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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원수가 되었다-15화 (15/157)
  • 15화. 레닌그라드 전투 (1)

    “각하, 이제 곧 레닌그라드 해역으로 진입합니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쉬고 있던 카를 토프 제독은 항해장의 보고에 고개를 들

    었다.

    “남은 거리는 얼마인가?”

    “약 30해리입니다.”

    30해리라. 티르피츠의 항속이 28노트니까 약 1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1시간인가. 슬슬 일어나야겠군.’

    토프 제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함을 맡은 그의 티르피츠 전함을 중심으로 포켓 전함 어드미럴 쉐어, 경순

    양함 쾰른,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 엠덴.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무수히 많

    은 구축함들까지.

    자랑스러운 그의 함대가 위풍당당하게 발트해를 가로지르며 레닌그라드를 향

    해 나아가고 있었다.

    ‘정말 장관이군.’

    이제 1시간 뒤면 전투가 시작될 터였지만, 토프 제독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나 걱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사실 토프 제독에게 중요한 것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진짜 목표는 얼마나 압도적으로 이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수상

    함대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현재 크릭스마리네는 1차 대전 당시, 로열 네이비와도 맞서 싸우던 대양 함대

    의 위용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1차 대전의 결과 독일에게 씌워진 베르사유 조약의 굴레는 다른 누구보다도

    크릭스마리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였고, 우리는 재무장을 선언한 이후에도

    잠수함을 주력으로 굴리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물 속에 숨어서 어뢰나 던지고 도망가는 잠수함 따위로는 결코 수상함

    대를 대신할 수 없다.

    결국, 제해권을 장악하고 바다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수상함대뿐이었다.

    그렇기에 토프 제독은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렇게 대규모 함대를 움직일 기회를 얻었을 때 우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토프 제독의 함대는 레닌그라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저 멀리 레닌그라드가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저쪽에서 무언

    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견시, 보고!”

    “보고! 적함 발견! 기함으로부터 55도, 거리 약 11해리! 속도 약 20노트로 추

    정!”

    검은 연기를 내뿜는 두 개의 굴뚝, 그리고 구식 설계로 일렬배치된 4개의 포

    탑까지. 발틱 함대에 딱 두 척 있는 전함, 강구트 급이 분명했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드레드노트급 전함입니까? 엄청난 골동품이군요.”

    “고맙게도 제 발로 나와주시는군. 포술장, 준비되는 대로 사격을 개시하게.”

    멍청한 짓이긴 하지만, 사실 발틱 함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리라.

    저들이 항구에 틀어박힌다고 해도 압도적인 사거리를 내세워 포격해버리면 답

    이 없으니 한 대라도 때리려면 먼저 다가오는 수밖에.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나빴다.

    “발사!”

    “발사!”

    포술장의 구령과 함께, 52구경장 38cm 8문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

    “드미트리! 정신 차려라!”

    짜악!

    누군가 뺨을 후려치는 감각에 드미트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신을 차렸다.

    “정신차리라고!”

    “그만, 그만하십시오!”

    드미트리가 얼굴을 가리며 필사적으로 말하자 그제서야 무차별적인 폭행이 멈

    췄다.

    “드미트리, 정신이 드나? 누워있을 때가 아니다! 배가 침수되고 있다고!”

    젠장, 배라고? 침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드미트리는 선임병의 손길에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 분명히 크릭스 마리네 놈들이 나타나서 바로 배로 복귀했었지. 그리

    고···’

    그래, 맞다. 방금 전의 그 굉음. 분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배가 흔들렸었지.

    ‘그게 설마 저 빌어먹을 놈들에게 처맞은 거였나.’

    겨우 정신을 차린 드미트리는 그제서야 갑판 위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우뚝 솟아있던 거대한 함교는 완전히 옆으로 누워있었고, 1번 포탑 근

    처는 말 그대로 통째로 날아가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은 배에 대해서 일자무식인 드미트리가 보기에도 떠 있는 게 비정상으

    로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가라앉는 것 아닙니까? 상병님, 지금 당장 탈출해야 합니다!”

    “아니니까 따라와, 이 멍청한 놈아.”

    그의 손에 이끌려 선수까지 끌려간 드미트리는 그제서야 가라앉지 않는다는

    상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전함, 마라는 가라앉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이미 진즉에 침몰했지만 마침

    그 위치가 수심이 얕은 곳이어서 상갑판까지 물에 잠기지 않은 것뿐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드미트리가 그 모습을 보며 황당해하고 있을 때, 장교 한 사람이 다리를 절뚝

    거리며 계단 위로 올라가 외쳤다.

