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스탈린그라드 (3)
“각하, 4기갑군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6군의 요청대로 스탈린그라드 북쪽 통
로를 차단하고 볼가강까지 도달하였음. 이상입니다.”
“좋군. 자이들리츠 대장, 스탈린그라드 외곽 방어선은 어떻게 되었나?”
“이반 놈들의 저항이 제법 거세서 애먹긴 했지만, 그래도 큰 피해 없이 방어
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시가지 경계에서 대치 중인 상태입니다.”
1942년 8월 2일.
우리 6군은 스탈린그라드 외곽을 지키고 있던 소련군을 모두 밀어내고 시가지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솔직히 걱정을 좀 했었습니다만, 여기까지는 생각보다 쉽게 왔군요.”
“하하. 이제 남은 것은 시가지 안에 남은 잔당들을 흠씬 두들겨준 다음 항복
을 받아내는 것뿐입니다.”
군단장들의 말대로, 지금까지의 전황만 보자면 이번 전투는 우리 독일군의 압
도적인 승리나 다름없었다.
소련군은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시가지 안으로 쫓겨나 버렸고,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의 선착장 하나를 제외한 모든 통로가 차단된 상태였으
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아직 기뻐하긴 이르네. 놈들은 전력을 보존한 채 시가지 안으로 후퇴했고,
시가전은 야전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것이네. 대책 없이 들어갔다간 큰 피
해를 입을 걸세.”
“하지만 각하,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을 끼고 있어 봉쇄만으로는 항복을 받아
낼 수 없습니다. 도시를 점령하려면 결국 진격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사실, 자이들리츠 대장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시가지를 점령하려면 어
쨌든 진입하기는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전처럼 그냥 들어가서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진입하기는 해야겠지. 하지만 우리는 놈들을 밀어내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놈들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만들 걸세.”
“스스로 물러나도록··· 말입니까?”
자이들리츠 대장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되물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대답
하는 대신 옆에 서 있던 306포병 사령부장 막시밀리안 프레터 중장을 바라보
았다.
“드디어 무거운 놈들을 써먹을 때가 왔군. 프레터 중장, 야포들은 준비가 끝
났나?”
“철로를 새로 깔아야 하는 문제 때문에 구스타프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총 610대의 야포와 로켓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방
열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좋네. 프레터 중장, 공습이 끝나는 즉시 포격을 개시하게.”
*****
“사령관 동지, 지시하신 병력 배치가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수고했소.”
스탈린그라드 방위 사령관으로 새롭게 임명된 추이코프 중장은 전령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련군 병사들이 빽빽하게 배치된 현재의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는 골목길과 건
물 하나하나가 참호나 벙커와 다름없었다.
‘이 빌어먹을 나치 놈들··· 어디 한번 기어들어 오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야
전 때와는 다를 게다.’
마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악동처럼, 추이코프는 험상궂은 얼굴 가득 미소
를 지으며 독일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뒤, 추이코프에게 올라온 보고는 그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사령관 동지, 독일놈들의 대대적인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전 공습인가? 뭐, 그 정도야 상관없네. 결국, 저놈들은 우리의 아가리 속
으로 들어올 테니까 말일세.”
놈들이 아무리 많은 폭탄을 실어 나르더라도 공중 폭격만으로는 이 거대한 도
시를 파괴할 수는 없다.
놈들의 목적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인 이상 놈들은 결국 시가지 안으로 들
어올 수밖에 없을 터. 그때 이 피해를 몇 배로 갚아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추이코프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리고 대대적인 폭격을 개시했던 바로 다음 날, 드디어 추이코프가 기다리던
독일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시가지의 백병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스탈린
그라드를 찾아온 것은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포성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독일놈들이 시가지를 향해 야포를 쏘고 있습니다.”
“···야포 소리가 이렇게 크단 말인가?”
“그게, 놈들이 가진 야포가 저희의 예상보다도 훨씬 큰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추이코프는 그 순간, 자신의 시가전 전술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
“곧 떨어진다! 다들 귀 막아!”
“예!!”
콰앙!! 콰광!!
고막을 찢어 버릴듯한 엄청난 굉음이 저 길 건너편에서 연달아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엄청난 가루와 파편들이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
했다.
“콜록콜록!”
“으웩!!”
가루를 들이마신 분대원들이 기침과 헛구역질을 해대는 동안, 한스 마이어 중
사는 팔로 입을 가리고 도로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뿌옇게 사방으로 피어오르던 가루가 사라진 뒤, 원래 그 자리에 서 있던 커다
란 곡물 저장소 건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자리에는 곡물 저장소였던 것의 한쪽 벽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좋아, 포병 놈들이 일을 잘 해주는군. 쿠르츠, 에밀! 일어나라. 다음 건물로
이동한다!”
“예!”
마이어는 자신의 mp40 기관단총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총은 그가 소속된 100경보병 사단이 시가전 전담 부대로 뽑히는 바람에 새
롭게 지급된 것이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우리가 시가전 전담부대로 뽑힐 줄이야. 괜히 개고생
을 하는군.’
마이어는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는 내뱉으며 도로를 달려가 작은 건물 입구 근
처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그가 수신호를 보내자, 엄폐물 뒤에서 대기하던 그의 분대원들도 차례
대로 달려와 문 주위를 둘러쌌다.
“소탕 팀은 수류탄 투척 후 진입, 기관총 팀은 계속해서 도로를 경계한다! 이
제 설명 안 해도 다 알 거라고 믿는다.”
