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크레타 섬 전투 (1)
영국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
1733년 이래로 지금까지 영국 총리의 관저로 사용된 이 건물은 현재, 독일군
의 공습과 폭격으로 인해 내부가 비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칠 내각까지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다우닝가 10번지 지하의 벙커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독일
에 대한 저항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놀라운 저항 정신과는 반대로, 현재 전황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 본토까지 전부 다 독일놈들의 손에 넘어갔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그럼 북아프리카는? 그 여우인지 고양이인지 하는 독일놈은 막았소?”
“그렇습니다. 현재 토브룩은 비록 포위당한 상태이긴 하지만 굳건히 항구를
사수하고 있으며, 동쪽에서도 일단 소파피 인근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멈춰 세
우는데 성공했습니다.”
독일군을 멈춰 세웠다면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자신이 없는 장군의 말에 처칠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소파피? 그건 또 어디요.”
“카이로에서 약 600km 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그럼 이집트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전부 빼앗겼다는 말이지 않소? 그리고,
토브룩도 결국 적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이라는 것 아니오!”
”···죄송합니다.”
“젠장,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는 이제 좀 그만하면 안 되겠소?”
노성 섞인 수상의 말에 국방부 장관과 장군들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처칠은 혀를 끌끌 찼다.
“후···. 이제 와서 고함쳐봤자 무엇 하겠소. 그런다고 독일놈들이 물러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나 말해보시오.”
한층 수그러든 그의 태도에, 장관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저희들의 판단으로는 현재 그리스 전역과 북아프리카 전
역을 동시에 방어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리스에 있는 병력을 빼내어 북아프리카의 중동 파견군을 보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처칠은 지중해 지도를 내려다보며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실 장관의 말은 타당했다. 이집트에는 영국의 동맥과도 같은 수에즈 운하가
있다. 그러니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를 버리
는 것이 옳으리라.
하지만 지중해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 하나가 자꾸 처칠의 눈에 밟혔다.
“그럼 크레타 섬만이라도 지켜낼 수는 없겠소?”
“어렵습니다, 각하. 크레타 섬은 결코 작은 섬이 아닙니다. 저곳을 지켜내려
면 최소 3만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할 겁니다.”
“지금 지중해의 제해권은 우리 영국 지중해 함대가 장악하고 있지 않소. 바다
에서 놈들을 막아 세운다면···.”
“하지만 제공권은 독일군이 압도하고 있습니다. 각하, 저희가 대승을 거두었
던 타란토 공습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적절한 공중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함대
는 더 이상 무적이 아닙니다.”
처칠은 약한 소리나 해대는 장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독일놈들도 섬을 함락시킬 방법이 없는 것은 마
찬가지 아니오!
결국에는 빼앗길지 몰라도, 저 섬을 독일놈들에게 공짜로 넘겨주는 것은 있을
수 없소. 지금 당장 크레타 섬을 방위할 계획을 세워서 보고하시오!”
“···알겠습니다.”
또 시작된 처칠의 똥고집에, 장관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
영국이 크레타 섬을 사수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때, 그리스에서는 독일군의 크
레타 섬 침공 계획이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육군 참모본부에서 제1참모과장을 맡고 있는 프리드리히 파울루
스 중장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제7공수사단장 쿠르트 슈투덴트 중장입니다.”
그리스 본토를 점령한 지 일주일이 지난 5월 5일, 나는 크레타 섬 침공작전을
감독하기 위해 그리스 아테네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반겨준 것은 바로 팔슈름예거의 아버지, 슈투덴트 중장이었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총통 각하께서는 이번 작전을 위해서 장군의 제7공수사
단과 제5산악사단을 통합해 새로운 공수군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제 곧 군단장이 되시겠군요.”
“하하, 그게 다 파울루스 장군께서 대규모 공수작전을 입안해주신 덕분 아니
겠습니까. 참모본부에 공수부대의 가능성을 알아주는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
입니다.”
회의는 연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발칸 반도 작전과는 다르게, 크레타섬 전투는 상
처뿐인 승리로 끝났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언가 작전을 바꿔야 할 텐데,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일단 공수 부대를 투입해서 침공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상륙작전을 치르고 싶었지만, 지중
해의 제해권을 빼앗긴 지금의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병력을 언제 어떻게 투입하느냐가 문제로군.’
“좋습니다. 그럼 우선, 슈투덴트 장군께서 생각하시는 작전 계획을 들어보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이번 작전은 1파와 2파로 나누어서 두 번에 걸쳐 병력을
투입할 예정입니다.
