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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원수가 되었다-20화 (20/157)

20화. 태풍 작전 (6)

“젠장, 더럽게도 많구만.”

즈베니고로드의 한 초소에서 망원경으로 소련군 참호를 바라보던 슈레크 소위

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참호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황록색 철모들이 우글거리는 것만

봐도 놈들의 숫자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정도 숫자가 집결했다면, 이제 곧

공격이 시작되리라.

슈레크 소위는 초소에서 내려와 자신의 분대가 점거 중인 참호로 향했다.

그의 분대원들은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은 참호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 소위님 오셨습니까? 이봐, 오토. 커피 다시 끓여서 드려라.”

“아니, 필요 없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 테니 노리쇠 동결 여부나 확인해둬

라.”

“···예.”

슈레크의 지시에 분대원들은 각자 자신의 총을 옷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영

하 30도의 기온에 얼어 붙어버린 노리쇠를 입김이나 마찰열 따위로 녹여보려

는 것이었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군.’

슈레크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자신의 mp40을 점검하면서, 그런 병사들의 모습

을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비록 보급이 개선되면서 월동 장비들을 지급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러시아의 12월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거리 500!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슈레크의 분대가 참호에 기대고 대기하는 동안, 소련군의 참호에서도 움직임

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자 자리에서 대기! 기관총 팀의 사격에 맞춰서 공격을 개시한다!”

“예!”

슈레크 소위는 기관총 팀 옆에 엎드려서 다가오는 소련군을 바라보았다.

“···괴물 같은 놈들. 정말 끝도 없이 나오는 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작년의 프랑스 전쟁 때랑 비교하면 최소 4배, 아니 5배는

죽인 것 같은데 아직도 기어 나오는군요.”

“분명 총통께서는 우랄 산맥 너머에는 눈밭뿐이라고 하셨는데··· 소련놈들은

눈으로 병사를 만드는 기술이라도 있나 보군.”

“하하, 그러면 저희는 이미 진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슈레크가 기관총 사수와 자조적인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소련놈들은 눈밭을

가로질러 달려오기 시작했다.

“거리 150!”

“하사, 50m까지 들어오면 그때부터 사격을 개시하게.”

“알겠습니다.”

“전원 사격 준비!”

“사격 준비!”

슈레크의 명령과 함께 사방에서 노리쇠의 철컥거리는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우라아!!”

“어머니 러시아를 위하여!!”

“더러운 압제자, 나치 놈들을 몰아내자!!”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 소리를 들으며, 슈레크는 방아쇠에 손

가락을 걸었다.

“발사!”

*****

1941년 12월 15일.

살인적인 한파에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와중에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되자, 중부집단군 휘하의 지휘관들은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바로 현재 위치에서는 전선을 사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각하, 사방에서 소련군이 아군의 전선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적에게 포위당

하기 전에 병력을 퇴각시켜야 합니다.”

“저희 제2기갑집단도 현재 위치를 사수하기 어렵습니다. 수샤강과 오카강에

구축된 방어 진지까지 전선을 물리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제일 먼저 퇴각을 요청한 것은 역시 남쪽과 북쪽에서 가장 깊숙하게 진격해

들어간 제2기갑집단과 제4기갑집단이었다.

“···2군과 9군은 어떻소? 현재 위치를 사수할 수 있겠소?”

“현재로서는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지만, 이 정도 수준의 공세와 날씨가 계속

된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저희 2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다면 알렉신-칼루가-콘드로보 선까지 퇴

각하기를 원합니다.”

“흠···.”

야전군 지휘관들의 요청은 타당했다.

현재 일선의 부대들은 지나치게 공세적인 위치에 배치되어 있었고, 전선의 양

상 또한 위태로웠다.

그들의 말대로 유리한 지형까지 병력을 물린다면 방어할 면적도 줄어들고 전

술적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위대한 총통 각하께서 절대로 퇴각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

이었다.

‘젠장, 무조건 현재 위치를 사수하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보크는 암담한 심정으로 야전군 사령관들을 바라보았다.

