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태풍 작전 (5)
1941년 11월 23일.
모스크바 북서부, 교외의 한 오두막.
“프란츠, 일어나라. 아침이다.”
“벌써 아침입니까···.”
이른 아침, 하버 상사의 부름에 프란츠는 얼어붙은 몸을 뒤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잔 탓인지, 두툼한 방한복을 입었음에도 몸이 부슬부슬
떨려서 도무지 일어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후··· 젠장.”
한동안 웅크리고 앉아 추위를 쫓던 프란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
왔다.
오두막 앞에 세워둔 전차로 다가가자, 하버 상사가 먼저 엔진룸을 덥히고 있
었다.
“프란츠, 땔감 좀 더 꺼내라.”
“예.”
프란츠는 전차 뒤에 실어둔 땔감들을 꺼내 엔진룸 밑에 피워놓은 모닥불에 집
어넣었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전차에 시동을 걸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이렇게 30분씩
엔진룸을 녹여야 했다.
프란츠는 타오르는 모닥불에 손을 녹이며 하버 상사에게 물었다.
“상사님, 정말로 공세에 나서는 겁니까?”
“공세에 나서든 말든, 일단 준비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이제 슬슬 시동 걸어
봐라.”
“···알겠습니다.”
수동 크랭크를 돌려서 간신히 시동을 건 프란츠와 하버는 3호 전차에 탑승했다.
밤새도록 영하의 기온에 노출되어 있었던 전차 안에는 마치 냉장고처럼 한기
가 감돌고 있었다.
“오늘 기온은 영하 21도라는군.”
“어제 텐트에서 잔 놈들은 몇 명 얼어 죽었겠는데요.”
“이런 날씨에 정말로 공세 작전이 가능하겠습니까? 역시 취소되겠지요?”
“그야 모르는 일이지. 높으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프란츠의 302호 전차는 이런 혹독한 날씨에 이미 한계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포의 주퇴기와 포탑의 유압장치는 얼어붙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주포
의 조준경도 서리가 맺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상태로 소련놈들의 방어선을 돌파하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 장군님들도 생각이 있다면 이런 날씨에 공격 명령을 내리지는 않으리라.
프란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는 겔베 1. 각 차량, 응답 바람.”
“여기는 겔베 3. 수신 양호.”
“겔베 1에서 각 차량에게. 금일 작전은 기존의 예정대로 진행된다. 정시에 집
결지로 이동 바람, 이상.”
“여기는 겔베 3. 알겠다.”
소대장 차량과 무전이 끊어진 뒤, 차량 내부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후, 가자. 진격이란다.”
“예!”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궤도가 다시 한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당연히 모스크바였다.
*****
“각하, 제3기갑집단으로부터 보고입니다.
현재 즈베니고로드에 도달함. 그러나 더 이상은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움.”
“새롭게 투입한 제4기갑집단은 어떤가.”
“제4기갑집단은 현재 힘키까지 고작 10km 남짓 앞둔 상태입니다. 어쩌면 오늘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후······.”
보크는 작전 지도를 바라보며 고뇌에 빠졌다.
11월 태풍 작전.png
1941년 11월 23일.
이제 12월까지 고작 일주일 남은 현재, 중부집단군의 전황은 상당히 고무적이
었다.
북쪽에서는 호트의 제3기갑집단과 새롭게 투입된 제4기갑집단이 모스크바 시
가지에 거의 도달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구데리안 장군의 제2기갑집단이 오카
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도달하는 것이 곧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보크로
서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의 전선만 보면 아군이 유리한 상황이다. 북쪽으로 시가지에 진입할 수
도 있고 남쪽의 세르푸호프를 포위할 수도 있지. 하지만 정말로 올해 안에 모
스크바를 함락시킬 수 있을 지가 문제로군·.’
사실 모스크바를 포위하기 어렵다는 것은 11월 당시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크가 자신만만하게 다시 한번 공세를 개시했던
것은 바로, 모두가 예상했던 소련의 대붕괴가 곧 일어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보크의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모스크바에 포탄이 한 발 떨어지기만 해도 무너질 거라 생각했던 소련의 정권
은 아직도 북부의 무르만스크부터 남쪽의 카프카스 지역에 이르기까지 소련
전역에 걸쳐서 행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소련의 인민들도 그런 소련 정권에
충성하며 독일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의 상황도 그리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비록 대부분의 부대가 추진력을 상실하고 공세 종말점에 도달하긴 했으나, 때
마침 레닌그라드로부터의 새로운 보급선이 개설된 것이다. 덕분에 부족하게나
마 동계 장비도 갖추어졌고, 보급과 증원도 유지되고 있었다.
‘분명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아군이 불리하다고
할만한 상황은 아니란 말이지.’
이미 적의 목전까지 도달한 상황.
더 이상 진격하기는 어려워도, 현재 위치에서 버티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애매한 상황 때문에 보크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위치에서 버티며 내년을 기약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여력을 쏟아부어
서 공세를 지속할 것인가.’
