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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원수가 되었다-22화 (22/157)
  • 22화. 1942년

    “···아니, 믿네. 지금까지는 믿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군. 자네가 주장

    했던 허무맹랑한 말들이 전부 진실이었다는걸 말일세.”

    지난 6개월간의 일들이 어떤 심경의 변화를 가져다 준걸까?

    담백하게 모든 것을 인정하는 할더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그를 바

    라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할더의 말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총통의 신임에 기대서 작전에 개입해대는 자네의 방식은 용납할 수가

    없군. 지금 우리가 처한 꼴을 한번 보게. 이제 육군은 한낱 총통의 꼭두각시

    로 전락해버렸지 않나. 자네가 지금껏 한 행동들은 결국, 국방군을 위기로 몰

    아넣었을 뿐이야.”

    “···참모총장님께서는 작금의 이 사태가 제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자네의 잘못만은 아니겠지.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중간까지는 분명

    우리 육군이 전쟁을 주도하고 있었네. 자네가 개입했던 바로 그 회의 전까지

    는 말일세.”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개입했기 때문에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도대체 누가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나는 웃음을 숨기지도 않으며 말했다.

    “각하, 언제까지 그런 비겁하고 안일한 방식으로 작전권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할더와 군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총통에게 정면으로 맞선 적이 없었다. 그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좀더 소극적인 방식의 저항이었다.

    지금까지 할더는 총통의 명령을 교묘하게 회피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보고를 왜곡하는 등의 방법으로 히틀러의 눈을 피해 나름대로 독자적인 작전

    권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동부 전선에서 위기가 고조되고, 할더에게 동조해주던 지휘관

    들이 쫓겨나면서 그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뿐이었다.

    “현재 육군이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은 다른 누군가의 탓이 아닙니다. 육군이

    총통에게 정면으로 맞서기를 포기한 순간부터, 이렇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

    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정치에 개입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네!”

    “만약 정권이 작전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 국방군의

    모습을 보십시오. 총통께서는 저희의 작전권과 참모본부를 존중할 생각이 전

    혀 없지 않습니까?”

    “···후.”

    내 말에 할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모습에 확신을

    얻은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각하, 지금은 저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이젠 저희가 힘을 합쳐서 총통

    께 의지를 관철시켜야만 합니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엇을 말인가?”

    “중부집단군 말입니다. 설마 저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총통께서 후퇴를 허락해주지 않는 이상, 달리 방법이 없지 않나.”

    할더는 이미 체념한 듯이 힘없이 답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각하, 저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이 방법이라면 위기에 처한 중부집단군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 당장 말해보게!”

    “대신, 이번만큼은 제 의견에 무조건 동조해주십시오.”

    *****

    ‘예. 이 방법이라면 위기에 처한 중부집단군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저 녀석이 이 위기를 벗어날 만한 방책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파울루스는 끝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 녀

    석이 해왔던 일들을 보면 분명 뭔가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할더는 파울루스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새롭게

    중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클루게 원수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어두운 표정을 한 히틀러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하일! 히틀러!”

    히틀러는 요란하게 거수경례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준 뒤, 입을 열었다.

    “전황이 시급하니 곧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클루게 원수, 전선의 상황은 어떻

    소?”

    “현재 북쪽으로는 르제프, 남쪽으로는 칼루가까지 소련군이 파고든 상황입니

    다. 아직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언제 전선이 돌파당하더라도 이상하

    지 않습니다.”

    클루게 원수의 말대로, 현재 중부집단군의 상황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

    었다.

    비록 보크 원수의 결단 덕분에 어느 정도 전선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소련군

    의 공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중부집단군 전체가 남북으로 크

    게 포위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예비대의 부재입니다. 충분한 예비대가 있다면 어

    느 한쪽이 돌파를 당하더라도 버틸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단 하나의 부대

    만 뚫리더라도 중부집단군 전체가 붕괴할 판국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히틀러의 나지막한 물음에 회의실은 침묵에 잠겼다.

    사실 지금의 상황에서 취해야 할 조치는 분명했다. 병력을 퇴각시켜서 돌출된

    전선을 평평하게 만들고, 줄어든 전선의 길이만큼 생겨난 병력의 여유를 예비

    대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퇴는 곧 패배와 같다고 생각하는 총통이 이러한 조치를 허락할 리가

    없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실 안에 있는 모두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총통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이 어떻겠소?”

    “미국에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히틀러의 말에 할더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모스크바 전투와 미국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다가 눈앞의

    전투에서도 지고 있는 판국에 적을 늘리겠다니?

    그러나 총통은 모두의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소. 다들 얼마 전에 우리의 동맹국,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

    한 것을 알고 있을 거요.”

    “예, 12월 7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일본이 계속 우리 독일도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 해줄 것을 요구

    하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 일본도 소련을 공격해주지 않겠소?”

    총통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일본이 극동을 공격해주기만 하면 중부집단군을

    향한 소련군의 압박은 분명 줄어들 테니까.

    하지만 지금까지도 독일의 요구를 무시하며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

    는 일본이 과연 우리의 선전포고에 움직여 줄 것인가?

    “···혹시 저희가 선전포고를 하면 소련을 공격하겠다고 일본 측이 약속했습니

    까?”

    “물론 확답을 해주진 않았소.”

    할더가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히틀러는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게다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더

    라도 지금 당장 우리가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소. 일본의 공습 때문에 미국

    놈들은 태평양 함대의 절반 이상이 마비되었으니 말이오.”

    총통의 논리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그것보다 더 나은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회의실의 분위기가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 하는 것으로 굳어지려는 찰

    나, 드디어 파울루스가 입을 열었다.

    “총통 각하, 저에게 대안이 있습니다.”

    그 말에 회의실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파울루스에게로 쏠렸다.

    “좋소, 한번 말해보시오.”

    과연 저 녀석이 어떤 대단한 기책을 내놓을 것인가. 할더는 파울루스의 얼굴

    을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건 바로, 북부집단군의 병력을 차출해서 중부집단군의 예비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북부집단군을?”

    파울루스의 말에 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북부집단군에 예비대로 활

    용할만한 병력의 여유가 있었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지금 북부집단군은 무르만스크 공략에 나섰을 터, 그곳에

    최소 2개 군단이 동원되었다고 생각하면 남은 병력으로는 레닌그라드를 방어

    하는 데만 해도 벅찰 터였다.

    “할더 장군, 어떤가? 정말로 북부집단군의 병력을 차출해서 투입할 수 있겠나?”

    그렇기에 할더는 히틀러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파울루

    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각하. 방금 전 레프 원수로부터 1개 야전군 규모의 예비대가 있

    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무르만스크를 통한 랜드리스를 끊는 것이 목적이라면 중간의 철도선만 차단하

    면 된다고 판단해서 많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모총장님?”

    할더는 자신을 바라보는 파울루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그런 연락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거짓을 고하는 것인가.

    ‘대신, 이번만큼은 제 의견에 무조건 동조해주십시오.’

    그러나 잠깐의 고민 끝에, 할더는 파울루스를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예, 맞습니다. 그런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좋소! 지금 당장 북부집단군에서 병력을 차출하도록 하

    시오!”

    그렇게 그날의 회의는 끝났다.

    독일은 끝끝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으며, 레닌그라드 일대에 있던

    18군이 모스크바로 급파되었다.

    그리고 1942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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