2군 사령관 바익스 상급대장, 4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 제2기갑집단의 구데리

안 상급대장, 제3기갑집단의 호트 상급대장까지.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부터 이곳,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여정을 함

께 달려온 전우들이 자신의 결단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러나 보크는 결국,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직접 총통께 찾아가 건의해보겠소. 그러니 그때까지

는 현재 위치를 사수해주시오.”

*****

1941년 12월 20일.

보크는 고작 2주 만에 다시 한번 총통본부로 향하는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내 꼴이 우습군. 모스크바의 정복자가 되겠다는 야심에 제4기갑집단까지

빌려놓고서는 이제 후퇴를 청하러 가게 되다니.’

하지만 하찮은 체면 따위를 차리기에는 전선의 사정이 너무 심각했다.

현재 독일군은 가용 병력의 절반 가량을 모스크바 공세에 투입한 상태. 이들

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면 내년에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전투를

치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총사령부에서도 이런 심각한 전황을 알아준 것인지, 총통과의 면담 일

정은 신속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래, 우리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일단은 병력을 뒤로 물리고 내년을 기

약하는 거다. 저 빌어먹을 라스푸티차와 한파만 아니면 모스크바는 언제든지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총통본부에 도착한 보크는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스몰렌스크의 필사적이고 위태로운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마치 아

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처럼, 모두가 여유롭고 태연하게 지내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원수 각하. 총통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장교의 안내를 받아 히틀러의 집무실로 들어간 보크는

곧, 이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소, 보크 원수.”

“···이렇게 갑작스러운 면담 신청을 받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각하.”

“아니오. 나 또한 보크 원수에게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던 참이었소. 마침

잘 된 셈이지. 그나저나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오시었소?”

보크는 히틀러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자신의 요청이 그리 쉽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 수도 없는 법.

여기까지 온 이상 반드시 담판을 짓고 확답을 받아서 돌아가야 했다.

“말씀드리기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현재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인

해 중부집단군 전체가 위험에 노출된 상황입니다.”

“그렇소이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제 모스크바에 입성했다는 보고를

받았던 것 같은데··· 상황이 아주 급박하게 바뀐 모양이구려.”

“···그렇습니다. 소련군의 반격 규모가 저희의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데다가

현재 아군의 위치가 너무나도 위태로워서 후퇴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게다

가 너무나도 혹독한 날씨 탓에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끊은 히틀러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물잔을 내팽개치며 분노를 쏟아부었다.

“보크! 당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지난번 회의 때 당신이 뭐라고 했었지?

겨울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실패해놓고서는, 그 다음에는 제4기갑집단만 준다면 11월 안에 모스크

바를 점령하겠다고 했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뭐라고? 후퇴? 후퇴라고?”

히틀러의 뼈아픈 질타에 보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총통의 말대로였다.

확실히 이번 패배는 그의 실책이 맞았다.

결국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인 보크에게 히틀러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

리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보크 원수. 일선의 상황이 어렵다는 건 이해하겠소. 하지만 이미 모스크

바에 입성까지 한 마당에 퇴각이라니,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군.”

그러나 보크를 바라보는 히틀러의 눈빛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

“결국, 지금 소련놈들의 반격은 최후의 발악에 불과할 터. 그러니 이번 한 번

만 어떻게든 현재 위치를 사수해내시오. 알겠소?”

“···알겠습니다.”

*****

총통의 집무실에서 나온 보크는 복도의 벤치에 앉았다.

‘빌어먹을···.’

결국 실패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것도, 퇴각을 허락받는 것도.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하나? 현재 위치를 사수하

며 싸우다 죽으라고?

고작 얼어붙은 땅 쪼가리를 지키기 위해서 병사들의 피를 쏟아붓는다니. 그것

만큼 멍청하고 무의미한 명령이 또 있을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직접 그 명령을 내려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비참하군. 어쩌다가 내가 이런 신세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그렇게 자조하며 스몰렌스크로 돌아가려고 하는 바로 그때, 벤치에 앉은 보크

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자네가 웬일인가?”

그는 바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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