    “잘 들어라! 우리의 전함, 마라는 이제 불침함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자리

    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나치 놈들과 맞서 싸울 것이다!”

    “와아아아!!”

    “싸우자!”

    “3번, 4번 포탑병들은 자리로 돌아가라! 나머지 갑판병들은 물을 퍼내고, 부

    상자를 옮기도록!”

    드미트리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고, 그의 전함 또한 여전히 싸우고 있지 않은가?

    “좋아, 가자!”

    드미트리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근처에 있는 양동이를 들어 올렸다.

    *****

    “포술장. 저 전함은 왜 아직도 응사하고 있는 건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독님, 아무래도 수심이 얕아서 선체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모양입니다.”

    토프 제독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 항구에서 기어 나오는 전함을 집중사격한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 결과 저 전함의 1번 포탑은 유폭 되었고 선수가 통째로 날아가서 침몰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놈이 이상하게 좌초하면서 모든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침함이 되어버린 저 전함은 아직 살아있는 3, 4번 포탑으로 응사하

    기 시작했고, 발틱 함대의 나머지 함선들도 저놈의 엄호를 받으며 아군함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저놈의 사거리가 얼마지?”

    “드레드노트급의 12인치 주포라면, 최대 10km 정도는 충분히 닿을 겁니다.”

    “···그럼 10km 밖에서 놈을 침묵시켜야 한다는 거로군.”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힘들게 싸울 필요는 없었다. 설령 놈의 사정거리 안에서

    교전을 벌이더라도 공격력도, 방어력도, 명중률도 심지어 수적으로도 아군이

    월등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놈은 불침함이 되어버렸다.

    원래라면 배를 가라앉힐 치명타도, 저놈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저놈을

    쓰러트릴 방법은 남은 3, 4번 포탑을 모두 불능상태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제독님,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근거리에서 교전하면 안 되겠습니까? 놈

    의 포탑을 명중시키려면 지금의 거리에서는 조금 어렵습니다.”

    “···아니. 저 전함이 완전히 침묵할 때까지 사정거리 내로 접근하는 것은 금

    지하겠네.”

    게다가 토프 제독이 처한 상황과 강구트 급의 무시할 수 없는 주포가 상황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비록 구닥다리 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지만, 12인치 주포의 위력만큼은 진짜

    다. 만에 하나 아군함이 한 척이라도 침몰당했다가는 대양함대를 재건하는 건

    영영 물 건너간다.’

    결국 토프 제독은 장거리 포격과 폭격만으로 처리하는 것을 선택했고, 마라는

    무려 사흘 동안이나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며 노장의 패기를 보여주었다.

    쾅!

    “전함 마라, 침묵했습니다!”

    “···좋아, 함대 전진!”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결국 크릭스 마리네였다.

    고정된 자리에서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라는 연이은 포격과 폭격에 결국

    침묵했고, 그 뒤를 이어 강구트급 1번함 10월혁명호와 순양함 키로프가 차례

    대로 격침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구축함들도 최후의 돌격에 나서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발틱 함대가 바다 밑으로 사라지는 순간이

    었다.

    *****

    레닌그라드 시내 한복판, 아드미랄 테이스키 구에 위치한 성 이사악 대성당.

    현재, 레닌그라드 방위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는 이곳의 회의실에서는 연일 암

    울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현재 북서전선군은···.”

    콰앙!

    창밖에서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뒤이어 무언가 무너져내리는 소리와 시민들의 비명 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빌어먹을 놈들, 또 포격을 시작했나 보군.”

    “···그래 봤자 해안가의 건물들을 조금 부술 뿐입니다. 그쪽의 시민들은 모두

    대피시켰으니 안심하십시오.”

    “후,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레닌그라드 방위군 사령관, 레오니드 알렉산드로비치 고보로프 상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문제는 사기일세. 식량이나 탄약이 부족해도 승리에 대한 희망만 있으

    면 버틸 수 있네. 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리는 순간, 거기서 끝나는 법이야.”

    사실 크릭스마리네의 포격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저 거대한 주포로 건물에 직격타를 날리는 것도 무시무시한 일이긴 하지

    만, 저런 포격만으로 도시를 함락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도시 내부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은 물론이고, 도시의 시민들마저도 삶에 대한 희망

    을 놓아버리고 있었다.

    ‘제기랄, 차라리 바다에서 일전을 벌이고 장렬하게 전사해버린 해군 놈들이

    부러울 지경이군.’

    바로 그때였다. 한 병사가 회의실 안으로 다급하게 뛰어들어와 말했다.

    “사, 상장 동지! 독일놈들이 레닌그라드 시내에 상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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