참모차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번에 새롭게 배속된 산악사단의 병력들은 공
수 강하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항공기로 수송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1파로 투입될 제7공수사단이 비행장을 장악하고, 그 다음에 2파로 제5
산악사단을 투입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정확합니다. 3개 공수돌격대를 투입해서 말레메, 레팀논, 헤라클리온 비행장
을 동시에 탈환하는 것이 1차 작전 목표입니다.”
이는 제7공수사단만으로 점령하기에는 크레타섬이 너무 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크레타섬의 방위를 맡은 병력은 영국군 1만에 그리스 의용
군과 민간인들까지 더해서 대략 3만여명 정도.
이들의 장비와 훈련 상태가 형편없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소 2개 사단 정
도는 투입해야 점령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독일군이 보유한 공수 부대
는 고작 1개 사단뿐.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이런 축차 투입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럼 작전 개시는 언제입니까?”
“5월 15일 오전 8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크레타 섬 지도를 바라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일단 한가지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야간에도 공수 작전을 실시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주간작전보다 어려움이 따르긴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럼 야간으로 시간을 변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군께서는 습격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예, 아무래도 목표가 요충지인 비행장이다보니 적의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공수부대의 경우, 아무래도 낙하를 하는 동안이 가장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커다란 낙하산을 펼치며 내려오는 병사들은 대공포의 좋은
과녁에 불과하고, 착륙에 성공하더라도 장비 컨테이너를 찾아서 무기를 회수
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번 작전에 한해서는 에니그마를 사용하지
마시고 무조건 유선 전화기를 통해서 연락하십시오.”
이 무렵, 영국의 암호해독팀은 독일군이 사용하는 에니그마의 보안을 뚫은 상
태였다.
그로 인해서 아군의 작전개시 시간과 장소까지 모든 것이 적에게 낱낱이 까발
려진 상태였고, 영국군이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 시간과 장소에서 공수 작전
을 개시했던 팔슈름예거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섬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로 끝났었지. 그
렇다면 에니그마와 주간 작전만 피하더라도 쓸데없는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터.’
그러나 슈투덴트 장군은 내 말에 납득하기 어려운 기색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에니그마의 보안은 완벽하지 않
습니까.”
나는 그런 그에게 감히 거부할 수 없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는 총통 각하의 지시사항입니다.”
*****
“다들 준비됐나?”
“예! 그렇습니다!”
“다 도착해서 개소리하지 말고, 지금 확실하게 점검해! 수송기에서 낙하산 없
다고 하는 새끼는 내가 밀어버릴 테니까!”
“예!”
볼프만 중위가 윽박지르자, 소대원들은 그제서야 자신의 장구류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들···. 저 자식들은 지금부터 우리가 죽으러 간다는 걸 알기나 할까.’
볼프만 소위는 아직도 희희낙락거리고 있는 소대원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볼프만도 한때는 저런 시절이 있었다.
팔슈름예거라는 가장 대단한 부대의 일원이 되어서, 가혹한 훈련을 이겨내고,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뛰어들어간다는 자부심에 젖어있던 시절이.
그러나 몇 번의 실전을 거치면서,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정예병들이 어이없는
사고로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걸 본 볼프만은 더 이상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다.
중대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작전은 역대 최대의 공수 작전이 될 거라고 했
다. 그 말인즉슨, 역대 최대로 위험하다는 소리겠지.
‘···오늘은 또 얼마나 죽어 나가려나.’
그가 그런 걱정을 하는 동안, 활주로 저편에서 거대한 물체들이 다가오기 시
작했다. 그건 바로 우리를 크레타 섬까지 데려다 줄 Ju-52 수송기였다.
볼프만은 수송기의 앞에 서서 자신의 소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미우나 고우나,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온갖 고생을 겪었던 전우들이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새기면서, 볼프만이 입을 열
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는 모두 알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예!”
“당연한 일이지만, 위험한 작전이 될 것이다. 어쩌면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르
지.”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 때문일까.
평소라면 웃으며 농담이나 던졌을 놈들이 볼프만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무적의 팔슈름예거지 않나. 설마 우리 소대원
들 중에 낙하산도 못 펴는 놈은 없으리라고 믿겠다!”
“하하하!!”
“맞습니다!”
“자, 가자! 우리는 오늘 크레타 섬을 정복한다!”
“예!”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팔슈름예거 대원들이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고요하던 밤하늘에 요란한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