대로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때마다 불쌍한 동무들이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하다
죽어 나갔다.
“저, 전차장 동지. 저 전차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도 모른다. 하지만 뭐, 보나 마나 독일 놈들의 신형 중전차겠지.”
마르코프 중위는 세르게이 일병의 물음에 담담하게 답했다.
그도 금시초문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저 엄청난 덩치와 주포, 그리고 T-34의
76mm 포탄에도 끄떡없는 저 엄청난 방호력까지.
저건 어떻게 보더라도 적군의 신형 중전차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아군들이 터져나가는 와중에도, 마르코프 중위는 페리스코프 너머로
그 전차의 모습을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젠장··· 아군 T-34들이 거의 500m 거리까지 접근해서 측면을 쏴도 버티다니,
장갑이 도대체 얼마나 두꺼운 거냐.’
원래 전차의 장갑은 정면에만 집중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측면과 후면까지
모두 튼튼하게 만들면 장갑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놈들의 저 신형 중전차는 그런 상식을 깨부수고 측면 장갑으로도
아군의 포화를 튕겨내고 있었다.
‘T-34의 주포 관통력이 분명··· 500m에서 70mm 정도였던가. 아무리 입사각이
좋지 않다지만 그걸 튕겨내다니, 측면 장갑의 두께가 최소 60mm는 넘는다고
생각해야겠군.’
그렇다면 저놈의 측면 장갑이라도 뚫으려면 500m 이내에서 거의 수직에 가까
운 각도로 맞추던가 아니면 그것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지금의 상황에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잠시 동안 고민하던 마르코프 중위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세르게이! 우리는 오른쪽의 저지대를 이용해서 개울가로 내려간다. 그다음에
개울가를 따라서 최대한 접근한 다음 놈의 측면으로 파고드는 거다.”
“예!”
지금까지 몇 번이나 손발을 맞춰본 사이답게, 세르게이 일병은 마르코프 중위
의 저돌적인 명령에도 되묻지 않고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세르게이가 기어를 쑤셔 넣는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마르코프의 T-34가 조용
히 옆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그 동안 마르코프는 흔들리는 전차 안에서 포탑 측면의 관측창 너머로 적 전
차를 노려보았다.
‘다행히도 저놈은 우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군.’
밀려오는 아군 전차들을 격파하는데 정신이 팔린 탓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위
장을 신경 쓴 덕분인지 저놈은 다른 곳으로 포탑을 돌린 채 응사하고 있었다.
“좋아, 조금만 더 접근하면 된다. 전속 전진!”
“전속 전진!”
충분히 거리를 좁힌 세르게이는 순식간에 속도를 높히며 개울가에서 올라와
청회색 중전차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놈은 그제서야 마르코프를 눈치챘는지 뒤늦게 포탑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이
미 파고들기 시작한 T-34를 잡을 수는 없었다.
‘600··· 550··· 500···’
마르코프 중위는 스코프 너머로 적을 계속 노려보면서, 발사 레버에 발을 올
린 채 침착하게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
‘450··· 400, 지금이다!’
그리고 거의 400m까지 접근한 순간, 마르코프 중위는 오른발을 있는 힘껏 내
딛었다.
“발사!”
쾅!
엄청난 굉음과 반동이 전차 안에 울려 퍼지고, 하얀 연기 속에서 76mm 포탄이
적 전차를 향해 매섭게 날아간다.
그리고 놈의 옆구리를 강타한 철갑탄은 튀어 오르는 불꽃과 함께 측면 장갑에
길고 날카로운 스크래치를 깊숙하게 새겼다.
“허···.”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이 정도 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마르코프의 76mm 포탄은 측면 장갑을 뚫지 못
하고 튕겨져 나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탄식을 내뱉으며 멍하니 있던 마르코프의 눈앞에서 그놈의 흉악한
88mm 주포가 멈췄다.
“괴, 괴물···.”
그것이 마르코프 중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
“각하, 루마니아 4군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11월 22일 현재, 적군은 모든 공
세 시도를 중단하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원래의 위치보다 약간 밀려난
곳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루마니아군이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선방해줬나 보군. 그게 아니면 중전차
대대를 투입한 덕분인가?”
며칠 전에 투입한 502 중전차 대대는 내 기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전과를 보여
주었다.
이들은 투입된 지 고작 3일 만에 거의 100여 대의 T-34를 격파하고, 소련군의
공세 시도 자체를 좌절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두 사람의 전차 에이스가 있었다.
‘오토 카리우스, 그리고 알베르트 케르셔라. 단 둘이서 격파한 전차의 수만
해도 십여 대가 넘는군.’
그러나, 이들의 이런 눈부신 전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처절한 희생이 숨어있
었다.
502 중전차 대대가 도착할 때까지 소련군의 공세를 막았던 4기갑군단과 48기
갑군단은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이들을
보조했던 루마니아 4군의 보병들은 부대가 거의 와해 될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소련군의 공세를 좌절시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루마니아 4군은 한
동안 이번 전투의 피해를 회복하기 어려울 터였다.
