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크레타 섬 전투 (2)
“낙하!”
“낙흐아아아악!”
또 한 명의 병사가 볼프만 소위의 손에 의해 수송기 밖으로 던져졌다.
괴상한 비명과 함께 떨어지던 그 병사는 곧 커다란 점으로 변했다.
“멍청한 놈. 낙하산을 너무 빨리 폈잖아.”
당연한 말이지만 낙하산을 펴면 속도가 감소한다. 그 말인즉슨, 체공 시간이
길어져서 오랫동안 적의 사격에 노출된다는 의미다. 아마 저 병사는 살아서
땅에 도착하기 어려우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볼프만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출입구 앞에 섰다.
이제 그가 뛰어내릴 차례였다.
옆에선 요란한 엔진음이 울려 퍼지고, 문밖으로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뿐.
솔직히 말해서,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어깨에 견장까
지 찬 그가 뛰어내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낙하아아아아!”
볼프만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외치며 수송기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곧 엄청난 중력의 힘이 그의 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사방이 빙글
빙글 돌면서 어디론가 이끌려 간다.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도 구분할 수 없
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심장은 요란하게 두근거리고 속에서는 헛구역질
이 올라왔다.
‘후우···.’
볼프만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침착하게 마음 속으로 숫자를 셌다.
‘···아홉, 열. 지금이다!’
훈련대로 정확한 순간에 낙하산 끈을 잡아당겼다.
됐다. 낙하산이 오작동하지도 않았고, 끈이 엉키지도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무사히 착지하는 것뿐.
퍼벙! 펑!
그때 저 멀리서 무언가가 날아와 허공에서 폭발했다. 그리고는 노란 불빛이
천천히 떨어지며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영국놈들이 쏘아올린 조명탄이었다.
“젠장···.”
그리 밝지 않은 조명탄 불빛이지만 허공에서 떨어지는 낙하산을 비추기에는
충분했다.
이내 지상에서는 대공포와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고,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
려 퍼졌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누군가는 포탄에 맞아 몸이 터져나가고, 누군가는 낙하산이 찢어져서 추락한다.
그 중 간신히 땅에 도착한 이들도 모두 무사하진 못했다. 어떤 이들은 낙하
도중 나무에 찔려죽었고, 또 다른 이들은 바다에 빠져 죽는다.
그래도 볼프만은 운이 좋았다.
다행히도 그는 발목을 살짝 접질리는 정도로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그러
나 볼프만처럼 사지 멀쩡하게 땅에 도착한 이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이게 전부인가?”
“예, 그렇습니다.”
따로 낙하된 무기 컨테이너에서 개인 무장을 회수한 뒤, 소대 집결지로 향하
니 그곳에는 소대원 40명 중 고작 15명만이 도착해있었다.
“15명이라. 기껏해야 1개 분대를 조금 넘는 수준이군.”
공수 작전이라는 것이 늘 그렇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라도 임무는 수행해야 하는 법.
볼프만 소위는 한숨 대신 큰소리로 외치며 앞장서 걸어 나갔다.
“자, 가자! 우리는 말레메 비행장을 점령한다!”
*****
“각하! 적습입니다!”
“응? 무, 뭐라고? 적습이라고?”
곤히 자고 있던 크레타 섬 연합군 사령관, 버나드 프레이 버그 소장은 적습이
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예, 독일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알겠네! 나가서 기다리게.”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이 버그는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곧바로 옷부터 갈아입기
시작했다.
‘제기랄, 독일군이라니···.’
그가 지휘하는 크레타 섬 방위군은 뉴질랜드 사단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여단
같은 2선급 부대들에 그리스에서 간신히 탈출한 패잔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독일군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단
추를 잠그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현재 크레타 섬 일대의 재해권은 연합군이 확실하게 쥐고 있는 상태. 비록 제
공권은 열세이지만, 독일놈들이 이곳으로 직접 올 방법은 없을 터였다.
‘아니, 제공권? 그럼 혹시 공습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프레이 버그는 자신을 깨운 당번병이 의심되기 시작
했다.
“···자네 설마, 국지적인 공습 때문에 날 깨운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정말 독일군이 쳐들어왔단 말입니다! 지금 당장 상황실로 가셔야
합니다!”
“알겠네, 알겠어. 그래, 자네 말대로 가서 보면 알겠지.”
그러나 상황실로 향하는 프레이 버그의 발걸음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만약 정말로 대규모 강습이라면 본국의 첩보팀이 연락을 줬겠지. 분명
별일 아닐 거다.’
수년 전, 영국의 첩보팀에서 에니그마의 해독에 성공한 이후로 지금까지 어지
간히 큰 작전들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러니 분명 큰일은 아
닐 터였다.
그렇게 안심하던 프레이 버그 소장은 상황실 문을 열자마자 뭔가 크게 잘못되
었음을 깨달았다.
“23 뉴질랜드 대대로부터 보고! 현재 완전히 포위되었음, 구원 바람!”
“21 뉴질랜드 대대로부터 보고! 말레메 비행장은 이미 점거당했음, 현재 활주
로 외곽에서 교전 중, 증원이 필요하다!”
“젠장, 소장님은 언제 오시나!”
당직 사령의 분노 섞인 외침에 프레이 버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미 와 있네. 상황을 보고하게.”