그러나 보크의 이런 고민은 의외로 전선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해결되어
버렸다.
“가, 각하! 현재 세르푸호프, 나로포민스크, 힘키에서 소련군이 대규모 반격
에 나섰다는 보고입니다!”
주코프가 아껴두었던 극동 부대 55개 사단이 일제히 반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
깡!
귀를 찢는 날카로운 피격음과 함께 전차가 들썩거린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바람에 레버를 잡은 프란츠의 손도 같이 얼얼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젠장.”
“프란츠! 11시, pak(대전차포)이다!”
“알겠습니다!”
프란츠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먼저 조준하고 있던 T-34를 향해서 포탄을 발
사했다.
쾅!
포탑링을 관통당한 T-34는 불꽃에 휩싸이며 포탑의 뚜껑이 열렸다. 전차병들
이 탈출하는 모양이었다.
“프란츠! pak!”
“예! 고폭탄 장전된 거 맞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철갑탄입니다!”
“후, 빌어먹을.”
프란츠는 포탑 레버를 11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돌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탄을 교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철갑탄이라도 명중을 기
대하고 쏘는 것이 맞나? 그럴 바엔 차라리 대전차포는 보병들에게 맡기는 것
이 나을 텐데.
그러나 프란츠가 pak를 조준하는 동안에도 하버 상사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개판이구만.’
평소의 하버 상사라면 분명 제대로 지시를 내려줬을 터였다. 아니, 애당초에
발터가 탄종을 실수하는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3시간째 전투를 벌이고 있으니, 사람이라면 당연히 실수가 생길 수밖에.
‘후··· 그래, 내가 맞추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일이지.’
프란츠는 조준경 한가운데에 pak를 맞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쾅!
요란한 발사음과 함께, 참호에 반쯤 묻혀있던 대전차포가 뒤집어졌다. 직격을
맞춘 건지, 아니면 운 좋게 스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정도라면 무력
화되었으리라.
“좋았어! 잘 했다, 프란츠. 오늘은 컨디션이 좋나 보군.”
“컨디션이 아니라 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적을 물리친 프란츠는 조준경에서 눈을 떼고 포탑 전방의 페리스코프
를 들여다보았다.
11시의 대전차 진지도, 2시의 소련군 기갑부대도 모두 침묵했다. 이 근방에
더 이상 3호 전차가 처리해야 할 적은 없었다.
“전차 전진! 겔베 3, 현재 힘키를 향해 진격 중. 북서쪽 약 7km 거리인 것으
로 추정.”
“여기는 겔베 1, 수신 확인.”
프란츠를 태운 302호 전차는 홀로 고독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뒤따라
오는 보병 부대도 몇 없었다.
“상사님, 저희끼리 정말 이대로 모스크바로 가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곧 지시가 내려오겠지. 증원이 오던지, 아니면 퇴각
명령이 내려오던지.”
302호 전차는 힘키 교외의 방어선을 앞두고 진격을 멈췄다.
이쪽과 저쪽 간의 거리는 약 1500.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서로 포화를 주고받는 전투가 시작되리라.
따라오는 아군 부대를 기다리는 동안, 프란츠는 포탑 측면의 해치에 걸터앉아
상반신을 내밀었다.
302호 전차의 뒤에서는 태풍 작전 개시 이후로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진격해
왔던 장갑차 부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 그들의 앞으로는 저 머나먼 곳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프란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는 독일군이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입성하는 순간
이었다.
“프란츠, 저쪽을 한번 봐라.”
그때, 하버 상사가 프란츠에게 쌍안경을 건네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말씀이십니까?”
프란츠는 하버 상사의 손가락을 따라서 쌍안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곳
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상사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라. 저 멀리 탑 같은 게 보일 거다.”
탑이라고?
확실히 그 말을 듣고 보니, 저 희뿌연 안개 너머로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보
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괘종시계가 박힌 붉은색 탑과 그 위에 놓인 초록색 원뿔 모양의 첨탑
지붕. 그리고 그 꼭대기에 놓인 붉은 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별.
“···크렘린이다.”
그건 바로, 소련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크렘린 궁전이었다.
“그래, 크렘린이다. 우리가 벌써 크렘린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까지 진격
한 거다.”
하버 상사의 말에 그제서야 프란츠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크렘린 궁전이 어떤 곳인가. 저 사악한 공산주의자 놈들의 우두머리가 사는
본거지가 아닌가?
그런데 그곳을 눈으로 확인할 정도까지 도달했다니. 이제 곧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싹 터 올랐다.
“상사님, 저희가 크렘린 궁을 확인했다는 것은 따로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 닐스, 본부 중대로 연결해라.”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전기에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말이었다.
“겔베 1에서 겔베3에게. 지금 즉시 현 위치에서 퇴각하도록. 소련놈들의 반격
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