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반격 (3)
“후···.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공수부대를 투입하다니. 소련놈들이 제법 머리
를 썼군.”
나는 중부집단군으로부터 날아온 보고서를 읽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1942년 2월 10일 상황보고
1. 모스크바 전선의 후방 지대에 대규모 적군 공수부대가 낙하하여 뱌지마 일
대와 주요 간선 도로가 점거되었음.
2. 이 예상 밖의 사태로 인해 3기갑군과 4군의 보급 및 후방의 안전이 심각히
위협받고 있음. 조속한 대처가 요구됨.
중부집단군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
‘예상 밖의 사태라. 아무래도 원수 각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군.’
고작 두 개의 항목밖에 쓰여있지 않은 상황 보고서였지만, 저 짧은 문장 하나
만으로도 클루게 원수의 분노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그가 저리 격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결국, 클루게 원수가 걱정했던 대로 예비대를 잘못된 곳에 너무 빨리 투
입해버린 꼴이 되어버렸으니까.
‘아니, 지금은 클루게 원수를 걱정할 때가 아니지.’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이 사태를 해결할 대
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나는 클루게 원수의 보고서를 옆으로 치워두고, 모스크바 일대가 그려진 대축
적지도 앞에 섰다.
그 지도 위에는 병력의 배치에 따라서 깃발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아군을 뜻하는 푸른 깃발들은 북쪽의 오스타시코프부터 르제프-모자이스크-칼
루가-브리얀스크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그 사이에 딱 하나, 붉은색 깃발이 외
롭게 서 있었다.
그것이 바로 뱌지마를 점거한 소련군의 공수부대였다.
2월 10일.png
‘뱌지마라···.’
뱌지마는 동쪽으로는 모자이스크, 북쪽으로는 르제프, 남쪽으로는 칼루가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다.
그렇기 때문에 뱌지마 일대가 막힌다면 3기갑군, 4기갑군, 4군, 그리고 이번
에 새롭게 투입된 예비대까지 모두 보급과 통신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뱌지마를 점령했다는 것은 역시, 놈들의 노림수는 아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인가?’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렇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만약 저 공수부대의 목적이 진짜로 보급선을 끊는 것이라면 굳이 뱌지마를 점
령할 것보다도 각지로 흩어져서 취약한 도로망을 차단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
적일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굳이 저곳을 점거했단 말이지. 그렇다면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을 터인데··· 그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내가 지도를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가 집
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참모차장님, 계십니까?”
“무슨 일인가?”
“클루게 원수 각하의 전화입니다. 참모차장님을 찾고 계십니다.”
“···알겠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통신실로 향했다.
내가 통신실로 들어가자 긴장한 표정으로 전화를 들고 있던 통신장교가 냉큼
나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후우···.’
나는 마음 속으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그가 내미는 군용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참모차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대장입니다.”
“···빨리도 받는군.”
수화기 너머로 클루게 원수의 노기 어린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길게 말하지는 않겠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자네는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셈인가.”
‘책임이라고?’
이상한 말이었다. 비록 소련군 공수부대의 침입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
지만, 벌써부터 그에 대한 책임을 논한단 말인가?
“···각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책
임을 논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니, 내 생각은 다르네. 예비대를 모두 투입한 마당에 후방이 뚫려버린 이
상, 자네의 이 도박 수는 벌써 실패한 거야. 나는 2기갑군과 3기갑군의 공세
를 물릴 작정이네.”
나는 클루게 원수가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뱌지마를 점령당했기 때문에 공세를 중단한다고? 고작 일개 공수부대가 그리
도 두렵단 말인가?
“안됩니다. 고작 공수부대 때문에 야전군의 진격을 물린다니요. 보급이 문제
라면 뱌지마를 우회해서 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뭐? 아··· 그러고 보니 자네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겠군. 방금 전, 아군 정
찰부대로부터 뱌지마의 공수부대 놈들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네.”
이어지는 클루게의 말에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점령지의 크기를 보면 거의 군단 규모라
고 하는군. 현재 우리 중부집단군은 놈들의 숫자를 최소 1만, 최대 2만5천이
라고 가정해서 대응하고 있네.”
‘최소 1만 명?’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의 소련군은 병력에 여유가 없어 수병이든 공수부대원이든 전부 소총을
쥐여서 보병으로 전선에 투입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뱌지마에 낙하한 공수부대도 원래는 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것을 급하게
차출해서 보낸 것일 텐데, 이런 상황에서 1만 명이 넘는 공수부대원을 동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또 다른 의문점이 남았다. 그렇다면 방금 클루게 원
수가 한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찰부대가 놈들의 규모를 1만 이상이라고 착각했다면 분명 그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터.