“···오셨습니까. 현재 독일군 낙하산부대가 대규모 공수 작전을 벌이고 있습
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으며, 말레메 비행장을 둘러싸고 교
전 중입니다.”
“뭐? 낙하산부대?”
그러나 이번에는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독일 낙하산부대가 어떤 놈들인가. 작은 마지노선이라 불리던 벨기에의 에반-
에마엘 요새를 단 하루 만에 함락시킨 괴물같은 놈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놈
들이 크레타 섬을 침공했다고?
프레이 버그는 암울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봐
도 현재로서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통신들도
모두 패퇴하는 부대들의 추측성 보고뿐이었다.
“음···.”
그래,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놈들이 굳이 공수 작전으로 침공했다는
것은 아직 제해권을 빼앗기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놈들은 보급
도 증원도 모두 공중 수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거겠지.
‘하긴, 그러니까 저렇게 필사적으로 비행장을 확보하려는 거겠지.’
게다가 프레이 버그가 듣기로는 낙하산 부대는 중량의 문제 때문에 장비를 충
분히 갖추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놈들은 기갑 전력은커녕 변변한 중화기조차도 갖추지 못한
알보병들 뿐이라는 거겠지.
만약 그렇다면 저 비행장만 지키면 된다.
아직 놈들은 소수일 것이고, 저곳만 사수한다면 더 이상의 증원은 오지 못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프레이 버그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가용한 예비 전력을 모두 말레메 비행장에 투입하게! 적을 당장
소탕할 필요는 없다. 어떻게든 저놈들이 활주로를 사용하지 못하게만 만들면
된다!”
“알겠습니다!”
프레이 버그는 자리에 앉아서 근방의 하니아 항만에 배치되어있던 오스트레일
리아 대대와 영국군 대대가 말레메 비행장으로 급파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됐다. 적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병력을 투입했
으면 놈들을 저지하기에는 차고 넘치겠지.
아침이 되어 동이 트면 상황이 정확히 파악될 것이고, 그때 다시 대책을 세우
면 될 것이다.
프레이 버그 소장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 돌리고 있을 때, 갑자기 무전기 너
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전기를 들고 있던 참모 장교는 사색이 된 얼굴로 프레이 버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 각하···. 이라클리온 비행장과 레팀논 비행장에서도 적의 강습이 시작되
었습니다!”
*****
“대가리 숙여!!”
파바바바박!
무시무시한 기관총 세례가 머리맡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간다.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돌조각과 나무 파편들이 볼프만의 목덜미 위로 쏟아졌다.
피탄음이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볼프만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봐! 다들 살아있나?”
“사, 살려줘···.”
그의 주변에는 함께 싸우던 팔슈름예거 대원들이 고꾸라진 채 피를 흘리고 있
었다.
‘젠장···.’
말레메 비행장을 확보하려는 팔슈름예거 부대들의 상황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적들은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채 전선을 조여오고 있는데, 우리가 전선을
유지할 방법은 빗발치는 포탄을 맞아가면서 버티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포탄을 피하자고 현재 위치를 이탈할 수도 없었다.
여기서 더 물러나면 전우들이 피 흘려가며 확보한 활주로까지 적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2파가 도착하기만 하면 우리가 이긴다!”
“예!”
우리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이제 막 출발했다는 2파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다.
중화기로 무장한 2파가 도착하기만 하면 현재의 이 전력 열세도 해소되리라.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저 활주로를 사수해야만 했다.
“후···.”
볼프만은 근처의 수풀 뒤에 몸을 숨긴 뒤, 조심스럽게 적의 기관총 사수를 겨
냥했다.
그가 들고 있는 총은 방금 전 노획한 리엔필드 소총. 쏴본 적도 없고 조준점
도 안 맞을 텐데 과연 맞출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젠장··· 못 맞추면 죽는 거지, 뭐.’
이 소총의 원래 주인이 조준점을 제대로 맞춰 놓았기를 기도하며, 볼프만은
조심스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요란한 격발음과 함께 어깨에 묵직한 반동이 느껴졌다. 느낌이 좋다. 재빨리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니, 연신 불을 내뿜던 기관총이 침묵하고 있었다.
“돌격! 기관총을 노획해라!”
“와아아아!!”
기관총이 멈추자마자, 볼프만 소위와 팔슈름예거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놈들이 기관총을 쥐는 게 먼저냐, 아니면 우리가 진지까지 도착하는 게 먼저냐.
만약 놈들이 빠르면 우리는 고깃덩어리처럼 분쇄될 터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승리의 여신은 우리의 편을 들어주었다.
“잡았다!”
기관총을 잡은 볼프만은 거치된 총을 그대로 들고 몸을 뒤로 돌았다.
그 순간, 기관총 진지를 향해 달려오던 영국놈들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쥐
새끼마냥 얼어붙었다.
양측의 운명이 갈리는 찰나의 순간.
볼프만은 자비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적들은 마치 볼링핀처럼 그 자리에 그
대로 고꾸라졌다.
“여기 와서 탄띠 잡아!”
“예!”
제대로 자리를 잡은 볼프만은 지금까지의 울분을 갚아주겠다는 듯이 쉬지 않
고 방아쇠를 당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 번째 총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 저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위님! 아군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토록 기다리던 수송기가 활주로에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크레타 섬 전투의 승기가 독일군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