“루마니아 쪽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던가?”
“사실, 자기네 부대의 피해가 너무 심각해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기 어렵다
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더 많은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슈미트 중장의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정말로 더 많은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
도 루마니아군의 피해가 심각한 것은 사실일 터였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계속 남쪽 측면을 맡겨도 될 것인가?
‘아마 소련군의 공세 역량은 거의 소진되었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
지.’
결국, 나는 고민 끝에 남쪽 전선의 실태를 직접 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슈미트 중장, 지금 콘스탄티네스쿠 중장에게 연락하게. 조만간 남쪽 전선을
시찰하러 가겠다고 말이야.”
*****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루마니아 4군이 담당하고 있는 스탈린그라드 남쪽 평
원으로 향했다.
내가 방문할 뜻을 밝히자 루마니아 4군 사령관 콘스탄티네스쿠 중장은 증원을
받아낼 기회라고 여긴 모양인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전선의 상황을 안내했다.
“···그래서 저기가 소련군의 공세가 집중되었던 사르파 호수 일대입니다.
소련놈들은 이곳에 기갑부대를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아군의 전선을 돌파하려
했지만, 독일군의 중전차 한 대가 길을 틀어막아 준 덕분에 대승을 거뒀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콘스탄티네스쿠 중장은 증원을 받기 위해서 전선의 상황
을 과장하거나 꾸며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주기만 해도 내가 증원을 고려할
정도로 루마니아 4군의 현재 상황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방문 때문에 사열한 루마니아 병사들은 어젯밤 급하게 준비했음에도 불
구하고 상처투성이에 붕대를 칭칭 감은 패잔병의 모습이었고, 심지어는 일개
중대의 사열에 고작 50명이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전투가 상당히 치열했나 보군. 아무래도 증원이 조금 필요할 것 같소만.”
“부끄럽지만, 현재 전선을 유지하기에는 병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저
신형 중전차도 몇 대는 남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소. 사령부로 돌아가서 검토해보겠소.”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콘스탄티네스쿠 중장과 악수를 나눈 뒤, 다시 차에 올랐다.
그렇게 전선 시찰을 모두 마치고 다시 6군 사령부로 돌아가는 도중, 무언가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면 장갑이 찢어져 나가 완파
된 4호 전차였다.
“운전병, 잠깐 저쪽으로 가보세.”
“알겠습니다.”
근처에 차를 세운 나는, 4호 전차로 다가가서 그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4호 전차의 몰골은 정말로 처참했다.
전면 장갑에는 관통당한 구멍이 몇 개나 흉하게 뚫려있었고, 뜯겨진 휀더와
궤도의 파편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나뭇가지 두 개를 대충 엮어서 만든 십자가 두 개가 세워
져 있었다.
“···끔찍하군.”
이 4호 전차의 모습만 봐도, 며칠 전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오두막집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온 두 사람은 내 앞에 정자세로 서서 힘차게 경례를 올
렸다.
“24기갑사단 제206기갑연대 소속 104번 전차장, 게르트 하버 상사입니다!”
“동일 부대 소속 카를 프란츠 상병입니다!”
104번 전차장이라는 말에 나는 파괴된 전차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그곳에는
반쯤 그을린 104라는 숫자가 그려져 있었다.
“자네들이 이 전차의 전차병들인가 보군.”
“예! 그렇습니다.”
방금 전, 콘스탄티네스쿠 중장의 말에 따르면 여기가 최대의 격전지였다고 했
던가.
그렇다면 중전차 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저들이 이곳을 틀어막고 있었을 터.
저렇게 전면 장갑이 관통당하고, 두 사람이 사망하는 와중에도 저 둘은 끝까
지 전차에 남아서 몰려오는 적과 맞서 싸웠으리라.
나는 흙먼지가 내려앉아 더러워진 두 사람의 제복을 털어주며 말했다.
“고생했네. 귀관과 같은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아군이 승리할 수 있었
네. 국방군을 대표해서 내가 자네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겠네.”
“···영광입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감격한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지만, 나는 말뿐인 공치
사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슈미트 중장, 이 두 사람을 기사 십자 철십자 훈장 수훈자로 추천하는 것이
어떤가?”
“물론 가능합니다. 돌아가서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그들과 마지막으로 악수를 한 뒤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차에 오르려고 할 때, 뒤에서 프란츠 상병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가, 각하! 송구스럽지만 청이 하나 있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옆에 있던 슈미트 중장과 하버 상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흥미가 돋아서 그에게 되물었다.
“하하, 재미있군. 좋네, 무슨 부탁인가? 뭐든지 한번 말해보게.”
내가 웃으며 물어보자 용기를 얻었는지, 프란츠는 떨면서도 큰소리로 답했다.
“저, 저도 중전차에 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