그리고 만약 저들이 정말로 1만이나 된다면, 저들은 어째서 뱌지마에서 움직
이지 않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던 역사와 정보, 의문점들이 하나둘씩 맞춰지면서 머릿속에서 퍼
즐이 완성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군. 그래, 그런 거였어.’
이 모든 것들을 미루어 추론한 결과, 답은 하나뿐이었다.
“각하, 뱌지마의 공수부대는 소련군의 블러핑입니다.”
“···블러핑이라고?”
“예, 놈들의 규모는 절대로 1만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에 턱없이 부족한 숫자
일 겁니다.”
자신만만한 내 태도에 클루게 원수는 차갑게 대꾸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군.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후방의 총
참모본부에 있는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설마 그것도 동부전선
외국군사정보과에서 알아낸 건가?”
“물론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뱌지마를 점거한 채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아군의 보급을 방해하기 위해서 교통의 요지
인 뱌지마를 장악한 것이지 않나.”
“아닙니다. 만약 놈들이 정말로 보급을 방해할 작정이었다면 뱌지마를 점령하
는 것이 아니라 각지로 흩어져서 보급로를 개별적으로 차단했을 겁니다.”
놈들의 목적이 정말로 보급을 끊는 것일 경우, 뱌지마를 점령하는 행동에는
크게 두 가지의 리스크가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뱌지마를 점령하고 지킬 경우, 아군에게 포위당하거나 격
퇴당할 위험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소규모일 때의 얘기지. 수가 1만이 넘어간다면 쉽게 포위당하거나 격
퇴당하지 않네. 그럴 경우, 그들을 격퇴하려면 아군도 적지 않은 수의 병력을
후방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럼 반대로 전면이 약해질 테니 그때 전선을 돌파
할 속셈이겠지.”
‘···정말로 대마(大馬)라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전략이 된다는 말인가. 일리
가 있군.’
나는 클루게 원수의 논리에 내심 감탄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뱌지마를 우회해서 보급한다면 어떻습니까? 그럴 경우, 그들
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저들도 움직임에 나서겠지. 아마 4군과 3기갑군의 후방을
공격해서 양면 공세에 나설걸세.”
확실히 클루게 원수의 주장은 논리적이었다. 만약 회귀 전의 나였더라면 아마
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말에 숨어있는 허점을 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려 1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추가적인 보급
없이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
현재 뱌자마의 공수부대원들은 지속적으로 보급품을 공수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공수부대원들은 처음 가지고 내린 보급품와 노획으로 얻은 약간
의 물자만으로 버티고 있을 터.
하지만 뱌지마에서 가만히 버티고 있는 저들이 과연 그런 방식으로 1만 명이
나 되는 병력의 보급 소요를 감당할 수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찰부대의 보고는 무엇인가. 설마 그들이 거짓 보고를 했단 말
인가?”
“아마도 정찰부대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수가 많아 보이도록 어떤 위장
을 한 것이겠지요. 놈들이 뱌지마에 틀어박혀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
유 때문일 겁니다.”
내 말을 되짚어보는 모양인지,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 이내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클루게 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후, 좋네. 그럼 일단 2기갑군과 3기갑군의 공세는 지속하도록 하지. 그렇다
면 뱌지마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아마 놈들의 규모는 많아 봐야 5천에서 6천 정도일 겁니다. 후방에서 재편
중인 사단 몇 개를 차출해서 포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를 믿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세.”
클루게 원수는 여전히 쌀쌀한 목소리로 답한 뒤, 전화를 끊어버렸다.
“후, 빌어먹을···. 정말이지, 쉽지가 않군.”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그제서야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낼 수 있었다.
*****
“여단장 동지, 최전방 초소로부터의 보고입니다. 현재 독일군 부대가 동쪽과
서쪽에서부터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아마 각각 1개 사단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알겠네. 대대장들을 집결시키게. 포위당하기 전에 뱌지마를 탈출한다.”
“예! 알겠습니다.”
참모장이 나간 뒤, 214 공수여단장 벨로프 대령은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2월 16일이면··· 고작 일주일 정도 버틴 건가. 생각보다 독일 놈들의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우리 공수부대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금부터였으니까.
벨로프 대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에는 이미 대대장
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로프는 그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동지들, 모두 이미 소식은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예!”
벨로프의 말에 대대장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벨로프 대령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씨익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좋다. 지금부터 각 대대는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적군의 후방 교란 행위를 수
행한다. 지금까지 이 촌구석에 처박혀 있느라 수고 많았다. 각자 마음껏 날뛰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