“예!”
한스 마이어 중사는 자신 있게 대답하는 분대원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쿠르츠, 던져!”
“수류탄 투척!”
벽에 바짝 붙은 쿠르츠 상병이 깨진 창문 틈 사이로 수류탄을 던져넣었다.
콰앙!
“돌입!”
마이어는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거실은 수류탄의 파편과 폭풍에
휘말려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거실 확보! 이제 왼쪽부터 차례대로 방 청소를 시작한다. 쿠르츠, 넌 복도와
계단 쪽을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마이어의 지시에 MP40을 쥔 분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1번 방 확인!”
“2번 방 이상 무!”
“3번 방···.”
콰앙!
그 순간, 폭음과 함께 분대원의 목소리가 끊겼다.
“에밀! 대답해라, 에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빌어먹을. 막스, 파이퍼. 조용히 따라와라. 쿠르츠는 2층을 계속 감시하
고, 기관총 팀은 대기다.”
“알겠습니다.”
한스 마이어 중사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왼쪽 끝방으로 향했다.
MP40을 쥔 그의 손이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적인가? 아니면 부비트랩?’
방문 앞에 선 마이어는 수신호를 보내 병사들을 멈춰 세웠다. 조용히 귀를 기
울이자,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기랄··· 어떻게 한다.’
벽에 기댄 채 잠시 고민하던 마이어는 몸을 돌리면서 그대로 기관단총을 쏴
갈겼다.
타다다다당!!
“크악!!”
비명 소리와 함께, 총알 세례가 벽지와 바닥을 찢어발기며 방안을 휩쓸었다.
그 소리를 들은 마이어가 사격을 멈추고 방안을 살펴보자, 책상 밑에서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한스가 책상 아래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자, 그곳에는 소련군 병사 하나가 피를
쏟아내면서도 악착같이 모신나강을 조준한 채 엎드려 있었다.
“이런···!”
탕!!
찰나와도 같은 순간, 총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한스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으아아아아!!!”
타당탕탕탕탕! 철컥! 철컥!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잡아당기던 마이어는 총알이 다 떨어진 다음에야 겨우
총을 내려놓았다.
정신을 차린 마이어가 방안을 바라보니, 책상 밑에 있던 병사는 총알이 난자
하게 박혀 끔찍한 몰골이 되어있었다.
“후······. 3번 방 확보 완료. 파이퍼, 에밀의 시체를 수습해줘라.”
“예.”
두 사람이 복도에 쓰러진 에밀의 시체를 수습하는 동안, 마이어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것을 닦아냈다.
“···빌어먹을 쥐새끼 같은 놈. 아까 스쳤나 보군.”
아마 재수가 없었다면 자신도 저 소련놈의 길동무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한스 마이어 중사는 옆에 있던 커튼을 칼로 찢어 이마에 감
았다.
*****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문이 흔들린다.
며칠 전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는 저 소음에, 추이코프 중장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잠시 뒤, 언제나 그랬듯이 전령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이번에는 어디인가?”
어두운 표정으로 묻는 추이코프의 말에, 전령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 곡물 저장소입니다. 현재 파악된 바로는 그곳에서 지난 3일 동안 영웅적
인 분전을 펼치던 40명의 동무들이···.”
“됐네. 길게 말할 필요 없네.”
추이코프는 전령의 말을 차갑게 자르며 지도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곡물 저장소 자리에 놓여 있던 붉은 깃발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제기랄··· 정육 공장, 마마이 언덕에 이어서 이번에는 곡물 저장소인가. 중
요 거점들이 차례대로 무너지는군.’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관제소 역할을 해주는 마마이 언덕에는 지
금도 포탄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며칠 동안 독일군 기갑부대의 발을 묶어
주던 정육 공장은 끈질긴 야포 세례에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렸다.
이게 다 저 씹어먹을 중(重)야포 놈들의 작품이었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구경이 최소 30cm 이상의 거포라고 했던가? 아마도
세바스토폴 요새를 무너뜨렸던 그놈들이겠지.
그러나 무서운 것은 저 야포의 위력이 아니었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저것을
사용하는 독일군의 방식이었다.
애당초에 추이코프가 시가전으로 독일군을 끌어들인 것은 최대한 근거리에서
전투를 벌임으로써 놈들의 장기인 기동포위전과 강력한 화력 지원을 봉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에 독일군은 철저한 아웃 복싱 방식으로 응수하고 나섰다.
만약에 아군이 건물 안에서 굳건하게 버티면, 놈들은 뒤로 물러난 뒤 저 중
(重)야포로 통째로 무너뜨려 버린다.
반대로, 우리가 야포를 피해 물러나거나 약한 부분을 보이면 놈들은 기관단총
으로 무장한 부대를 보내서 건물을 점거한다.
그런 식으로 독일군은 도시를 한 블록씩 차근차근 갉아먹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물러서면 빼앗기고, 버티면 야포가 날아온다··· 빌어먹을 간사한 놈들 같으
니라고.’
추이코프 중장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있다간 일방적으로 당하다가 시가지를 모두 빼앗길 터. 이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러한 국면을 바꿔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대포병을 하거나 공군을 보내는 게 제
일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전력이 없으니···.’
오랫동안 고심하던 추이코프는 결국 쓰디쓴 결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군. 설령 더 큰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이쪽에서 반격에 나서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