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영광의 끝
“자네가 웬일인가. 설마 내 처지를 비웃으러 온 건가?”
“각하.”
나는 보크 원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힘없이 벤치에 주저앉은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독일의 승리와 영광을 이끌어
온 남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도 늙고 초라해 보였다.
‘···안타깝군.’
이번 일은 분명 보크의 실책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오판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아마 회귀하기 전이었다면 나 또한 그와 같은 판단을 내렸을 테
니까.
그런 나에게 보크는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간절하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네에게는 중부집단군을 구원할만한 무언가 방책이라도 있는
겐가? 있다면 뭐든지 말해주게. 경청하겠네.”
하지만 나라고 대책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일전에 레프 원수를 찾아가 부탁한 것이 있긴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고작
1개 야전군을 투입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보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냉정한 조언뿐이었다.
“각하, 현재의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건 바로, 각하께서 결단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
내 말에 보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내 시선과 보크의 알 수 없는 눈빛이 잠시 교차했다.
그러나 보크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럴 수는 없네.”
“어째서입니까?”
“자네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총통 각하께서는 어떠한 종류의 후퇴도 불허하
셨네. 그런데도 자네는 나에게 항명을 하라고 종용하는 것인가?”
“그것이 명령 불복종 행위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결단을
내리시기만 하면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는 병사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보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각하께서 두려워 하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총통의 명령입니까? 아니
면 패배에 대한 책임입니까?”
그러나 보크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전선으로 돌아가는 수송기에 몸을 실은 보크는
시트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나 보크는 도저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각하께서 결단을 내리시기만 하면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는 병사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각하께서 두려워 하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총통의 명령입니까? 아니
면 패배에 대한 책임입니까?’
방금 전, 파울루스가 했던 말들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그의 마음을 심란하
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 모든 것이 파울루스의 말대로였다.
총통의 앞에서는 고통받는 병사들에 대해서 호소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걱정
하는 것은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패배해버렸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방금 전 총통이 나의 패배를 지적했을 때 감히 반박할 수 없었고,
총통이 현지 사수 후퇴 불가 명령을 내렸을 때 감히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나의 불찰이로군.’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서 보크는 중부집단군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욱 암담한 현실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죄송합니다, 각하.”
보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중부집단군의 상황은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좌익의 9군과 제4기갑집단은 클린 외곽으로 밀려나 버렸고, 우익의 2군과 제2
기갑집단은 수샤-오카강 전선조차 지키지 못해 칼루가-툴라선까지 후퇴한 상
태였다.
12월 태풍 작전.png
그나마 중앙의 제3기갑집단과 4군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이는 이들이 잘
싸웠기 때문이 아니라 소련군이 좌익과 우익을 먼저 공격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황의 불리함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자네들이 직접 철수를 명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보크의 질문에 제4기갑집단 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과 제2기갑집단의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사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야전 지휘관들이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병
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총통의 현지 사수 명령을 무시한 채 퇴각을 명령했고,
그 결과물이 현재의 전선이었다.
‘아니, 저 친구들이 결단을 내려 퇴각해준 덕분에 지금의 전선이나마 유지되
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보크는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그들의 판단과 지시가 정당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괴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보크에게 구데리안과 회프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총통 명령을 위반하고 퇴각한 사실을 최고사령부에 보고해주십시오. 제가 한
행동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각하께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보크는 마음속 깊숙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들이 내린 결단은, 저들이 짊어지고자 하는 책임은 원래 중부집단군의 사령
관인 보크가 치러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망설이는 바람에 그 짐을 부하들에게 떠넘기고야 말았다. 그런데
도 저 녀석들은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크를 보호하려 하고
있었다.
‘각하께서 두려워 하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총통의 명령입니까? 아니
면 패배에 대한 책임입니까?’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보크의 머릿속에 파울루스의 말이 떠올랐다.
‘패배에 대한 책임이라···.’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동방을 정벌하기 위해 끝없이 진격하던 영광의 순간은 이제 끝났다.
장군이라면 승리를 취하는 것만 아니라 패배를 정리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결단을 내린 보크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퇴각은 나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니
두 사람은 전선으로 돌아가 부대를 계속 지휘하게.”
1941년 12월 21일, 보크 원수는 공식적으로 중부집단군 전체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에 힘겹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제3기갑집단과 4군도 방어에 유리한 루자,
모자이스크까지 철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월 22일, 보크 원수에게 한 통의 전보가 도착했다.
그것은 4군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중부집단군 사령관직을 인계하고
베를린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다.
*****
“참모차장님, 보고입니다.”
“고맙네. 거기에 두고 가게나.”
나는 참모 장교가 두고 간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그곳에는 보크 원수의 항명
이 만들어낸 엄청난 결과물이 적혀 있었다.
-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원수, 해임 및 예비역 장교단으로 전속.
- 4군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 원수를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함.
-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해임 및 예비역 장교단으로
전속.
- 6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를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함.
- 제2기갑집단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 해임 및 예비역 장교단으로
전속.
- 제4기갑집단 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해임 및 예비역 장교단으로
전속.
보크 원수는 자신이 사령관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가려
고 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가장 먼저 후퇴했던 구데리안 상급대장과 회프너 상급대장이 보크와 함께 해
임되었고, 과거부터 후퇴를 건의하던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도
군복을 벗게 되었다.
거기에 얼마 전 건강 악화라는 명분으로 스스로 물러난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까지 생각하면, 히틀러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인사
들은 모두 숙청을 당한 셈이었다.
“후···.”
나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독일 국방군은 히
틀러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병정 인형으로 전락하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이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가자, 그곳에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이었다.
“파울루스 대장, 잠깐 나 좀 보지.”
“···알겠습니다.”
우리는 할더의 집무실로 향했다.
나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커피만 마시며 침묵 속에서 기다리
고 있자, 할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게 자네가 바라던 것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이번 인사 발령 말씀이십니까.”
“그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보크 원수께서 자리를 지키시기를 바랬습니다.
다른 분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할더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이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내가 히틀러의 신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독일의 승리를 위해서는 군
부가 히틀러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째서 지금까지 총통의 편을 들었나?”
“일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조국의 승리를 위해서 간언했을 뿐
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각하께서는 납득하지 못하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할더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아니, 믿네. 지금까지는 믿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군. 자네가 주장
했던 허무맹랑한 말들이 전부 진실이었다는걸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